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성탄절과 '성령 잉태'의 신비

이형선 2013. 12. 23. 10:33

 

성탄절이 눈앞으로 다가왔군요.

창밖을 바라보며 청년시절에 부르던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낮은 목소리로 다시 불러봅니다.

세월은 갔지만 그래도 정서는 살아나듯,

성탄절 역시 늘 새롭게 돌아오는군요.

 

 

주지하다시피 개신교나 천주교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며 기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희랍정교에서는 1월 6일을,

알미니안 계열의 교회에서는 1월 19일을

성탄절로 지키며 기념합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성탄을 성탄으로 기념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날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리스도의 생년월일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나 구속사를 위해 중요한 것이라면 하나님(聖靈)께서 그것을 사도나 종들에게 명기하도록 계시 및 간섭하셨을 터이니까요.

 

따라서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또 다른 계시이자 말씀일 수 있습니다. 때론 침묵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될 수 있고, 내세나 천국에 관해 성경에 필요 이상으로 문자적인 설명이나 묘사를 해놓지 않은 것이 되레 더 큰 상상이나 소망에의 ‘낙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나 천국이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나 글자로 표현되면 그 한계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니까요.

 

 

‘교회사’에 의하면,

12월 25일은 원래 로마제국이 숭배하던 ‘태양신(미트라)’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었습니다. 서기 274년,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가 시리아에서 행하던 태양신 숭배를 받아들여 로마제국의 국가적 축제일로 선포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태양신’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맞서서 그날에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세상에 오시리라고 누차 예언된 메시아이자 ‘의로운 태양(the sun of righteousness)’(말라기4:2)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 그대로, 그분이 곧 신약의 세상에 오신 진정한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주목해 볼 것은,

고대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12월 25일은 동지(冬至)입니다. 일년 중 밤 내지 어둠이 가장 긴 날인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밤도, 인생이라는 우리 개개인의 밤도 그 어둠 내지 절망이 가장 길고 깊을 때 되레 구원과 소망의 빛 내지 생명의 빛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속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누가복음2:10-12)

 

 

마침내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

성경은 그 분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또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누가복음1:34-35)

 

 

‘남자를 모르는’ 숫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남자의 정액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잉태’라니?

남녀 관계에 의해서 태어나고 그렇게 정욕적으로 길들여진 우리는, 이미 영적 뿌리부터가 타락한 아담 내지 그 부모들의 후예인 우리는, 그래서 칠팔십년 내지 백년 안팎인 육체의 세계 밖에 모릅니다. 암컷수컷이라는 정욕으로 시작해서 정욕으로 끝나는 세계 밖에 모릅니다. ‘떡’의 세계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길들여진 세상 내지 우리의 이성(理性)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의 잉태라는 영성의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빈치코드’ 같은 소설이나 ‘예수의 아내’ 같은 학설 등이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색욕 내지 정욕의 눈으로만 해석하려고 안달복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접근으로 영성의 비밀은 결코 이해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공생애 사역에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맨 처음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4;17)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뿌리부터 뒤집어지지 않으면, 근원적인 방향이나 가치관의 전환이 없으면, 인간 우리는 결코 ‘천국’이라는 영성의 비밀에 열려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회개나 세례의 치열한 의미가 뭡니까?

‘자기’라는 기존의 한 생명이 물에 빠져 아주 죽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죽음 같은 고난이나 고통을 통해 ‘자기’라는 ‘교만’이 아주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고난을 당한 것이 되레 내게 유익이라”는 고백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영성의 비밀에 열려지면, 되레 감사하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잉태’나

‘부활’사건을 명명백백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소설가도 아니고,

상업적인 장사꾼이나 모리배도 아닙니다.

몇 사람의 신비주의자들이나 기인들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말하고,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란 체험적 ‘증인’을 의미합니다. 입맛에 맞는 ‘자기 말’이나 ‘자기 복음’이나 ‘다른 복음’을 말하거나 전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증언하는 ‘증인’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my witnesses)이 되리라.-(사도행전1:8)

 

 

저 ‘증인’ 곧 헬라어 ‘말투스’는 순교적인 내지 희생적인 증인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순교자’ 내지 ‘희생자’를 의미하는 영어 ‘martyr’가 유래 되었으니까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까지, 순교하면서까지,

일생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증언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자,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 앞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잉태’나 ‘부활’이라는 영성의 비밀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너와 나’라는 인격관계에서의

최고의 해석이자 실상이자 소망의 증거입니다.

