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 내지 야욕은 우리를
늘 격분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감정 및 심기가
거기에 부화뇌동해서 일희일비하면 그 자체가
저들의 교활한 시험에 빠지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당과 야당 내지 우파와 좌파라는
국내 정쟁(政爭)에 의한 역학관계나
역시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군중심리는 물론이고,
가정이나 사회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행되는
크고 작은 감정싸움이나 ‘전쟁’ 등을 목격할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칙양(則陽)’편에 나오는
이른바 ‘와우각상의 싸움(蝸牛角上之爭)’이 그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와 제나라가 서로 동맹을 맺습니다.
그 후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 배반해버립니다.
격분한 위나라 혜왕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복을 하리라 작심하고 신하들과 그 대책을 모색합니다. 자객을 보내어 제나라 임금을 암살하고자 하는 계략도 나오고, 암살보다는 당당히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매파 신하도 있습니다. 반면에 백성을 전란에 빠트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평화를 주장하는 비둘기파 신하도 있습니다. 그때 그런 주장들을 다 비판하면서 신하 화자(華子)가 나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시비의 분별을 떠나 도(道)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아야합니다.”
그러자 혜왕은 곤혹에 빠집니다.
현실 정치 내지 현실 외교에서 ‘도의 관점’이라니? 영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재상 혜자(惠子)가 대진인(戴晋人)이라는 도인을 왕에게 소개합니다.
이윽고 나타난 대진인이 왕에게 묻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달팽이라는 동물을 아십니까?”
“알고 있소.”
“달팽이 왼쪽 뿔엔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엔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두 나라 간에 서로 영토를 빼앗고자하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죽은 자가 수만이었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적한 지 15일 만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 참 터무니없는 우화로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현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이 우주의 사방과 상하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끝은 없겠지요.”
“그럼, 그 끝이 없는 우주의 마음으로 보자면(知遊心於無窮) 사람이 왕래하는 나라들이 있는 듯 없는 듯 보이겠지요?”
“그렇겠지요.”
“사람이 왕래하는 나라 중에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양나라가 있고, 양나라 안에 임금님이 계십니다. 우주의 무궁한 마음으로 보자면, 임금님과 달팽이 뿔 위의 나라의 임금인 만씨와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다른 점이 없겠소이다.”
그리고 대진인은 물러갑니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혜왕은 그 후 보복전쟁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와우각상(蝸牛角上)
교자논웅(較雌論雄)
허대세계(許大世界)-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비교하고 논한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니까 ‘우주’ 내지 ‘도(道)의 관점’이라는 ‘큰 마음’에 열리면,
사소한 싸움이나 감정적 싸움이나 무익한 전쟁 등을 피할 수 있고,
그런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나 ‘밴댕이 소갈머리’나 저 ‘달팽이 두 뿔들’처럼 속 좁은 교만이나 사고나 감정에 사로잡혀 이웃을 시기하는 것도 이웃과 싸우는 것도 다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자연 내지 우주라는 보다 ‘큰 세계’ 내지 ‘도의 관점’에 열리면, 현실적인 싸움이나 전쟁은 결국 피차를 불행하게 만드는 구속이자 재앙일 뿐이니까요.
