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핵실험 성공을 통해
핵무기 보유국가가 된 파키스탄.
그 전철을 벤치마킹했다는 북한 역시
최근에 자행한 ‘6차 핵실험’을 통해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었다는 인식이
국내외 언론에 ‘난리 소문’처럼 파다합니다.
저 북한이 ‘체제 존립을 위한 생명’ 그 자체로 여기는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럴수록 한반도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전쟁 억제 내지 견제적 평화를 위해서는 ‘핵에는 핵‘이 최선이라는 남한의 핵무장론까지 공공연하게 주장 및 개진되고 있습니다. 고모부나 친형조차도 거침없이 암살 내지 처형시켜버리는 잔인한 ’조폭‘ 앞에서 ’대화 타령‘이나 ’대화 구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여론에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남북한 간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들과 얽힌 국제적 현안과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불안해질수록 상대적 약소국의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썬 그럴수록 대통령을 위시한 각계 지도자(leader)들의 역할과 책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와 국민들의 안위와 평화가 그들의 손에 달려있으니까요.
저는 시국이 불안해질수록, 긴장이 고조될수록, 그 자체가 국민들 특히 종교 및 정치지도자들을 위시한 각계 지도자들에게 “회개하고, 더욱 겸손하게 기도에 힘쓰라! 깨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경종이자 섭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것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전쟁이나 지진 등의 위기나 재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을 통해 ‘미리’(마태복음24:25) 가르쳐주신 말씀이자 지식이니까요.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24:6~8)
따라서 우리 서민들은 물론이고, 특히 대통령을 위시한 각계 지도자들일수록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태복음24:42)는 그리스도의 강조의 말씀처럼 먼저 ‘깨어 있어’ 기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지혜를 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어 스스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쳐들어가 망하게도 하시고, 또한 ‘니느웨 왕’과 그 백성들에게처럼 ‘회개하는 마음’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는‘(요나3:10) 마음을 주시어 작정된 ’재앙‘으로부터 살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시는 분이니까요.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애굽기14:4)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여정의 앞길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사람의 머리’ 굴려봐야 아무 소용없는 막다른 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인 ‘배수진(背水陣)’이라는 절망적 좌절이나 고난은 그렇게 허락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모세를 심히 원망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들은, ‘신적 리더십’을 가진 선지자이자 ‘인간적 리더십’을 함께 가진 인도자(leader) 모세는 의연하고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14:13~14)
절망적 좌절과 고난의 자리가 되레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만날 수 있는 구원의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통해 가로막힌 홍해는 갈라졌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육지처럼 그 길을 건너갔고, 애굽 군대는 그 홍해에 죄다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위기’나 ‘불안’이 고조될수록 저 지도자 모세처럼 먼저 기도해야 할 필연적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 가치관이 다만 ‘육체’이거나 ‘동물’이거나 ‘유물(唯物)’인 사람들에겐 지극히 비현실적인 말이 되겠지요. 차라리 허무맹랑한 궤변이자 시간 낭비이자 약자들의 위안이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리는 성경이 증언하고 있고,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도 그런 증언자 중의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처칠이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다고 대개 언급하고 있지만, 주변 친지들이나 처칠의 외손녀인 실리아 샌디스의 증언 등에 의하면, 처칠은 젊은 시절에 이미 불가지론을 버렸고 실상인즉 ‘신의 섭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산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종교인 처칠’이 아니고 ‘정치인 처칠’이었지만,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고,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처칠이 경호원 톰슨과 함께 길을 가다가 ‘폭탄 테러’를 당합니다. 그때 가까스로 피신하여 살아남은 뒤 외려 당황하는 경호원에게 태연하게 했던 말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걱정 말게.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톰슨에게 처칠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부연합니다.
“저 위에 계신 분이 나에게 임무를 주셨고, 내가 그 임무를 마치기를 원하고 계시거든.”
‘종교인 처칠’이었다면 보다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셨고, 내가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도와주실 것이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사명을 다 마치기를 원하고 계시거든.”
과연 그렇습니다.
