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평범하고
보기 좋은 알로 머물 수 없습니다.
부화하든지 썩든지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할까요?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다른 목적-교육, 건축, 선교, 예배-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국가에 여러 목적-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등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국가의 목적은 어떤 점에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국가는 단지 국민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범한
행복을 보호하며 증진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C. S. 루이스(Lewis)-
그렇습니다.
영국의 저 영성학자이자 작가인 루이스 교수의 표현처럼,
우리는 하나의 ‘알과 같습니다.’ 따라서 알의 세계에서만 머물러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알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 계속 안주하면 썩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것이냐, 썩을 것이냐, 그것이 과연 인생의 절대 문제이자 숙제입니다. 덩달아 저도 청년시절에 애독했던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성장소설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데미안⌋에 나오는 명구가 다시 떠오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이다.-
‘데미안’은 소설 중에 나오는 표현대로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여정’이다, 그것을 추구하는 작품입니다. ‘참 나’, ‘참 자기’를 찾아가는 성장소설이자 구도(求道)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순진한 가정적 규범이나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주인공 싱클레어는 자기를 성장 내지 성숙으로 인도했던 지혜나 깨달음이나 영향력의 의인화(擬人化)일 수도 있는 ‘친구 데미안’을 만나, 기존의 규범이나 가치관과는 또 다른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럴 것이 데미안은 선한 ‘아벨’을 죽인 악한 ‘카인이 영웅’이고,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현장에서 예수를 저주한 도둑이 되레 영웅이라는 식의, 기존의 규범이나 고정관념과는 다른 역설이자 현실적 논리를 개진하기도 하니까요.
실인즉 누구나 다 ‘사춘기’가 되면 어른들의 세계나 세상적 가치나 논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때론 혼란을 느끼며 고뇌하고 때론 회의하며 성장통(成長痛)을 앓기 시작합니다. 자의식(自意識)이나 비판적 사고력에 눈이 열리면서 자기 속의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나아가 현실적으로 악한 자이지만 힘 있는 ‘카인’ 유형의 인간이나 부자나 권력자들 또한 그런 국가들이 득세하고 유세하는 세상이다 싶은 가치관과 직면 혹은 충돌하기 마련이니까요.
‘히틀러’나 ‘나치스’가 그 형제이자 아우인 아벨을 죽인 카인처럼 ‘영웅’으로 미화되는 전체주의국가에서 성장해야했던 저들의 자의식이나 고뇌는 그래서 더 고통스럽고 절실한 것일 수 있었겠지요. 아무튼 현실세계에 조숙한 ‘데미안’은 히틀러가 일으킨 일차대전 그 전쟁에 조국을 위해 참전하고, 이후 싱클레어 역시 참전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거기서 진정한 평화를 얻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합니다. 진정한 보람이나 안식 속에서 만나지도 못합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알게 해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였던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부상당한 몸으로, 서로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야전병원’이었습니다. 그것이 ‘데미안’에 나타난 철학적 내지 인본주의적 휴머니즘의 종착지일 수도 있습니다. 병원은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심신(心身)이 병들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하긴 하늘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대형병원이자 대형교도소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만.
어떻든 그러면 그럴수록 누구의 품안에서 부화하느냐, 거듭나느냐, 그것이 절대명제이자 선결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싱클레어를 다시 태어나게 한 그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이나 싱클레어의 이상적 여인상인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은 곧 싱클레어 내지 작가 헤르만 헤세의 성장기에 큰 영향력이나 큰 깨달음을 주었던 인본주의적 지혜나 진리나 사상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의 인격적 표상이자 의인화(擬人化)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에바부인’에 대한 싱클레어의 구도자적 묘사를 다시 살펴봅시다.
-나는 지금 당장 죽더라도 그 여인을 알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 가까이에서 숨 쉴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길이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할 수도 없는 처지이면서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가 많았다. 그녀도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이 저술한 구약성경 ⌈아가(雅歌)⌋에 자주
나오는 묘사 같다 싶기도 한 저런 의인화 곧 지혜나
추상적 개념을 여성화 내지 인격화시키는 문학적 표현은
역시 구약성경 ‘잠언’에도 자주 나타나는 어법입니다.