실인즉 우리가 제법 높은 산에만 올라가도 세상의 모든 물질은 눈 아래로 보입니다. 청와대도 ‘삼성빌딩’도 ‘현대빌딩’도 다 눈 아래로 보입니다. 그냥 다 같은 성냥갑처럼 보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가치들이 인간 우리를 진실로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기 있는 우리 조상들은 ‘관직에 나가면 유가(儒家)가 되고, 낙향을 하면 도가(道家)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그것은 세상 내지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집안과 나라와 천하를 차례대로 올바르게 닦아나가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건전한 충효사상이자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지혜인 공자 및 맹자의 유교 사상이 필요하고, 낙향을 하면 또한 현실로부터 초월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적인 노자 및 장자의 사상 내지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요약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자연’의 생명력이나 위력은 알았어도 ‘말씀’ 내지 ‘계시’의 영성(靈性)이나 그 성령의 생명력이나 능력은 알지 못한 때문이었겠지요. 장자는 자연 내지 우주가 그런 것처럼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는 것이고, 인생이라는 존재는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다만 흘러가는 것이라고 정의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물(道)의 흐름처럼 낮은 곳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런 삶 자체가 현실로부터의 최고의 초월이자 자유이자 선(善)이자 덕(德)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또한 장자의 자유의 경지인 ‘초월 사상’은 자연 내지 우주라는 피조물(被造物)의 차원에서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도(道)’에는 우주나 자연 등 그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분이 확실하게 ‘살아계십니다.’ 창조주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는 ‘창세기’라는 시작이 있고 ‘종말론’이라는 끝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인간 우리는 그 한 과정에서 살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큰 마음’의 세계는
장자의 저 ‘큰 마음’의 세계보다 훨씬 크고 인격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참 ‘도(道)의 관점’, ‘온전한’ 참 길의 관점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의 마음' 곧 진실로 '큰 마음'의 세계이자 '큰 자유'의 세계를 들어봅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5:43-45)
그렇습니다.
햇빛도 이른 비 늦은 비도 ‘악인과 선인에게’,
‘의인과 그 원수에게’ 다 함께 내려주시고 다 함께 비춰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신 마음’이자 온전하신 사랑이자 온전하신 ‘큰 마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에게 ‘독도’를 달라는 일본에게 ‘울릉도’까지 내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적어도 불화와 분쟁과 전쟁 등을 충동질하는 악령(惡靈) 내지 일본의 ‘더러운 마음’에 의해 자극을 받아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고 의연해질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 어느 분야에든 ‘선인’이나 ‘의인’도 있지만, ‘악인’도 있고 ‘원수’조차도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설령 ‘악인’이나 ‘흉사’를 만나도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으려니”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죄악을 예사로 일삼는 악령이나 상대방의 ‘더러운 마음’이나 ‘흉사’ 자체에 휩쓸려 ‘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시험이나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되레 상대방의 그런 더러운 마음 내지 교활한 마음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
저 ‘진리’는 하나님 및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석이라도
달듯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3:17)
따라서 진정한 자유 곧 참 자유는 유가(儒家)의 이성적 내지 현실적 열림이나 도가(道家)의 자연이나 우주에의 열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유가나 도가의 지혜나 자유를 저도 배우고자하고 음미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참 지혜나 참 자유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열림에서 온다고, 저는 믿는 사람입니다.
실인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론 자연이나 우주의 질서마저도 초월하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들을 증거로 행하시면서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세계’ 곧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영적(靈的) 자유의 세계에 대한 신비와 비밀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12:18)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세상적 내지 육체적 이해타산이나 각종 탐욕을 쫓아내고, 이기적이고 패권적이고 보복적인 ‘와우각상의 싸움’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음의 세력마저 쫓아내고 부활(復活)하신 분입니다.
참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도 바뀝니다.
또한 바뀌어야만 합니다. ‘전무후무한 지혜자’인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자 저 장자보다 ‘더 큰 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연한 삶 자체가 그랬으니까요. 현실적인 ‘세상의 떡’의 가치보다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마태복음4:4)의 가치가 더 소중해지고, ‘성전 꼭대기’에서 부리는 자기 과시를 위한 말씀의 오용이나 왜곡보다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에의 겸손한 순종의 가치가 더 소중해지고,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좇는 세상적 야심이나 탐익보다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는’ 영적 순결의 가치가 더 소중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떡’이나 천하 만국과 그 영광‘ 등으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하다, 거룩하게 하다’
곧 헬라어 ‘하기아조(hagiazo)’의 의미는 ‘구별하다, 분별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 내지 세상의 지혜나 욕심이나 ‘이방인들’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그래서 구별 내지 분별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선(善)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야고보서4:17)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온전한 진리’ 곧 ‘참 진리’나 ‘선’을 많이 알고 깨달은 자는, 장자처럼 스스로 ‘대붕(大鵬)’이 되거나 ‘신선(神仙)’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레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 ‘작은 중의 작은 자’가 되고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한 인간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참 도의 비밀이자 참 자유의 경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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