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현인이자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최고선을 ‘어리석게
보이는‘ 물의 성품이자 그 세계로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명언 ‘상선여수(上善如水)’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는데,
과연 동양 지혜의 압권이다 싶습니다.
노자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 상대를 거슬리지 않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노자가 언급한 물의 성품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항상 유연성을 가지고 상대를
거슬리지 않고 꾸준히 적셔준다.
물은 항상 겸허하게 상대의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채워준다.
물은 약해보이지만 또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지혜와 문화의 차이는,
공자나 맹자, 노자나 장자를 위시한 동양의 지혜나 문화가 사람(理性)이나 자연(理致) 중심의 세계라면, 기독교의 지혜이자 문화로 대변될 수 있는 서양의 그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하늘 등 그 모든 세계를 지으신 그래서 그 모든 세상의 한계를 능히 뛰어넘는 ‘창조주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 중심의 세계라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컨대, 출애굽시대 때 ‘마라의 쓴물’은 마시지 못하는 광야의 물입니다. 히브리어 ‘마라’는 ‘쓰다, 고통스럽다, 괴롭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의 모든 고통스러운 ‘쓴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 앞에서 ‘백성이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자, 선지자이자 인도자인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창조주 하나님’은 그 물을 ‘단물’로 바꿔주십니다. 하시고자 하면, 그렇게 초자연적 구원도 능히 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인생의 앞길을 가로막은 '홍해'도, '요단강'도 능히 두 쪽으로 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을 때 ‘큰 광풍’이 일어납니다. 당시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부출신들이 다수인 제자들은 주님을 배 안에 모시고 함께 있었지만 그러나 큰 폭풍 앞에서는 두려울 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큰 폭풍의 시련 한가운데서도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신 주님. 죽음의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제자들. 분명히 ‘함께 있는’ 동행(同行)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배 안에 모신 믿음’과 ‘내 안에 모신 믿음’은 과연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선 서둘러 위기 내지 응급 상황을 해소하기보다는 야속하게도(?) 먼저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you of little faith),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환경이나 여건이 먼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심령이 늘 먼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8:) 하시고자 하면, 그렇게 초자연적 구원도 기적도 능히 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 아래서 한계를 사는 사람이나 자연 중심의 동양적 세계나 지혜나 문화보다는 하늘에 열리고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초자연적 내지 초월적 구원의 세계에까지 열린 지혜나 문화가 보다 ‘넓고 크고 높고 깊은’ 공동선이나 범세계적 내지 우주적 이상과 꿈과 비전(vision)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또한 역사적으로 서양의 문화나 문명의 발달이 동양의 그것보다 앞서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3:18~19)
한편,
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지상명제이자
기독교의 절대명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곧 ‘사랑의 나라’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agape))이십니다.’ ‘거룩한 사랑’이십니다. 맹목적인 사랑도 신앙도 아니고, 미신적인 사랑도 신앙도 아닙니다. 올바른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최고선은 ‘사랑’입니다. 최고진리도 ‘사랑’입니다. 율법도 실정법도, 공의도 정의도 다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태복음22:)는 ‘두 계명’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 ‘미인도’가 위작(僞作) 여부 문제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문학 등 모든 예술작품에는 그것을 지은 작가가 있고 거기 작가의 혼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듯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나 자연 등 피조물 그 모든 작품에는 과연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이나 성품이 담겨있습니다. 신학적 언어로 ‘특별 계시’나 ‘자연 계시’라는 섭리나 메시지가 또한 거기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나라’도 ‘자연계시’인 저 ‘물의 성품’이나 ‘물의 나라(?)’와 같다 싶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모든 인생을 살리는 참 ‘물’의 발원지는 바로 하나님이시자 그 분이 임재하신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구약시대가)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스가랴14:7~8)
예나 지금이나, ‘폭염’이라는 복더위가 막바지 기세를 떨치는 오늘이나, 우리는 늘 물을 마십니다. 시원한 ‘생수’를 마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생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인생 체험이자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압니다. 그것으로 ‘인생의 목마름’이 해갈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더라는 것. 돌아서면 금세 다시 목이 마릅니다. 폐수나 건수를 마신 것처럼 아니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갈증은 되레 더 나고 그래서 욕심이 되레 더 커지기도 합니다. ‘세상 물’ 곧 ‘속물’은 마실수록 갈증도 욕심도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럴수록 우리는 저 구약 예언의 성취이자 ‘세상에 오신 생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할 필연성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은 먼저 ‘생수’에 주목하기 마련이니까요. 인간 자기의 존재 그 정체성에 절망을 토로하도록 진정한 갈증을 체험한 자는, 진정으로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물’이 나올 때까지 샘을 구하고 찾고 파기 마련이니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조상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4:13~14)
삼인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체성 그 ‘자기선언’입니다. 성령을 통해 오늘도 솟아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참 물’ 곧 그리스도의 ‘생수’를 제대로 마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마련입니다. ‘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그리스도처럼 살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푯대’이자 진정한 성공의 푯대입니다. 세상 속물을 마신 자가 세상의 대기업이나 재벌그룹을 본받아 자기의 부(富)나 아성을 키우는 것이나 권력이나 기득권으로의 진입 그런 유형의 신분상승 자체가 진정한 성공도 아니고, 진정한 신앙의 푯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1:1)
감히 그렇게 말씀했던 사도 바울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살았던 신앙위인 바울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성품을 닮아야 한다고 오늘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보다 낮은 곳을 향해 전진하는 물의 마음이자 성품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
정녕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신의 성품(the divine nature)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베드로후서1:4)고 역설했습니다만, 과연 나그네처럼(?) 바다를 향해 가는 물도, 천국을 향해 가는 예수 그리스도도 그 성품은 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삶’, 거기 있습니다. 약해보이지만 가장 강한 힘도 능력도 다 ‘낮은 곳을 향하는 삶’ 그 케노시스(kenosis), 그 '신의 성품'에서 발현됩니다. 인생이나 세상의 구원도, 그 각각의 역사를 바꾸는 진정한 힘도 능력도 과연 저 ‘비움과 낮아짐’, 저 이타적 배려와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상대적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갈수록 힘도 능력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외려 ‘기독교 지도자들’의 자기 소유가 너무 많아졌고, 이미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 ‘누리며 행세하는 삶’ 그것이 성공이자 축복이라며 거기 안주(安住)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저 그리스도의 영성의 비밀이자 그 성품과 삶의 패러독스(逆說)에 열려질 때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부활에의 ‘산 소망’도 열려질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설령 ‘너무 배가 불러’ 다 죽어간다 할지라도, 저 역시 그렇게 죽어간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생명 그 말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진리 그 성품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천지(天地)는 없어지겠으나
(*예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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