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에코'나 '나르시스', '청개구리'의 불행을 넘어서

이형선 2017. 7. 24. 10:14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코(Echo)’는 아름다운 숲속의 요정입니다.

그녀에겐 한 가지 결점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자기 일이건

남의 일이건 참견해서 끝없이 지껄인다는 것.

 

어느 날. 여신 헤라가 바람둥이 남편 제우스신을 찾습니다.

제우스는 역시 요정들과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에코는 그 일에

불쑥 참견해서 헤라를 붙잡고 계속 수다를 떨며 지껄여댑니다.

그새 혼내주고 싶었던 요정들을 모두 달아나버립니다.

마침내 속을 것을 안 헤라는 화가 나서 에코에게 벌을 내립니다.

넌 다시는 그 혓바닥을 먼저 놀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남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허락해주마.”

 


절제 못한 말이나 수다 때문에 여신 헤라에게 그렇게 벌을 받은 요정 에코는 그 후 미남청년 나르시스(Narcissus)를 보고 사랑에 빠져 그의 뒤를 쫓아다닙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먼저 말을 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그녀로선 나르시스가 먼저 말해주기만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숲속에서 사냥하던 나르시스가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큰소리로 외칩니다. “거기 누구 없냐?” 절호의 기회를 만난 에코. “, 저 있어요.”

에코는 곧장 뛰어나가 사랑하는 나르시스의 목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자기애(自己愛)' 내지 '자기도취'라는 편집증(偏執症)에 갇혀 사는 그래서 차라리 오만한 나르시스는 야속하게 뿌리칩니다.

놓아라! 너 따위를 안을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제발 나를 안아줘요.”

애원하는 에코를 버려둔 채 나르시스는 떠나버리고 맙니다. 너무 부끄러워진 에코는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 깊은 산속 내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실연의 아픔을 앓다가 끝내 죽고, ()처럼 목소리만 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메아리(Echo)’라는 목소리로 대답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코(Echo)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남청년 나르시스 역시 그 철저한 자아도취 내지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불행의 길을 갑니다. 깊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자기 모습을 잡으려다가 자기 역시 물속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선화(水仙花)로 피어납니다. 그래서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도취, 자만심입니다. 아름다운 숲속의 요정 에코의 삶도, 미남청년인 나르시스의 삶도, 다 그렇게 자기세계에 갇힌 채 비극과 불행으로 끝나고만 것입니다.

 


한편,

성경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될 것이라는 사탄의 교활한 언변과 유혹에 빠져 인간 고유의 자유의지로

금기의 열매인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아담 내외는 그 후 사탄의 말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되지는 못했습니다.

선악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자 진리에 다름 아닙니다.

타락 전의 참 진리도, 타락 이후의 참 구원의 진리도,

인간 자기의 말씀이나 자기의 선악(善惡)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자기의 선행이나 수행이나 공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선악 그 자체가

참 진리이자 참 구원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나 첨단과학이나 인공지능이 위세를 떨치는 21세기 지금이나,

진리는 지키는 것이지 따먹는것이 아닙니다. 광의적으로 풀자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자 진리는 지키는 것이지 따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먹으면 청개구리처럼 결국엔 자기가 불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과연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합니다.” 편리한 첨단 문명도 과학도 인공지능도 살리는 영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입니다. 인간은 결국 인간입니다. 한계상황을 살다가는 인간일 뿐입니다. 한편으론 무익한흙이자 티끌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순종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3:9)

 


교활한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두른 아담과 하와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 인본주의 지혜인 저 그리스 신화속의 에코처럼 산속이나 동굴 속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담 내외가 숨어있는 곳을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 그렇게 물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장소가 아닌 관계의 상태이자 심령의 상태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어떤 상태로 있느냐?’ 아담 역시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소 개념이 아닌 상태 개념으로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3:10)

 


에코처럼 실연당한 것이 부끄러워 숨은 것도 아니고,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숨은 것도 아닙니다. ‘부끄러운그것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심령의 상태일 수 있습니다. 아담은 두려워하여숨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자기가 벌거벗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명기하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형상이 벗겨진 혹은 파괴된 우리 인생들의 근원적인 죄의식이나 죄책감의 상태는 과연 죄다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그 자체가 아직은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다는 의미일 수 있어서, 한편으론 다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교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명확하게 분별해 둘 것은, 실연 후 부끄러워 숨은 저 에코나 저 자기도취에 빠진 나르시스는 그 아집(我執)의 산속이나 동굴이나 깊은 연못에서, 이성(理性)이나 합리성이나 인간 자기중심이라는 그 타성의 세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부르심그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에 대답하며 벌거벗은 그 모습 그대로와 두려움을 액면 그대로 고백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다시 나왔다는 그것입니다.

죄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다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아담은 변명과 책임전가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포용심에서 보자면, 회개(悔改)하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경우일 수 있습니다. ‘괘씸하지만 그래도 숨지 않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내 자식이다 싶으니까요.