부부관계에서나 이웃과의 신용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최고의 해석은 “당신을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렇듯 인간처럼 ‘여호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신

‘인격신(人格神)’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최고의 해석이자

소망의 증거이자 공경이자 예배는 곧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그 액션일 수 있는 ‘사랑’은 외면적인 것입니다.

손이나 동전의 양면 같은 그런 일체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창조주 하나님 자체를 ‘전심으로’ 믿고

아울러 사랑하는 중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그 가치를 위해서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이적들 곧 홍해나 요단강을 가르고,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걷고, 각색 병자들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조차 살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까지 풍기는 ‘나사로’조차 말씀 한 마디로 살리는 그런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성령 잉태’나 ‘부활’사건 역시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야한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완성자’라고 평가받는,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성 어거스틴’은

‘성령 잉태’의 신비에 대한 그의 믿음을 이렇게 서술했더군요.

 

 

-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1:14)라고 말씀하신 이 오묘한 말씀을 적절하게 해석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전능하신 성부(聖父)의 독생자를 믿게 할 수 있겠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은 신성(神性)이 육체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우리의 육체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

 

 

그의 인성(人性)은 남녀간의 성적 정욕의 결과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담의 죄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중생(重生)으로 씻어야 할 죄책이 없었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그의 육체를 잉태했을 때에 육체적인 정욕과는 상관이 없었다. (…)

 

 

그의 인성은 우리의 삶의 모형이 되기 위해서 곧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분명한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복된 ‘삶의 모형’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고,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분명한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런 구원의 삶, 그런 구원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 구유’에서 시작됩니다.

지극히 가난하고 낮은 그곳은 ‘겸손’이라는 인간 우리의 심령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마구간 구유는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모실 ‘빈 방’ 역시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영적 탄생은 오직 거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너’나 ‘이웃’이나 ‘사회’를 진정으로 섬기고 진정으로 구원하는 시작의 자리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인생들이자 죄인들인 세상의 ‘너희들’보다 ‘내’가 희생양이 되어 더 낮은 자리(understand), 더 낮은 마음에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하고, 입장을 바꿔놓고 시작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리, 그곳이 바로 ‘마구간 구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는 마구간에서 탄생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도 마구간에서 탄생합니다.

얽히고설킨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모든 구원의 해법도,

남북문제 등 정치적 모든 구원의 해법도 거기서 탄생합니다.

청와대나 여의도나 고급호텔에서 탄생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성전(聖殿)’이나 신앙인들만의 집회 장소인

‘회당(會堂)’에서 탄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비움과 낮춤의 자리’인 ‘마구간’에서 탄생합니다.

이른바 ‘신앙인’이나 ‘불신앙인’을 막론하고,

인생인 우리 모두가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마구간으로

내려가야 할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를 피차 살릴 수 있는 ‘복된 소식’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서 증언되는

심오한 구원의 비밀이자 평화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 하니라.-(누가복음2:13-14)

 

 

한계를 사는 우리 인생에게 13월의 삶은 없습니다.

12월의 달력은 그래서 늘 밤이 긴 동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월은 있고, 새해는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새해가 복된 새해 되고

정월이 복된 정월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내세가 복된 내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극히 높은 곳의 영광’과

‘지극히 낮은 곳의 강림’이 하나로 통한다는

저 ‘마구간 구유’ 저 영성의 비밀에 열려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설의 비밀이 우리의 삶으로

체화(體化)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4:40)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비유의 말씀처럼,

그것이 오늘 우리 몫의 영성의 비밀이자

역설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다가,

속죄양이 되어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마구간 구유도 무덤조차도 다 남의 것이었습니다.

‘내 것이 없는 삶’ 곧 ‘욕심 없는 삶’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성령(聖靈)이 아닌, 세상의 정욕으로 시작해서 탐욕으로 끝나는,

한세상 그것들을 위해 억척을 부리는 우리라고 다를까요?

어차피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 것을!

어차피 한계를 살다가는 우리 인생인 것을!

 

 

너무 늦기 전에,

자기 중심의 아집이나 주관을 버리고,

이기적인 탐심도 비우고,

오직 ‘성령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너’의 묵은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지극히 작은 이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새 복이 있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