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불가사의한 만리장성'과 그 '생명'

이형선 2017. 8. 28. 10:38



전국(戰國)시대부터 쌓기 시작하여

진시황제 때 완성된 만리장성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불가사의(不可思議)’에 대한

국어사전 해설인즉 이렇습니다.

 


-말로 나타낼 수도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일.-

 


18세기, 조선왕조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朴趾源)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의 거대함앞에서 느꼈던

그의 감회를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겹겹의 관문을 벗어나 장성 아래에 말을 세워두고 그 높이를 가늠해보니, 십여 길은 될 성 싶었다. 붓과 벼루를 꺼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져보고 난 후 글을 썼다. ‘건륭 45년 경자 8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 이곳을 지나가다라고. 그러고 나서 크게 웃었다. ‘나는 한갓 서생일 뿐이구나. 머리가 희어서야 장성 밖을 한 번 나갈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듯 큰 세계를 본 연암은 그 앞에서 한갓 서생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왜소함을 느껴야했습니다. 진실로 큰 세계큰 사람을 본 자는 작은 세계작은 사람이 절로 시시해질 수밖에요. ‘참 좋은 것을 가진 자는 덜 좋은 것이 절로 시시해질 수밖에 없고, ‘진품 보화를 가진 자는 짝퉁 보화가 절로 시시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신구약 성경(Bible)은 여러 의미에서,

더욱더 불가사의한 만리장성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불가사의한 만리장성일 수 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경전서는 그 구성이나

편집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개신교 성경전서의 경우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곧 성령(聖靈)의 감동을 받은

40여명의 필자 내지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지혜서, 선지서, 복음서, 서신서,

계시서 등으로 분류해 볼 수도 있는 가히 만리장성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처음 다섯 권 곧 오경(5)’을 기록한 선지자 모세부터 시작해서 맨 끝에 위치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저자라기보다는 그 기록자들은 40여명에 이릅니다. ‘욥기히브리서의 경우처럼 필자 미상인 경우는 차치하고, 저 필자 내지 기자들은 애굽의 고등학문을 통달한 모세부터 시작해서 왕, 제사장, 선지자, 현자, 불학무식(?)한 목자나 어부, 그리고 세리, 의사 등에 이르기까지 출신성분이나 직업이 다양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구약 66권 전체의 동맥 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통전적(通全的) 사상이자 계시이자 생수이자 메시지는 의외로 하나입니다. 통일(統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장차 세상에 오리라고 때론 은유나 암유나 비유로 때론 직설로 집요하게 예언 및 계시된, 구약성경의 원시복음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세상에 오신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성취된 임마누엘 복음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자체이신 구주(救主)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고’,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eternal life)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5:39~40)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선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말씀 그 계시에 친히 순종하고 그 진실을 지키면서 그 절대 권위를 또한 자주 증언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성경은 폐하지 못하니니’,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등의 언급을 통해서 말입니다.

 


지금은 기마(騎馬)시대가 이미 아닙니다.

핵이나 미사일, 인공지능(AI) 등이 화두의 플랫폼이 된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저 대륙의 불가사의한 만리장성

더 이상 불가사의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거기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불과 50세의 나이에 병을 얻어 객사한 허무한 생명이었던

진시황의 죽음과 그가 통일시킨 후 불과 3, 15년 만에 멸망한

역시 허무한 생명이자 짧은 생명이었던 진나라의 역사까지를 보게 됩니다.

 


진시황이 전국에 걸쳐 각가지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공개적으로 구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별의별 약을 구해서 먹고 마셨지만, 그러나 그가 불로불사약이라고 믿었던 비방이나 명약들을 통해 그는 되레 자신의 죽음을 앞당긴 수은 등의 독소에 중독되어야했습니다.

과연 중국 천하의 불노불사약과 산해진미가 그와 그의 나라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칼과 창으로 그리고 돌과 벽돌로 이룬 거대한 불가사의가 그와 그의 나라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으로 인도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만리장성을 구하고 찾아야할 것입니다. ‘성경, 거기서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구하고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각종 타락이나 죄악이나 고난이나 고통, 고독이나 절망 속에서 신음하며 방황하던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곧 불가사의한 산맥이자 불가사의한 광맥이라고 하나 같이 고백 내지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과연 성경은 오묘한 산맥이자 비밀한 광맥입니다.

 


오묘하고 비밀한 산맥이나 광맥에서

떡이나 은이나 금을 찾은 자가

진실로 복이 있을까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찾은 자가

진실로 복이 있을까요?

저 남미(南美)의 역사가 오늘도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전자를 먼저 구한 스페인이나 폴투칼 사람들은

결국엔 전자도 후자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 북미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후자를 먼저 구하고 찾은 청교도들은

후자도 전자도 다 부요하게 얻었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의 성향을 떠나서,

유무신론적(有無神論的)인 견해조차 떠나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공간의 문제도 아닙니다. 소유의 문제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시간 내지 한계를 사는 땅의 인생들과는 달리, 영적(靈的) 존재이자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때론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것처럼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그래서 죽음의 길을 가는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구하고 얻어야 할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내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곧 영원한 사는,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合一)의 문제이자 공존(共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초월하는 영적(靈的) 관계이자 가치관의 문제이자 그 본질 회복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세상에서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합일 내지 공존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말을 바꾸자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한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면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살고 부해도 살고, 유식해도 살고 무식해도 살고, 건강해도 살고 병들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나 공간도, 환경이나 여건도 초월하는 전천후(全天候)적 그 영원한 생명과 그 정의와 평안과 기쁨의 비밀은 오직 그 비밀을 생명으로 맛 본 자, 삶으로 체험한 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정작 '큰 세계'와 '큰 자'를 보고 열린 후,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비밀'을 보고 열린 후,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3:8)이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디모데전서1:15)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 한 번 세상에 태어나 참 구원이라는 인생 본연의 최고 숙제를 마침내 풀고 하나님의 나라이자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간 사도 바울. 그는 이렇게 고백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rubbish)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

 


과연 진실로 고상한하나님 나라의 큰 자(人子)’나 그 큰 세계를 본 자나 얻은 자는, 인간 자기중심적이자 세상 중심적이었던 작은 자작은 세계가 차라리 배설물처럼 저절로 시시해지는 것인가 봅니다. ‘배설물을 잔뜩 쌓아두거나 거기 파묻혀 그것으로 내로라 자랑하며 기뻐하는 사람은 너나없이 실상인즉 재래식 변소의 파리처럼 어리석은 사람이자 어리석은 세계의 그것이 아닐 수 없겠지요?

 


물론 저 저절로의 역사는 억지로되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참 성령(聖靈)저절로의 역사이자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참 성령을 받으면 자기 비움이나 낮춤도, 이타적 사랑이나 물질적 사심 없는 치유 사역이나 섬김이나 봉사도, 헌신이나 희생이나 순교까지도 저절로’, ‘기쁘게’, 능히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기적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는 믿음보다, ‘헌신을 통해 자기를 '능히' 희생하는 믿음이 더 크고 영원한 믿음이자 능력이니까요. ‘영원한 생명에의 길이자 부활 생명에의 길은 천하만국의 영광에서 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으니까요.  

 


우리 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은밀히 그리고 저절로’, 그렇게 '능히' 이루어지는 이타적 사랑의 역사, ‘신의 성품으로 '능히' 성숙 및 성화되어지는 역사,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자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있는 인생 우리의 참 믿음 여부에 대한 반증이자 참 성령 여부에 대한 반증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일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평가론 내지 심판론 역시 인생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이니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