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아브라함의 꿈'과 '롯의 꿈' 사이

이형선 2017. 8. 21. 11:09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삽니다.

꿈이 커야 마음도 커지고 사람도 커집니다.

자기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현자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주목해 볼 것은,

그 꿈이나 비전의 차원이 자기중심이나

인간중심이나 세상중심의 차원일 때,

그 결국인즉 현자 솔로몬의 토로처럼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

바로 그것이더라는 것입니다

 


현대사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의 꿈을 부르짖던 군국주의자들의 최후도 그랬고, 칼 마르크스가 주창한 지상낙원에의 꿈이자 그 인류 최대의 실험이었던 공산주의 구소련의 붕괴 역시 그랬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새마을운동과 함께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힘써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오천년의 가난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민주화에의 꿈까지 성취했다고 자부하는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실상도 진정한 행복이나 평안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하얀 쌀밥에 고깃국먹고 '내 아파트'에 살면 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배가 부를수록되레 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정치적 이념 갈등이나 빈부 간 내지 갑을 간 갈등의 골은 갈수록 심화되고, 인간의 이념이나 재물 내지 자본 자체가 절대주인이 되고 아울러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그 지도자나 하수인이나 패거리가 되어 죽기 살기로반목 대립하며 싸우는 게 직업처럼 되어있는 오늘의 세태가 그렇고, 이혼율이나 자살률은 높아지고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자기부모 공경이라는 당연한 효도조차도 차라리 미담이 되어가는 인간성 해체의 세태 역시 그 결국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참 행복과 평안으로 인도하는

참 꿈과 비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신정역사(神政歷史)가 열리는 시대의 주요인물인

두 인간형의 대조적인 꿈과 비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의 꿈과 그의 조카인 롯의 꿈

그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적 이름이

아브람이었는데, 그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렇게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12:1~2)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이 당시 75세인 아브람을 택해서 신정사(神政史) 하나님 나라의 참 구원과 참 복(blessing)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해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인 하란에서 떠나, 이후 낯선 땅인 가나안 땅을 거쳐 남하하면서 기근을 만나 애급으로 가는 등 고달픈 나그네 여정을 살게 됩니다.

 


아브람이 고향 하란을 떠날 때 동행자들은 아내 사래와 그의 집안일꾼들과 조카 롯이었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동생인 하란의 아들인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일찍 죽습니다. 따라서 고아가 된 롯은 이후 큰아버지인 아브람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역시 감히 고향을 떠나 아브람이 가는, 정처 없는 유목민생활이자 신앙여정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신앙여정에 자원해서 동참할 수 있었던 그 인연 자체는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섭리일 수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 구레네 사람 시몬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지고 따라갔던그 자체조차도 하나님의 큰 은혜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복된 은혜를 은혜로 살리지도 못하고 굳게 간직하지도 못합니다. 그럴 것이 저들이 기근을 피해 내려갔던 나일강이 흐르는 애급에서 다시 나올 무렵엔, 아브람 소유의 양과 소도 많아졌고 롯의 양과 소도 역시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아브람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일이 빈발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소유가 많아질수록 과연 동거하기도 공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자 고심하던 아브람이 결단을 내립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너나 나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세기13:8~9)

 


큰아버지 곧 백부이자 대부인 아브람의 저런 제안에 조카 롯은 땅의 좌우를 살피기 전에, 먼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좌우를 살필 수 있어야했을 것입니다. 고향 하란을 떠나 믿음의 조상아브람을 따라 나선 연유가 구별된 신앙 때문이었다면, 그는 차라리 자기 소유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자기 소유나 자기 직업이나 배를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롯은 전적으로 자기 소유 중심의 삶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비약을 좀 시켜보자면, 아브람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목적이나 교회에 나간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구원의 신앙이나 거룩한 사랑이나 진리 때문이 아니고, 자기 소유가 남보다 더 많아지는 그런 이기적인 축복 내지 기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롯은 아브람의 제의에 예의상의 사양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우선의 선택권을 어른에게 양보하지도 않습니다. 아브람의 제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소유 내지 재물이 이미 그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과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God)과 재물(Money)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6:24)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자의 꿈이나 비전과, 하나님보다 세상 재물이나 권력이나 사람을 더 섬기는 사람의 꿈이나 비전은 그래서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했던 아브라함의 꿈과 세상적인 자기 야망이나 야심의 성취를 추구했던 롯의 꿈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보다 큰 꿈과 비전을 가진 자는, 초자연적인 꿈과 비전까지 가진 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권이나 기득권조차도 양보할 수 있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헬라어 아팔레오마이비난하다, 포기하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16: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던 아브람은 그래서 모든 우선권 및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기꺼이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동쪽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그곳으로 떠납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세기13:10)

 


롯의 눈은 이미 세상 자기 소유나 재물에 사로잡힌 눈입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꿈과 비전이나 가치관은 늘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탐심이나 정욕의 눈으로 바라보면 밤의 환락가가 다 낙원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각종 사악과 동성애 등의 타락으로 들끓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던 그 땅이 되레 여호와의 동산 같고비옥한 애굽 땅과 같이보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본 것입니다. 유토피아로 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것입니다.

