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순절(四旬節) 기간입니다.
금년 부활절은 4월 20일이더군요.
우리나라의 설날이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에
매년 다른 것처럼, 부활절도 매년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을 일컫는 ‘서방교회’는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하고,
그리스 정교회나 동유럽권 등을 일컫는 ‘동방교회’는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교회 내지
교파 사이에서도 서로 차이가 납니다.
보편적인 이해처럼,
‘춘분 이후 첫 보름달이 뜬 날의 바로 다음 일요일’이
부활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죄인인 저나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해
친히 속죄양이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비밀에
보다 경건하고 보다 진지하게 동참하고자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성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진솔한 참회와 용서와 사랑과 나눔 등을 위한
신앙고백의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어 명언이 있지요?
-No Cross, No Crown.-
그렇습니다.
범사에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희생이 없으면 가치 있는 삶도 없습니다.
‘자기 부인(否認)’이 없으면 하늘의 성취도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 내지 죽음이 없으면
승리이자 영광인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해나 사순절은 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3월 5일이 되더군요.
물론 개신교에서는 ‘재’를 몸에 뿌리는 등의
종교의식을 시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사적으로
저 ‘거룩한 재(聖灰)’가 의미하는 게 뭡니까?
한 마디로, ‘재’ 같은 인간 우리 육신의 허무한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자 아울러 그것에서의 구원 곧 영혼의 구원을
위한 참회 내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잃고
다만 ‘육체(肉體)가 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이렇게 인간의 한계와 운명을 정의 및 선언하십니다.
-너는 흙(dust)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3:19)
저 ‘흙’ 곧 히브리어 ‘아파르’는 ‘마른 흙, 먼지’를 의미합니다.
그렇듯 인간의 육신이란 ‘허무한 존재’이자
그것으로 돌아가야만 할 ‘죽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런
인간 우리의 허무한 정체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성’이라는 극도로 타락한 세상 내지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멸망이 아닌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중보기도’를 드릴 때,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겸손한 자기 고백의 모본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dust and ashes)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세기18:27)
이른바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인간들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여전히 ‘흙’일 뿐입니다. ‘티끌과 재’일 뿐입니다. ‘개나 돼지’ 등 여느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조하신 바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 먼저 회개를 통한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최고의 목적이자 부여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죄악에 찌든 인생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이나 죄악에 찌든 이웃을 그래도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랑(agapee)해야만 할 이유나 의무가 거기 있습니다. 그 모범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6)
저 ‘영생(Eternal Life)’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영성(靈性)’입니다.
그러니까 참 영성은 한 마디로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신학자’이자 ‘영성신학의 대가’인 유지 피터슨 박사는
진정한 영성의 개념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진정한 영성,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고,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 곧 예수 그리스도께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진정한 성령은,
특정 목회자 내지 인간 자기의 ‘번영신학’도 ‘성공신학’도 아닙니다. 만사 형통, 운수 대통의 ‘기복신앙’도 아닙니다. ‘값싼 은혜’로 점철된 ‘부흥신학’이나 은사 체험도 아니고 또한 지적 유희나 변증을 일삼는 현학적인 특정 학자의 고등학문이나 ‘자유주의신학’도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진정한 성령이 인도하는 목표이자 푯대는,
늘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본받고 닮아가는 성숙한 삶 그 자체입니다.
물론 돈도 재물도 지식도 학문도 신분도
그것에의 성공이나 번영도
세상살이를 위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성공하고 정당하게 돈도 벌어야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선한 일도 많이 해야 합니다. ‘사심이나 탐심이 없는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은 다르니까요.
그러나 저 모든 것의 가치나 이른바 성공한 특정 목회자나 신령하다는 영적 지도자나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 및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고 더 높아질 때, 저 모든 것의 가치나 저 모든 지도자들의 영향력은 오히려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이웃이나 공동체나 사회를 되레 불행으로 인도하는 교만이나 독선이나 미혹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수많은 역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한때 대단했던 ‘신앙촌(박태선)’이나 ‘통일교(문선명)’ 등의 실례도 그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팔거나 짜깁기기 하는 인간 지도자는 있으나 실상인즉 ‘그리스도가 없는’, 잡동사니 지식이나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유식하고 유창한 인간의 신학은 있으나 ‘가장 고상한 지식’은 없는, 그런 신앙이나 종교나 사회는 성공해서 외적 내지 숫자적 부흥이나 물질적 번영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결국이 매양 물보라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성숙한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그 성공이나 그 번영이 되레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때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치나 탐욕이나 색욕이나 높은 이혼율이나 자살률 같은 ‘악한 열매’가 그런 부메랑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 모든 것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배설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rubbish)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8-)
저 ‘배설물’ 곧 헬라어 ‘스퀴발론’은 ‘쓰레기, 찌꺼기, 폐물’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각종 성공이나 각종 소유가 실상인즉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나 폐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그것으로 교만을 부리거나 그것을 선망하며 그것에 목을 매는 사람은 어리석어도 한참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겠지요.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그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이유는 또한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들어봅시다.
-살리는 것은 영(靈)이니 육(肉)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요한복음6:63-64)
그렇습니다.
‘살리는 것은’ 곧 ‘영원히 살리는 것은 영(靈)’입니다.
세상 최고권력인 대통령을 5년 동안 살리는 것은 국민의 ‘표’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긴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을 보고, 내세를 보고, 영원(永遠)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그래서 스스로 “배가 부르다”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별것도 아닌 자기의 정체성 곧 ‘티끌과 재’인 허무한 자기의 분수 내지 한계를 더욱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절대 가치와 그 대속의 피의 심오한 구원의 비밀을 더욱 겸손하게 묵상하며 고민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예레미야 애가2:9-10)
우리도
저렇듯 ‘티끌’을 덮어쓰고
‘굵은 상복’을 허리에 두르고
이 시대의 ‘애가(哀歌)’를 부르면서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영혼과 삶,
우리의 공의와 사랑,
우리의 양심과 윤리도덕,
그 수준이나 그 현주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순절이 될 수 있기를!
자기 자신을 복되게 살릴 수 있고
아울러 이웃과 사회를 복되게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자 능력이자 지혜인,
‘가장 고상한 지식’에 대해
보다 겸손하게 믿어지는 믿음과
보다 성숙하게 알아지는 열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순절이 될 수 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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