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후기실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그는 22세에 성균관에 나가면서 정조로부터 그 학문과 재능을 크게 인정받으며 이후 십여 년 동안 여러 벼슬을 합니다. 그의 실학사상을 현실정치에 반영, 천주교 등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등 개방과 개혁을 통해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고자(新我之舊邦)’ 진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의 탕평책이 힘을 잃고 세도정치가 다시 득세하면서 남인이자 실학파이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천주교도였던 그는 순조1년 곧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 그 천주교도 박해사건이자 정치적 격랑에 휩쓸려 귀양을 갑니다.
40세부터 57세까지 무려 18년간에 걸친 유배생활. 그 대부분을 전라도 강진에서 보냈던 그는 좌절과 절망으로 점철되기 쉬운 유배지에서 오히려 그의 학문 ‘다산학’을 완성합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사상을 펼쳐보지 못하고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칩니다만, 여하간 그가 쓴 가장 긴 한문 서사시이자 대표작의 하나로 ‘맹인에게 시집 간 여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저술한 것으로 사료되는데 그 대략인즉 이렇습니다.
탐욕스런 친정아버지에 의해 돈에 팔려 ‘열여덟 나이에’ 부잣집으로 시집간 가난한 ‘강진 여자’의 신랑은 ‘七七四十九’인 49살의 ‘맹인’이자 두 번이나 결혼해서 전처들에게 얻은 두 딸과 아들 하나가 딸린, ‘성질까지 고약한 자’입니다. 작은딸의 나이가 스물 셋이니 그런 전처소생들의 모함과 냉대 속에서 그 시집살이가 오죽했을까!
남편조차 모진 학대를 일삼습니다. 돈 없고 힘없는 그래서 유린당하는 민초들의 가엾은 모습 그 형상화일 수 있겠지요. ‘강진 여자’는 마침내 그 ‘운명의 굴레’를 감히 거부하고 지옥 같은 시집에서 탈출, 머리를 빡빡 깎고 중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운명의 굴레가 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엔 관가에 붙잡혀가서, ‘고을 원님’의 판결에 의해 다시 시집으로 보내지는 신세가 된 것. 그러니까 희구하던 자유인의 신세가 아닌, 세상 육신의 아비에 의해 돈에 팔렸던 종의 신세이자 ‘맹인의 아내’로 다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9:40`41)
그렇습니다.
인간 우리는 태생적으로 ‘영(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곧 소통 및 대화 등의 인격관계가 단절된, 타락한 ‘죄인’이자 ‘영적 맹인’들입니다. 또한 그런 세상이자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여전히 영적 맹인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잘 보고 잘 믿는 ‘세상의 선민(選民)’이라고 자부하며 외식과 교만에 빠진 ‘바리새인들’. 그러나 저들의 중심은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과는 달리 ‘돈을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의인(義人)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자기들보다 못 배운 가난한 사람들이나 죄인들을 차별하며 멸시 천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신적 맹인‘보다 되레 더 위선적인 맹인이자 사악한 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는‘ 역설의 죄인들. 스스로 유식하다는 자기에게 속고 사는 독선(獨善)의 죄인들.
저 ’강진 여자‘의 남편 곧 심령 내지 ’성질까지 고약해서‘ 아내조차 돈 주고 산 일개 종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며 멸시 천대하는 ‘육신의 맹인’이나 ‘영적 맹인’인 저 바리새인들이나 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싶습니다. 자기나 아내나 작은 이웃이나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에 어두운 ’맹인들‘이다 싶으니까요.
되레 바리새인이 더 나쁠 수 있는 것은, 저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잘 알고 잘 믿는다는 ’영적 교만‘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적 교만에 빠지면 육신적 타락이나 세상 소유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보다 회개하기가 되레 더 어려운 법이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저런 부류의 사람, 저런 ‘신랑’과 혼인하면 고생길이 훤합니다. 그 신세가 기구합니다. 그런 세상, 그런 집안, 그런 시댁을 탈출해서 절에 들어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된다거나 심산유곡이나 무인고도로 현실 도피적 은둔을 한다고 해서 ‘운명의 굴레’나 ‘운명의 멍에’가 풀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예루살렘’이나 ‘메카’를 포함해서, 하늘 아래 ‘기구(崎嶇)한 세상’ 아닌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예레미야 애가1:14, 17)
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는 물론 개인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타락의 한계를 넘어선 ‘선민 남(南)왕국 유다’를 역사적 내지 현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 그 도구이자 몽둥이로 들어 쓰신 바벨론제국을 지칭합니다. 분단되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제국에게 이미 망했고, 남왕국 유다조차 저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哀歌)’ 그대로 바벨론제국에게 처참하게 짓밟혀 70년 포로생활이자 종살이 신세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 ‘강진 여자’의 종살이나 우리조선민족의 일제강점기치하 종살이와 다를 바 없다 싶습니다.