 


현실적 생존권과 번영이 좌우되는 중대 문제를 앞에 두고 그 선택은 분명히 조카 롯이 먼저 했습니다. 그러나 복된 가나안 땅은 바보(?)처럼 선택의 우선권까지 양보했던 아브람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먼저 섬김의 여유가 있고, 불화나 실패나 고난을 통해서 보다 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줘버리는자발적 손해나 불이익도 감수하고, 그런 실천의 삶을 통해서 외려 보다 크고 영원한 꿈과 비전을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럴 것이,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친히 나타나시어 또 이렇게 언약을 주시니까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13:14~15)



바라보다곧 히브리어 라아인지(認知)하다는 의미도 가집니다. 바라보는 것,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시를 깨달아 인지하는 차원으로 신앙이 성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브람에겐 아내의 불임증으로 자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후손의 생육과 번성에 대한 책무와 집착이 강했던 고대문화 속에서 차라리 절망적인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초월적인 꿈과 비전과 희망을 주십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 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세기13:16~17)

 


과연 가나안 땅, ‘하나님의 나라(天國)’바라보는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지(認知)했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두루 다녀보라(Go, walk through)’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그 꿈 그 비전이 이 땅 위에 구현되도록 두루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실행하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계시의 말씀은 그대로 아브라함의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노년의 아내 사라를 통해 기적처럼 아들 이삭을 낳고, 175세의 일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저 아브라함의 꿈과 비전은 600여년 후에 마침내 말씀 그대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선지자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급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참 복()’이자 영원한 복(Blessing)의 근원인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출현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인간적 자기의 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이보였던 그 세상 중심의 꿈과 비전을 좇아 요단 땅 소돔성에 정착한 롯은 성적 타락 등의 죄악으로 들끓던 소돔성이 불과 유황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때, 자기 모든 소유와 아내마저 잃어버립니다.

이미 뿌리내린 세상의 기존 소유 때문에 극도로 타락한 소돔성을 떠나지는 못하고 거기 연연해서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소돔성의 타락상을 살피러온 두 천사’(창세기19:1)를 미리 알아보고 성의껏 대접하는 등 그래도 영적 분별력이나 경건성이 아직은 남아있었던 롯은 그래서 두 딸과 함께 거기서 가까스로 구원을 받고 살아남습니다.

 


그 후 소돔성의 난잡하고 부도덕한 성적타락에 직간접으로 물들었던 두 딸들은 후손을 남기고자 하는 일념에서, 아버지 롯에게 술을 권해 만취토록 해서 각각 동침합니다. 그래서 롯은 두 딸들이 각각 낳은 아들을 통해 모압과 암몬 족속의 선조가 됩니다만 저들은 '친족'인 이스라엘 족속의 가시 노릇만 하다가 결국엔 역사 속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롯의 꿈은 자신에게도 후손에게도 불행했고, 현세적으로도 내세적으로도 허무한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꿈은

아브람의 꿈에 가까운 것일까요?

롯의 꿈에 가까운 것일까요?

 


-묵시(revelat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언29:18)

 


그렇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고 그래서 결국엔 소돔이나 고모라처럼 타락하여 망하게 됩니다. 묵시하존곧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없으면, 곧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의 율법과 신약성경의 복음에서 빗나간 꿈이나 비전은 다 저 인간 롯의 꿈이나 비전처럼 그 결국이 불행하고 허무합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인이나 경제인, 지식인이나 웅변인 누군가가 꿈과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식으로 자기 지론을 설파해도 당장의 그것에 너무 현혹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배워야할 것은 '적군'이나 세 살 먹은 아이에게서라도 겸허하게 배우고자 저 역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영적 분별력이 없는 꿈과 비전은 결국 허무하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리시대의 숙원이자 숙제인 남북한통일 문제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도 통일을 기원하는 사람입니다만, 통일문제 역시 인간적 민족의식이나 영웅의식이나 돌출의식으로 접근할 문제도 아니고,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일제 치하에서의 해방이 도적 같이임했던 것처럼 통일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가 되면 도적 같이’, 홍수 때 둑이 절로 터지는 것 같이 성사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가 앞당겨질 수 있도록 먼저 겸손하게 기도해야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섣부른 625전쟁 식 인위적 통일노력은 더 끔찍하고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참상만을 불러올 것임에 틀림없으니까요.

 


따라서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영적 분별력내지 거룩한 분별력입니다. 우리 인생을 진실로 이웃과 함께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도해서 살리는, 피차 대립하는 이념 간, 갑을 간, 부부 간, 지역 간, 빈부계층 간의 그 모든 통일이나 그것을 위한 참 꿈과 참 비전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이자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이자 참 꿈이자 참 비전이자 신령한 복(spiritual blessing)’(에베소서1:3)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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