 


회개하다메타노에오방향을 돌리다입니다. 이미 먹은 선악과’,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인생사, 다 과거지사이자 이왕지사입니다. 과거의 실연이나 실패나 죄의식에 연연해서 부끄러움(羞恥)이나 두려움에 빠지면 그것 자체가 악령의 함정입니다. 미신적 혹은 인본주의적 신화나 지혜의 함정이자 동굴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탕자처럼 아들이 아닌 으로라도 살리라, 응분의 벌을 받으리라는 각오로 그 모습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 ‘방향을 돌려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희망이 보입니다.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창조적 곧 현재적이자 미래적이자 초월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영원히 사는, 참 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실인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지만, 그래서 실낙원 및 수고와 죽음의 길을 가는 응분의 벌을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 인류의 조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 내외를 쓸어버리고 대신 다른 인간을 인류의 조상으로 창조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인생들의 타락이 한계수위를 넘어서자 땅 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시며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세상을 다 쓸어버렸고, 심지어 선택한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시대에 패역을 일삼자 격노하시며 선지자 모세에게 다 쓸어버리고 새 민족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으신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 덕분에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런 재앙을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유황과 불 심판을 받고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창세기 19:24)성 주민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들의 사악함이나 동성애 등의 타락을 회개하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왔더라면 멸망을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간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조상으로 세우십니다. 아담이 아닌 다른 인간을 인류의 조상으로 재창조한다 해도 역시 사탄의 시험 앞에 약한 흙의 인간이자 육체인 인간은 아담처럼 또 타락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아담이 아닌 다른 그 누구라 해도 먹지 말라’, ‘하지 말라’, ‘가지 말라등의 금기(禁忌)에 되레 일탈심이나 호기심을 갖고 어차피 그 금기를 범하거나 깨뜨리기 마련이니까요. ‘청개구리같은 속성이자 타성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전래동화 청개구리잘 아시죠? 그 요지도 다시 한 번 돌이켜볼까요.



옛날에 청개구리와 청개구리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아니하고 늘 반대로 듣고 행하는 불효자였습니다. 그런 청개구리의 어머니가 병이 들어 마침내 죽게 되었습니다. 뭍에 묻히길 원했던 어머니는 늘 반대로 듣고 행하는 아들의 타성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얘야,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다오."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펐던 청개구리는 그제야 후회하며 마지막 말씀이나마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유언 그대로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비만 내리면 청개구리는 개골개골 운다고 합니다. 개울가에 있는 어머니 무덤이 쓸려내려 없어져버릴까 근심과 걱정이 돼서.

 


어머니의 품을 잃은 후 비만 내리면 슬피 울어야하는 저 청개구리의 불행한 삶과

하나님 아버지의 품일 수 있는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고달픈 나그네 여정을 살고 있는

불행한 아담과 그 후손인 인생 우리의 삶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또한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하나님은 청개구리(?)’ 같은 아담을 그대로 인류의 조상으로 쓰시진 않습니다. 고쳐서 쓰십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아담과 하와가 자기 심령의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 걸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를 벗고 대속(代贖)가죽옷을 입도록 해서, 고쳐서 쓰신 것입니다. ‘자기의 옷대신 하나님의 옷은혜의 옷을 입도록 해서, 고쳐서 쓰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인간들이 저 '청개구리' 같은 자기들의 정체성이자 타성 및  그 한계를 알고 그래서 자기들의 구원이 율법이나 자기 선행이나 수행이나 학문이나 공적으로 안 된다는 것을  체험적이자 역사적으로 깨달아 알고 그래서 스스로 가슴을 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7;24)라고 통곡하는 때가 되면, 패역한 선민 이스라엘(유다) 왕국이 결국 멸망을 당하고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구약시대 막장의 때가 되면, 이나 육체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세상에 오실 둘째아담이자 메시아, 그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죽옷에 대한 은유적 계시를 통해, 고쳐서 쓰신 것입니다.

따라서 가죽옷그 자체가 바로 신약시대에 다 이루어질대속(代贖)의 은혜이자 구원의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자 약속인 최초의 복음이자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garments of skin)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3:21)

 


낙원에서 쫓겨난이후, 아담과 하와가 평생을 수고하며때론 웃고 때론 울며, 그래도 한세상을 살다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저 가죽옷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양이 되어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비밀처럼 끊임없이 계시된 저 구원의 복음이자 은혜의 복음을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고 선언하신 신약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겐 저 가죽옷에 대한 비밀이자 비전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끝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아집이나 자기세계 안에 갇힌 채 각각 죽은 저 에코나르시스’, ‘청개구리의 불행을 넘어서는 길이자 이기는 길임에 틀림없으니까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어렵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16:24)며 앞서 인도하는 참 메시아선한 목자나 그 가죽옷이라는 구체적이자 희생적인 비전이나 삶이 없는 신화나 문화나 이념이나 지혜는 종국적으로 우리 인생들을 더욱더 불행한 동굴이나 혼돈의 심연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그러면 그럴수록 부족한 네 모습 그대로’, 죄와 허물이 있는 내 모습 이대로’, 대속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진실로 복이 있는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늘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현재적 낙원이자 살아있는 안식의 처소이니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가죽옷?)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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