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운명론'과 '새로운 피조물' 사이

이형선 2017. 6. 5. 10:51



제나라 명재상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지혜의 사람 맹상군(孟嘗君).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질 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타고난 사주(四柱)나 팔자(八字)라는

운명론에 의해서 말입니다.

 


맹상군의 아버지 전영은 제나라 위왕의 차남으로 재상이 되어 세 왕이나 섬겼고, 재물도 억만금이나 모은 사람입니다. 첩들도 많아서 아들이 무려 40여명. 게다가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첩이 아들을 또 한 명 낳습니다. 55일생.

사주(四柱)’에 대한 국어사전해설 그대로, ‘사람이 태어난 연시의 네 간지(干支)’에 의하면 당시 맹상군의 그것은 장차 부모를 죽이는 사주이자 팔자였다고 합니다. 해서 전영은 다짜고짜 산모에게 명령합니다.

아기를 내다 버려라!”

 


서양에도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호메로스 서사시에 에 나오는 오이디푸스가 그런 경우인데,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그 아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神託)을 듣습니다. 해서 왕 라이오스는 왕비가 낳은 아들 오이디푸스의 두 발목을 한데 못질해서 키타이론 산에 내다버립니다.

 


그러나 아기는 한 목동에게 발견되어 살아나고, 코린트의 왕 폴리보스의 양자가 됩니다. 이후 청년이 되어 자기 과거를 전혀 모르는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던 여행길에서 만난 라이오스 왕이 먼저 싸움을 걸어오자 아버지인줄도 모른 채 라이오스 왕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나아가 오이디푸스는 테베 백성들을 미혹과 혼란에 빠뜨려 괴롭히다가 죽이기를 일삼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그러자 스핑크스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생모인줄도 모른 채 미망인이 된 테베의 왕비와 결혼해서 4명의 자녀까지 낳게 됩니다.

훗날 오이디푸스의 과거를 알게 된 왕비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맹인이 된 후 비운의 땅이자 비극의 나라인 테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딸과 함께 그 땅을 떠납니다.

 


저 라이로스 왕이 미신적 신탁(神託)일 수 있는 운명론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래서 어린 아들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리지 않았다면 외려 저런 가족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싶습니다. 그럴 것이 동양의 맹상군은 다행스럽게도 서양의 저 오이디푸스와는 달리 내다버림을 당하진 않았으니까요. 어미가 몰래 이라는 이름으로 숨겨서 키운 것입니다. 아이가 성장한 후에야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전영은 노발대발합니다.

왜 버리지 않고 키웠느냐!”

 


어미는 죽을죄를 지은 양 아무런 말도 못합니다.

대신 아들 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묻습니다.

“55일에 태어난 아이니까 키우지 말라고 하신 까닭이 무엇인지요?”

잠시 침묵하던 전영이 이윽고 입을 엽니다.

“55일에 태어난 아이는 그 키가 문 높이만큼 자라면 그 부모를 죽인다고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사주팔자이자 운명론이자 속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친의 묘소를 명당(明堂)’에 모시거나 그곳으로 이장해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속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선친 묘소는 TV뉴스에 나온 영상 그대로 평범한 그리고 평등한 공원묘지이자 공동묘지에 있던데, 그런 풍수 지리적 속설도 다 맹랑한 것이다 싶더군요.

 


각설하고, 아이 문이 감히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죽고 사는)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서 받는 것인가요, 문 높이에서 받는 것인가요?”

말문이 딱 막힌 아버지 전영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받는천명(天命)이라면 사람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아들 문이 말을 잇습니다.

운명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아버지께서 전혀 걱정하실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리고 운명이 문 높이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문 높이를 높이 올려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누구의 키가 그 높이만큼 커질 수 있겠습니까?”

 


일대 발상의 전환입니다.

사고방식이나 의식이나 가치관의 혁명적 전환입니다.

아이의 큰 지혜에 큰 도전을 받은 전영은 내심 부끄럽다 싶었는지 이내 모자를 용서해주고, 그 일을 계기로 그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마침내 집안 후계자로 세웁니다. 맹상군은 훗날 부모를 죽인 일도 물론 없었고, 그동안 모으기만 했던 집안의 재산 억만금을 풀어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차별 없이 먹이며 나라와 가문을 되레 빛나게 살립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10:)

 


진실로 그렇습니다.

참새 두 마리, 많은 참새보다 귀한인생 우리도, 죽고 사는그 운명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사람은 물론이고 참새 한 마리조차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걱정하며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뜻대로 죽고 싶다고 해서 죽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일 제가 죽어야한다면 그것조차도 감사하며 죽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1:), 그렇게 혁명적인 신앙고백을 했던 사도 바울처럼 돌아갈 하늘의 본향이 있는 자는 감사하며, 기뻐하며, 죽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운명론이나 그것을 팔아 장사하는 모리배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법리도 거기 있습니다. 두려워할 분은 오직 운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10:28)

 


아울러 우리가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할분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자 질서의 하나님은 친히 창조하신 세상의 역사에도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때가 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니까 응당 두려워해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모성애적 사랑의 하나님이자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이시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에게도 인격적 표현을 빌리자면 정의(正義)로 대변되는 부성애(父性愛)와 사랑(*아가페)으로 대변되는 모성애(母性愛), 그 야누스적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의 선한 왕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그래서 대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삶을 정리하라는 임종선고까지 받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모성애적 은혜와 긍휼을 믿고 의지한 채, 낯을 벽으로 향한 채기도를 드립니다. 눈물의 기도이자 전심의 간구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런 은혜의 응답을 주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 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열왕기하20:)

 


눈물의 기도’, 그 진솔한 회개의 기도, 그 비밀한 능력에 힘입어 히스기야 왕은 일신의 병에서 구원을 받아 15년을 더 살게 되었고, 아울러 덤으로(?) 예루살렘성과 나라까지 앗수르 제국의 침략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의 운명도 변화되고, 국가의 운명도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정해진 운명조차도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영성(靈性)의 비밀()이신 하나님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에 열리면, 그래서 믿고 간절히 구하고 찾고 기도하면 타고난 운명조차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시절 관상이나 사주팔자의 대가라는 어떤 사람에게 들었던 이런 내용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관상이나 사주팔자에 의하면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해 이미 죽었을 사람인데 아직 정정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하나님을 잘 믿거나 종교적 신앙심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코멘트일 수 있지만, 저는 나름대로 성경을 깊이 공부해보면서, 영성의 비밀에 열려지면서, 저 말이 옳은 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운명이나 운명론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개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 세리 마태, 창녀 막달라 마리아, 나환자 및 각색 병자, 맹인 거지 및 각양 장애인 등 성경 속의 인물들이나 이후 교회사 속의 인물들은 다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운명이 혁명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무식한 어부였다가 사도이자 수제자가 된 베드로 역시, 구하고 찾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times of refreshing)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3;19)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쪽일까요?

여전히 운명이나 운명론에 잡혀 살고 있는, 태생적 육신 중심의 삶?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원죄와 자기범죄의 사면(赦免)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롭게 된 날을 살고 있는, 거듭난 영성 중심의 삶?



혈통적 우리 모두의 대표적 조상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대대로 이어지는 불행한 운명론을 자초한 사람입니다. 그 전철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왕이나 대통령이 되고, 영웅이나 스타로 성공해도 결국은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그 결국이 죄다 허무한 죽음이자 불행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얽힌 인생 및 세상 범사 그 운명론적 우여곡절이나 파란곡절을 넉넉히 이기는 부활승천의 생명’,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하늘의 복된 지혜와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