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는, '좌우명'

이형선 2017. 5. 15. 11:34



전장에서 칼을 들고 싸우면서도

시를 읊조릴 만큼 문무에 출중했던

난세(亂世)의 간웅(奸雄)’ 조조(曹操).

그에겐 기록에 없는 딸들은 차치하고,

아들이 무려 25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유씨 부인소생이자 장남인 조앙이나 환씨 부인

소생인 조충 등 일찍 죽은 아들들을 제외하면,

변씨 부인(무선왕후)’ 소생인 조비(曹丕)

사실상 장남이 됩니다. 조비 역시 아버지를

닮아 문무를 겸비했다고 합니다.

 


후한시대, 천하를 도모하며 위나라 기틀을 다진 영웅 조조에게도 만년에 레임덕은 오고, 그래서 차기 대권의 문제가 천하의 화두로 등장합니다. 유능한 관리형 인물인 장남 조비냐,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천재시인이자 조비의 동복아우인 조식(曹植)이냐. 위나라 문무백관들은 두 산맥으로 양분되어 줄서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조조는 평소에 조비보다 조비의 아우인 조식을 총애했다고 합니다. 후대 인물인 시성(詩聖) 이백, 두보와 비견될 만큼 뛰어났던 조식의 시문(詩文)을 지레 알아보고 아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나 서열에서 우위에 있던 조비가 마침내 세자로 임명되고, 위나라의 기틀을 다진 조조가 66세를 일기로 죽은 후, 조비가 위니라 공식 초대왕인 문제(文帝)로 등극합니다.

 


아버지 조조가 죽자 성공한 제왕조비는 기다렸다는 듯 세자 자리의 경쟁 상대였고, 자기 아내가 된 견씨 부인과 한때 연인관계이기도 했던 아우 조식을 죽이려고 기회만을 노립니다. 조식도 그런 기미를 알고 형이 두려워 조문하러 궁중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비는 그런 조식을 기어코 궁정에 불러내어 추상같이 명령합니다.

자건, 선친이 살아계실 때부터 너의 시재는 총애의 대상이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어봐라. 시제는 형제로 하되 형제라는 말을 넣어선 안 된다. 일곱 발짝(七步) 걸어가는 동안 짓지 못하면 네가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윽고 조식은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며 시를 읊습니다.

절창으로 알려진 이른바 칠보시(七步詩)’입니다. ‘자두시(煮豆詩)’라고도 알려진 이 시는 삼국지연에 기재된 전문과 세설신어에 기재된 전문이 약간 다릅니다만, ‘삼국지연의 전문인즉 이렇습니다.

 


-콩을 삶으려고 콩대를 태우는데(煮豆燃豆萁)

 콩이 솥 안에서 울고 있다(豆在釜中泣)

 본시 한 뿌리에서 났는데(本是同根生)

 어찌 그리 다급하게 삶아대는가(相煎何太急)- 

 


순간 살기등등하던 콩대조비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그래서 조식을 죽이진 않고 이후 지방 임지 등을 떠돌며 살도록 변방으로 추방시켜버립니다. 조비의 그런 시기심이나 비행 내지 악행은 역시 동복아우이자 조식의 형인 조창에게도 가해집니다. 무술에 출중한 장군 조창이 오환족 토벌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이후 백성들의 칭송이 높아지자 그런 아우를 독살해서 죽여버렸다는 역사의 기록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토록 이기적으로 자기 권좌에 집착했던 성공한 제왕조비도 재위 9년 만에 병들어 죽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습니다. 한을 품은 채 시작(詩作)으로 울분을 토로하며 변방 임지를 떠돌던 조식도 역시 병을 얻어 41세로 죽습니다. 서로 대립, 증오하던 콩대도 다 허무하게 사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 후 위나라 제위는 조비의 아들인 어린 태자 조예에 의해 계승되지만 그러나 '간웅 조조가 세운 위나라 그 '대형의 성공' 자체조차도 조비가 초대 왕으로 등극한 이후 45년 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최근에 저 북한의 '백두혈통'인 김정남도 이국 땅에서 암살을 당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정녕 권력이나 재물은 형제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나눠가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나와서 또 다른 역사의 비전이나 가치관을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slave)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함이니라.-(마태복음20:)

 



한편,

성경 창세기에도,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친형제 간에 일어납니다. ‘콩과 콩대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농사하는 자인 카인과 양치는 자인 아벨에 관한 기록이 그것입니다. 농부인 형 카인과 목자인 아우 아벨은 각각 그들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세기4:)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저 가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 우리 모두의 타성(惰性) 곧 시기심이나 질투심 그 진면목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나 세상 아버지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지 못한 탕자(蕩子)’인 인간 우리의 빗나간 성정이자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콩대가인은 결국 인 아벨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세기4:8)

 


