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태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던 윤회(尹淮).
그가 가난했던 젊은 시절
한양에서 낙향하던 어느 날,
날이 저물자 그는 낯선 부잣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합니다.
주인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윤회는 뜰아래 주저앉아서라도 밤을 지새우고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부자의 어린 아들이 마당에서 진주를 가지고 놀다가 그것을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냉큼 삼켜버리고 맙니다. 거위는 그것이 맛있는 먹거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아들은 두리번거리며 진주를 찾다가 초라한 행색의 윤회와 눈이 마주 치자 곧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어 주인이 뛰어나오더니 다짜고짜 윤회를 도적으로 간주, 온몸을 뒤집니다. 그래도 ‘내 진주, 내 보화’가 나오지 않자 부자는 하인을 시켜 윤회를 결박합니다. 내일 아침에 관아에 넘기겠다고 을러대면서.
억울한 곤욕을 치르면서도 윤회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 가지 간청을 합니다.
“저 거위의 발을 묶어 내 곁에 놓아주십시오.”
주인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청이기에 부탁한대로 해줍니다.
이튿날, 물론 거위의 배설물에서 진주는 발견됩니다.
황당한 주인, 크게 사죄하며 어제 침묵했던 연유를 묻습니다.
윤회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어제 말씀드렸다면, 진주를 찾기 위해 거위는 배가 갈려 죽었을 것 아닙니까. 가엾은 거위를 죽이느니, 잠시 제가 곤욕을 당하는 것이 낫지요.”
과연 윤회는 ‘병조판서’감이
되는 선비이자 인물이다 싶습니다.
물론 저 일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입니다만,
우리는 저기서 세 부류의 인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싶습니다.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비싸고 화려한 진주나 보석이라면 닥치는 대로 자기 뱃속에 집어삼키는 ‘거위’ 같은 인간형.
하룻밤 묵고 가기를 원하는 가난한 나그네 내지 이웃의 간청은 냉정하게 거절하면서도, ‘내 아들, 내 보석’ 사랑하는 데는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집착하는 ‘부자’ 같은 인간형.
그리고 지극히 작은 ‘거위’의 생명조차도 소중히 여기며 살리고자, 바보처럼 억울한 오해와 곤욕과 수모를 묵묵히 감내하는 ‘윤회’ 같은 인간형.
우리는 저 세 부류의 인간형 중에서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까요?
우리는 분별력이 없는 ‘거위’처럼 자기에게 실인즉 필요 없는 혹은 필요 이상의 보석이나 재물을 닥치는 대로 주워 먹어대는 인간형은 아닐까요? 허영이나 사치나 탐욕이나 주색이나 노름 등을 마구 주워 먹어대다가 가족이나 이웃이나 ‘의인 윤회’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수치와 곤욕 등의 피해를 안겨주는 사람은 혹여 아닐까요?
우리는 또한 ‘진주’를 찾기 위해 ‘마음’을 잃어버린 저 부자의 모습에서 이해타산에 빠른 현대인의 초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를 사는 ‘유식한 현대인’이라는 우리 모두가 ‘내 것, 내 진주’라고 선포하며 집착하는 그것은 실인즉 참 ‘내 것’도 아니고 참 ‘내 진주’도 아닙니다.
부자도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일개 나그네 인생인데 그것이 영원한 그의 소유나 보화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물론 ‘내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겠지만 그렇게 이기적인 마음이나 탐욕적인 마음으로 물려주는 ‘내 것, 내 진주’라면 훗날 자식들 간의 관계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되레 반목이나 재앙을 자초하는 그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건전한 마음’이나 ‘온전한 마음’을 잃어버리게 하는 ‘진주’이자 재물이자 소유라면 그 모든 것은 이미 ‘우상’이 되어있는 상태이니까요. 이스라엘 출애굽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우상’ 곧 ‘금송아지(The Golden Calf)’이자 ‘금 신(Gods of Gold)’이 되어버린 재물이나 소유는 많은 생명을 재앙과 죽음으로 인도합니다.(*출애굽기32:)
따라서 ‘내 진주’를 찾기 위해, ‘내 돈’을 찾기 위해, 일방적으로 혹은 함부로 이웃의 인격을 훼손하거나 침해하거나 살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내 진주, 내 돈’이 ’우상‘이 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보다 더 커지고 더 높은 자리에 좌정한 상태이자 수전노(守錢奴)처럼 그것의 노예가 된 상태의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회는 양극화(兩極化)의 골이 깊어 피차 불안하고 피차 불행합니다. 그래서 자살자도 많고 피살자도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럼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누구나 피차 부요하게 피차 공평하게 소유할 수 있고, 죽은 후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참 ‘내 진주, 내 보화’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천국(天國)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태복음13:44~45)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산 저 ‘천국(天國)’이라는 존재개념이자 가치개념을 또한 ‘극히 값진 진주’라는 소유개념으로 언급하셨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소유’를 다 팔아 영원한 ‘천국의 소유’를 산 것일 뿐입니다. 보다 긴 안목으로 살기 위한, 영원한 가치와 영원한 생명의 차원에서 살기 위한 인생 지고의 선택이자 빅딜(Big Deal)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해서
결코 현세의 소유를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손해 본다고 해서, 자존심이 뭉개진다고 해서, 바보처럼 억울하게 곤욕을 당한다고 해서, 봉사하며 세월을 보낸다고 해서, 심지어 희생 내지 순교한다고 해서, 자기나 자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크고 영원한 ‘행복’을, ‘생명’을, ‘진주’를 현세(現世)에서부터 얻습니다. 그것이 ‘영(靈)이신 하나님’의 비밀이자 그 나라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영성(靈性)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who has left)는
현세(現世)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永生)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10:29~30)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십계명’ 중 제5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20:12)
또한 성경은 분명히 자기 자녀나 형제 등
“가족을 돌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5:8)
그런데도 부모나 자식을 ‘버리라’니?
