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다 할지라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크게 회개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며,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역시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높은 덕과 뜨거운 경건심을 기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며
오히려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자기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높이고 존경한다고 해서
스스로 자만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지 말고
다만 자신은 무익하고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17:10)
-토마스 아 켐피스-
⌈탈무드⌋에 이런 내용의 일화가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농촌에 살고 있는, 한 촌부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가족처럼 사랑하며 키우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시나 탈무드의 다양한 지혜에는 일맥상통하는 근원적 흐름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가상해보자면, 그 개는 과거의 주인에게 버림받았거나 큰 변고를 당해 죽어가던 절망의 순간에 극적으로 오늘의 새 주인을 만나 다시 살아난 개일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새 주인의 은혜와 긍휼과 정성에 힘입어,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원 받은 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그 개가 살고 있는 집의 가족들이 다 집을 비운 어느 날. 집안 찬장에 우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그 우유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먹고 마시며 놀다가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농촌에는 뱀이 흔했기에 인가에 출몰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합니다만, 문제는 그 뱀이 독사였다는 데 있습니다. 독사가 품어낸 독이 우유 속에 대량 함유되어 있었던 것. 물론 그것은 집을 지키고 있던 개만 홀로 알고 있는 사실이자 진실입니다.
이윽고 집안으로 들어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자 찬장에서 우유를 꺼내자, 순간 개가 여느 때와는 달리 무섭게 짖어대기 시작합니다. 의아한 가족들은 개를 타이르며 조용하도록 주문하지만 개는 여전히 사납게 짖어대기만 합니다. 차라리 결사적으로 짖어대는 개의 그 메시지 내지 위기경보를 읽지 못하고, 가족 중 한 사람이 그냥 우유를 마시려는 순간 개는 몸을 던져 그 손을 받아버립니다. 바닥에 온통 엎질러진 우유. 개는 보란 듯이 그 우유를 자기가 대신 핥아먹습니다. 그리고 이내 쓰러지고 맙니다.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제야 가족들은 그 우유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 몸을 던진 개의 숭고한 희생 앞에 숙연해집니다.
주인 가족의 여러 생명을 살리고
대신 죽은 저 개에게 유언 한마디가
허락되었다면, 바로 이런 고백 아니었을까요?
-주인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저를 살려주신 주인님의 은혜에 이렇게나마
보답하고 갈 수 있어,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우리 속언에,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과연 저 개보다 더 나은 사람들일까요?
인생의 참 주인을 주인으로 알아보고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고 섬기는 인생들일까요? 아울러 하나님이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웃’으로 허락하신 그 소중한 서로의 인연을 과연 ‘네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인생들일까요? 세상 70억 인구 중에서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과연 하늘이 허락한 소중한 인연이자 이웃일 수 있는데, 그런 이웃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여유를 가지고 서로 배려하며 사는 인생들일까요? 차라리 너무 이기적인 사람,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은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크고 작은 역사와 섭리 안에서, 필요할 때마다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도움도 받고 신세도 끼치며 살아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의 나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긍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특히 제가 어렵고 처량하던 시절이나 고난과 고뇌의 골짜기에서 방황하던 때, 그 시 그 때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기묘하게 연결 및 섭리해주셔서 저를 물심으로 도와주셨던 국내외의 고마운 분들에 대한 은혜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그 기억이 새롭고 각별합니다.
물론 보행 장애의 몸인 저는 그 후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래서 푸른 꿈, 푸른 기회나 인연을 다 놓쳤는지 아니면 버렸는지 어떻든 언젠가부터 다 잊고 ‘내 모습 이대로’ 조용히 내 몫의 사명이자 사역에 성실한 종으로 한세상 살다가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만, 지난날 각별히 감사한 분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마다 ‘큰 빚’을 진 자의 심경이 되어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때론 사람의 도리를 못하고 사는 사람 같다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하늘을 향해 주님과 대화하듯 이렇게 눈뜨고 중얼거리며 기도드리기도 합니다.
“주(인)님, 제가 보행을 자유롭게 하는 건강한 몸이었고, 세상적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이른바 ‘큰일’도 했다면 직접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지난날 저를 도와주시고 제가 신세 끼친 고마운 분들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역시 그런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주(인)님, 저는 아시다시피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의 부르심 그 기묘(奇妙)를 체험한 이후 종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역시 작은 종입니다.
따라서 제가 직접 찾아뵈면 되레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잊은 듯 살아온, 지난날 고마운 분들을 위하여 주님의 종이자 제자라는 명분으로 대신 기도를 드립니다. 이 종이 알게 모르게 신세 끼친 물심(物心)의 그 모든 '은혜의 빚'을 주인님께서 각별히 기억해주셔서, 더 크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생명과 평강과 축복으로 대신 잘 좀 갚아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꼭 좀 갚아주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의 응답이자 확약(確約)처럼,
제 심령에 금세 들려오는 두 구절의 말씀인즉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10:)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복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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