솔로몬은 저 ‘지혜’나 ‘말씀’ 자체를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
내가 그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언8:)
저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곧 히브리어 ‘니사크티’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참 지혜이자 말씀이자 정의이자 절대선 그 자체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격인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등의 이중성인 가진 아프락사스 같은 그런 신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저도 청년시절엔 ‘데미안’의 저런 지적이고 자력적(自力的)인 성찰 및 성장의 세계가 좋았고 그래서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더 살아본 지금, 데미안이나 싱클레어가 마지막 만난 곳이 ‘야전병원’인 것처럼 내 인생의 ‘데미안’과 내가 마지막 만날 곳이 ‘허무한 초상집’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의 저 문학적 내지 헬레니즘적 지혜의 명구는 다시 성경적 내지 신학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번,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알’이 ‘새’로 거듭나고 그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헤르만 헤세도 인간 이성(理性) 이상의 세계이자 차원인 신학적 혹은 신비적 혹은 초월적 해법을 부인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아프락사스’에 대한 학설이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신성과 악마성을 동시에 가진 신’이라는 이해가 보편적입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등 이중성을 가진 신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가 앞뒤로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전쟁과 평화의 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런 그리스‧로마신화나 이집트신화 등은 다 인본주의 지혜(*헬레니즘)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성경을 통해 인생들에게 친히 계시(啓示)하시고 그 계시를 증언 및 증명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인 신본주의 지혜(*헤브라이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 싱클레어나 저 데미안이나 저를 막론하고 인간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이자 두 얼굴을 가진 자기 정체성에 눈을 뜨면서, 그 해법을 인본주의적 산물의 신들(gods)이나 그런 신성이나 종교성의 이성적 이해에서 찾고자한다는 데 있습니다. 단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부인 프로이드나 칼 융의 이해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헤세도 심리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했으니까, 칼 융의 종교심리학이 ‘데미안’의 캐릭터에 주요역할을 했으리라 사료됩니다. 여하간 그런 ‘그리스‧로마신화’ 유형의 인본주의적 신들에의 지향이자 종교심리학적 성향은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 일어나 걷게 하자)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gods)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사도행전14:)
나아가 저들은 바울과 바나바 ‘두 신들’ 앞에
‘소와 화환들’을 제물로 가지고 와서 ‘제사’까지 드리려합니다.
죽은 사람도 아닌 산 사람을 신화(神化), 신격화시킨 것입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사도행전14:14~15)
저 루이스 교수나 헤르만 헤세의 언급처럼
우리는 과연 ‘알(卵)’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부화하든지 썩든지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적 내지 인본주의적 지성이자 지혜인 ‘데미안’이나 ‘에바부인’에 의해 부화 및 성장하는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프락사스 신에게 인도되어 선과 악 그 이중성이나 두 얼굴을 닮아가는 미혹의 인생도 체제도 국가도 결국은 불행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나치스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온갖 불화와 반목과 대립과 살상 등을 야기하는 인간 우리의 선과 악 이중성은 ‘이중성을 가진 신’에게서 구원되는 것도, 자유롭게 해탈되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자기의 ‘선과 악’이라는 태생적이자 타성적이자 모순적인 이중성 문제로 치열하게 고뇌했던 최고지식인이자 사도인 바울이, 거기서 ‘깨달은 한 법’은 자기가 ‘사망의 몸(body of death)’이라는 종말론적 정체성이었습니다. 진정한 부화 내지 거듭나기는 바로 거기서 비롯되고 창출됩니다. 진정한 은혜도 구원도 겸손도 거기서 비롯되고 창출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7:)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유치한 혹은 이기적인 혹은 자기중심적인 혹은 세상적인 ‘알의 세계’를 다시 깨고 거듭나서, 저 사도 바울의 강조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말씀을 팔아 인간 자기가 신이나 신격화되어서도 안 되고, 오직 인생의 참 구주이자 친구이자 ‘선한 목자’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장통(成長痛)을 통해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이나 또 다른 싱클레어를 참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참 친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יהוה)이다.-
그것이 진실로 ‘기독교의 전부’이자 ‘참 나, 참 인간’에 도달하기 위한 참 길이자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에게 ‘세상을 이기는’ 참 생명과 참 평화와 참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삶 그 ‘기독교의 전부’를 놓쳐버리면 예루살렘도, 오늘의 교회도, 집도, 가족도, 이웃 내지 사회관계도 죄다 ‘짠맛 잃은 소금’처럼 ‘황폐하여 버려지고’ 만다는 사실이자 진실을, 우리는 재삼 명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귀 난 세대’가 되어 머리나 배는 잔뜩 부르더라도, 심령이 황폐해지면 저 모든 관계가 죄다 삭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증언하는 산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a hen)이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태복음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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