너무 불효(不孝)적이고 반인륜적인, 비정한 말씀 아닌가?
저 ‘버린 자’에서 ‘버리다’ 곧 헬라어 ‘앞히에미’는 ‘버리다, 떠나다, 용서하다, 용납하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곧 ‘천국을 위하여’ 자기혈육중심의 삶이나 ‘전토’ 같은 물질적 소유 중심의 삶에서 ‘떠난 자’를 의미하는데, 무책임하거나 비정한 버림이나 떠남이 아니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떠남이자 버림을 의미합니다. 말을 바꾸자면, 헌신적이자 대의적(大義的)인 가치를 위한 선택이자 그것을 위한 떠남이자 버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 교수는 저 말씀을 그의 ‘메시지 신약’에 이렇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명심하여라. 나와 메시지 때문에 집과 형제자매와 부모와 자식과
땅과 그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 손해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모두를 받되,
여러 배로 돌려받을 것이다. 다만 어려움도 함께 받을 것이다!”-
과연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 그 말씀을 소유한 곧 천국을 소유한 ‘나환자들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은 나환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인 그 모두였고, 심지어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조차도 용서 및 포용하고 친아들로 입적까지 시켰습니다.
과연 그래서 ‘인도의 마더 테레사’나 ‘조선의 마더 테레사, 서서평 선교사’의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 역시 수천수만의 ‘작은 자들’ 그 모두였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평범한 인생들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 바울처럼 살지는 못하고, 근대사의 저 순교자 손양원 목사나 마더 테레사나 서서평 선교사처럼 전적 헌신의 삶을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나 우리가 저 이타적 신앙위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하나라도 더, 본받으며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저나 우리의 심령(心靈) 자체가 더 커지고 더 선해지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더 행복해질 수 있고, 나아가 보다 ‘하늘나라의 복’이 있는 서로 행복한 공존의 사회가 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너희 안에 있는 천국’,
우리는 과연 저 ‘영원한 천국’을, 저 ‘진주’ 저 ‘보화’를 지금 우리의 심령 안에 소유하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너무 자기중심적인, 재물이나 출세나 권력에 대한 탐욕이나 정욕 등은 아닐까요? 세상적 혹은 ‘구약(舊約)의 솔로몬’적 부귀영화나 출세에 대한 욕망이나 갈망 등은 아닐까요?
물론 너나없이 세상 부귀영화 싫어할 사람은 없고 그래서 무속을 포함한 여타 모든 종교의 기복신앙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참 진주’의 가치를 가치로 알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라면 ‘거룩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 결국에 대한 솔로몬의 ‘허사가(虛事歌)’를 또한, 미리,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1:)
며칠 전,
뉴스를 통해 재판받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영상을 보면서 저 말씀이 다시금 절실하게 떠오르더군요. 저 박 전 대통령의 회한의 통곡일 수 있는 침묵 속엔 어떤 모놀로그가 담겨 있을까요? 어떤 ‘허사가’가 담겨 있을까요? 과연 ‘천하를 다 얻어도’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것이 ‘참 진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명심할 것은, 재판받는 저 안타까운 모습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내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그것일 것입니다. 겸손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참 진주인 ‘천국’은 과연 빈부귀천이나 무식유식을 막론하고 ‘가난한 심령’ 곧 ‘겸손한 심령’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영원한 ‘보화’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심령의 부자’가 실인즉 현재적이자 종말적으로 ‘행복한 자’이자 금세적이자 내세적으로 ‘행복한 자’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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