개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막론하고, 저 불행한 운명의 굴레나 멍에를
벗을 수 있는 참 구원의 길은 어디 있을까요? 참 자유의 길은 어디 있을까요?
허무한 세상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인간 자기의 비참한 정체성을 절감하고 치열하게 통곡해본 적이 있습니까? 오열하며 차라리 절망적인 ‘애가’를 읊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과연 또 다른 기회일 수 있습니다. ‘보는 눈, 들을 귀’는 되레 거기서 열리니까요. 세상에 오신 ‘왕 중 왕’이자 ‘신랑 중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11:28~30)
물론 스스로 배부른 ‘포스트모더니즘’을 찬양 및 추종하고, 사람의 지능지수(IQ)를 능가하는 ‘인공지능(AI)’이 위세를 떨치는 21세기의 사조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절대성이나 유일성을 쉽게 거부합니다. 다양성이나 상대성의 논리나 목소리가 더 유식하고 더 대범하고 더 고상하게 들려지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의 길이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산길처럼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를 뿐 다 정상에서 하나로 만난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이자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논리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참 구원의 단비는 ‘산’이나 그 정상에서 내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립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또한 ‘산은 산이고 하늘은 하늘’이라는 것. 따라서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사닥다리(창세기28:12)’, 그 ‘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靈性)이나 영성지수(Spiritual Quotient)는 인본주의 차원의 문제가 분명 아닙니다. 유명 목사나 해박한 신학자조차도 ‘내로라’하는 인본주의 목소리가 더 커지면 커진 그만큼 그것은 이미 하늘의 영성이 아닙니다. 성령의 지혜도, 복음의 능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남다른 언변도 지식도 지혜도 구사할 수 있고, 대형기업도 경영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한편,
신약성경에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닌’(요한복음4:18),
역시 운명이 기구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른바 ‘우물가의 여인’의 경우입니다.
그녀는 우물가에서 이웃은 물론이고 동네사람들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고 부끄러워 일부러 인적이 전혀 없는 시간에 나와 물을 길러가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녀는 의외로 “물을 좀 달라”며 먼저 말을 건네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대 일로, 체험적이자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혼혈 잡탕의 대명사인 저 ‘더러운 사마리아 여인’의 세상 남편 ‘여섯’은 각각 누구였을까요? 부자? 권력자? 지식인? 연예계 스타? 죄다 ‘영적 맹인들’이었겠지요. 오늘의 다원주의적 논리로 비약을 시켜보자면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다른 종교나 철학을 운위하며 비하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이타적인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승천이라는 ‘대속의 사닥다리’에 대한 증언이나 증명이 없는 종교나 신앙은 그 교주가 인간인 저보다 더 나은 그래서 존경해야 할 ‘큰 산’이자 ‘성현군자’일 수는 있어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인간의 비극적인 숙명 그 멍에나 굴레를 푸는 참 구원자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모로 ‘미약한’ 저는 그래서 되레 감히 그렇게 단언하는 사림입니다. 지식인이나 고결한 수행자에게만 ‘구원의 단비’가 내리는 그런 길, 그렇게 편협한 하나님의 세계나 길이라면 저처럼 미약한 사람들은 따라갈 수도 없고 그래서 구원도 소망도 없다 싶으니까요. 하나님은 ‘비’나 ‘햇빛’이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등 그 사랑 그 은혜를 죄인과 은혜를 모르는 자를 포함한 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리는, ‘온전하신’ 분이자 ‘자비로운’ 존재이시니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요한복음4:13~15)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주는 물’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구원의 말씀’을 직접 마시고 직접 맛본 ‘사마리아 여인’은 그때 그 자리에서 세상 ‘물동이’ 그 소유 중심이던 삶의 가치관이 확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저 ‘강진 여인’처럼 관가에 붙잡혀가서 ‘고을 원님’에 의해 다시 ‘지옥 같은’ 시집으로 보내지는 신세가 되지는 않습니다. 일용할 ‘물동이조차 버려두고’ 동네사람들에게 달려가 감히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자 ‘심령의 생수’를 증언하는 ‘사명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탕녀’ 혹은 ‘탕자’ 인생이 ‘참 메시아’인 ‘참 신랑’을 만나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이자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천국의 사람’이자 ‘자유의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한복음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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