내가 드린 제물이나 정성이나 노력이 하나님은 물론이고 이웃 내지 상대방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먼저 겸손하게 회개하며 그럴만한 이유를 자기중심, 자기 부덕에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그 정성 그 진심 여부를 훤히 통찰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러나 저 가인은 먼저 시기나 질투심이나 미움 같은 즉흥적인 감정, 악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한일서3:15)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움이나 증오 그 타성 자체가 바로 대립적, 가학적 심령의 동기 및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가인의 심령 중심에 악한 영(惡靈)’이 주인으로 들어앉아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닙니다. 악은 늘 더 큰 악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아우 아벨을 죽이기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완악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keeper)니이까?-(창세기4:9)

 


실로 충격적인 대답이자 거짓말이자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형제를, 부모를, 이웃을, 국민을, 국가를 지키는 자니이이까?’ 지금 우리의 속사람곧 양심 수준이나 심령의 상태는 어느 정도일까요? 어떤 거짓말이나 무책임한 말이나 책임회피를 스스럼이나 죄의식도 없이 예사로, 뻔뻔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심령이 타락해 있는 것일까요?

그런 아담이나 가인, 그리고 그 후예는 그래서 죄다 불행했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세기4:11~1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wanderer)’가 되리라는 말씀은 곧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담과 가인의 후예인 그래서 이미 타락한 죄인의 성정과 정체성을 가진 인생 우리 모두는 실인즉 죄와 저주와 수고와 죽음의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허무한 인생여정의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런 저주라는 액운이나 불운이나 불행 그 운명적인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기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것을 절감한 사람들은, 인간 자기의 태생적으로 타락한 죄악성이나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저 모든 저주라는 액운이나 불운이나 타성이나 정체성을 통감한 사람들은 신학자 칼 바르트의 표현처럼 이렇게 거룩한 탄식(Holy Sadness)’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

 


내가 곤고한, 비참한, 사망의 몸이란 걸 철저하게 인식했으면 응당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순리이고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는 없는 일. 해서 인간 자기에게 철저하게 절망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메시아 대망사상그리스도 대망사상을 추구 및 희구하기 마련입니다. 태생적인 죄악성이나 거기서부터 오는 모든 저주라는 액운이나 불운이나 타락한 성정이나 정체성 등으로부터 거듭나는참 구원과 참 자유의 길, 구도의 길은 그래서 내 인생 절대명제이자 선결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8:1)

 


사망의 몸에서 를 살리는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영원한 구원과 해방의 길이 메시아희생양이 되어 나와 내 조상의 모든 죄악을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대신죽음으로 그 모든 죄악을 대속(代贖)’하신 후, 또한 하나님의 그 대속이 초월적 하나님의 대속이 되도록 부활을 통해 밝히 증명 및 증언하신 후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온전히 이루어지고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정이 타락한 인간 자기의 태생적 한계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진실로 거듭난 모든 신앙위인들은 하나 같이, 자기 혈육은 물론이고 지극히 작은 이웃을 포함한 인간 모두가 공생공존(共生共存)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창조주 하나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난형제라는 큰 믿음, 큰마음에 열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섬김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성 어거스틴, 성 프랜치스코, 마더 테레사, ‘나환자들의 아버지손양원 목사, ‘조선의 마더 테레사서서평(E. J. Shepping) 선교사등의 삶이 죄다 그랬던 것처럼!

 


번영신학이나 성공신학의 시대적 거센 사조 아래 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CGN TV’온누리교회에 의해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가 심층 탐사 및 영화화 되면서 비로소 신앙의 귀감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뒤늦게나마 한국기독교신앙풍토의 올바른 지향을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저는 고향인 광주에서 살던 청년시절, 수필가인 고() 백춘성 장로님의 부탁을 받고 그분의 저서이자 최초의 선교사 서서평 일대기천국에서 만납시다, 그 원고의 교정을 봤던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불운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이후 32세에 자원해서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로 조선에 옵니다. 이후 전라도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당시 굶주리고 무지한 여성들, 고아, 과부, 걸인, 나환자나 각색 병자 등 지극히 작은 자들을 자기 몸보다 되레 더 정성껏 섬기며 구제와 교육에 헌신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54세이던 1934년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광주의 어머니이자 작은 예수입니다. 장례식은 시민들의 오열 속에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렇게 가신 서서평 선교사가 그녀의 작은 방에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성경과 반쪽은 남에게 나눠주었기에 반쪽만 덮고 자던 담요 한 장, 동전 7, 강냉이 두 홉, 그리고 낡은 책상 위에 기재된 그녀의 평소 좌우명인 이 한마디였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오늘 우리는 누구를, 어떤 삶을 본받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진면목의 삶은 과연 직업적인 제사장이나 사무적인 레위인이 되어 세상에서 성공한 그 자체나 그 수치나 그 대형이나 그 유명 여부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학문적 혹은 추상적 케리그마나 도그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섬김의 삶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런 인격 곧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인격이 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비움과 낮춤과 섬김과 헌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간 사도 바울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참 구원과 참 복으로 인도하는 체화(體化)된 케리그마를 감히 이렇게 증언 및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