그보다 더 확고한 믿음이자 신념이 어디 있겠습니까? 국민들 앞에서도 웅변을 통해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는 과연 ‘신의 섭리’를 굳게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믿음’ 자체가 바로 인류를 히틀러와 나치스의 치하에서 구원 및 승리하게 만든 근원이자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처칠의 ‘성공’에 대한 지론인즉 이렇습니다.
-성공은커녕 사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온갖 고민을 주렁주렁 달고 삽니다. 그래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므로, 어떤 것을 얻는 기술이요 성취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주장에 반대합니다.
성공은 많은 것을 버릴 줄 아는 기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많은 갈등을 버리고, 주변의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공은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고 가는 게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간단명료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정한 목표에만 집중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정한 목표에만 집중’해서, 온갖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마침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20세기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 그렇게 자기의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쳐서 영국을 구하고 인류를 구한 윈스턴 처칠.
인간을 살리고, 조국을 살리는, ‘의로운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성공해야 합니다. ‘선한 일’, ‘바른 일’은,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승리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12:21)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인간의 일생에 부여된 임무이자 사명이자 ‘신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여기서 우리 대한민국과
한반도를 살릴 수 있는
‘참 지도자’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릴리아스 트로터 선교사의 이런
단상을 또한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지도자를 찾고 있음을 아십니다. 이 지도자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어야 하는 것도 아십니다. 이 분은 우리가 밟았던 그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인간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땅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도 전에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신적 리더십과 인간적 리더십, 이 두 가지가 그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로마서1:4)되신 분이고, 육신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요한복음5:27)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분을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leader)와 명령자로 삼았다“(이사야55: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19~20세기를 살았던 저 ‘릴리아스 트로터(Lilias Trotter)’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20대부터 화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자기 성취나 영달보다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더욱 크게 가지고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입니다. 그러다가 자원해서 당시 오지이자 프랑스령이자 무슬림 국가인 아프리카 알제리 선교사로 나가 거기서 ‘오직 자신이 정한 목표에만 집중’하며 이후 41년 동안 헌신적으로 사역했던 ‘영성의 여인’입니다.
트로터는 ‘인류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이 ‘참 지도자’의 리더십이 될 수 있는 것은 ‘신적 리더십과 인간적 리더십이 그 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적 리더십’은 지도자 자기 머리나 참모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지혜이자 능력입니다. 그러나 ‘정치 9단’을 포함한 그 어떤 천재들도 인간적 리더십만으로는, 특정 좌파나 우파의 인간적 이념이나 그 우상화된 프레임만으로는 ‘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어차피 너나없이 장단(長短) 및 한계가 있는 제한적 존재이니까요. 인간적 내지 이념적 리더십으로 교만해져서, 영웅의식이나 자기돌출의식에 사로잡혀 날뛰는 것이 진정한 용기도 능력도 아니니까요.
따라서 먼저 ‘신적 리더십’을 구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신적 리더십’은 오직 ‘신’ 곧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늘의 지혜이자 능력입니다. ‘참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는 일상에서 늘 먼저 ‘신적 리더십’을 구하며 사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셨고 그런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우리 역시 기도하며 그렇게 먼저 ‘신적 리더십’을 구하면 의식주 같은 경제적 문제도, 저 ‘북의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나 능력도, 평화적인 통일의 해법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치스 제국’의 교만과 광기를 이긴 ‘정치인 처칠’의 고백처럼 ‘하늘에 계신 분’ 곧 ‘저 위에 계신 분’이 도와주셔야만 핵문제도 통일문제도 해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북한도 한국도 차라리 교만한 ‘인간적 리더십’에 의한 패권적 결단만으로 ‘군사적 옵션’을 감행한다면 동족상잔은 물론이고 ‘주한미군이라는 인질’의 대량 살상이라는 잔혹한 진창을 자초하는 참극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쪼록 ‘역사의 참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먼저 겸손하게 ’신적 리더십‘을 구하고, 아울러 ’인간적 리더십‘을 겸비한 참 지도자들이 되어 오늘의 난국을 지혜롭게 잘 풀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과 한반도를 평화와 희망으로 인도하는 관련당사국의 대통령들 및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9세기 위대한 지도자’였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처럼 먼저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가?“ 그렇게 자문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어야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8:31)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우리 편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인 대한민국의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무신론을 주장하는 저 ‘북조선 인민들’보다 과연 더 바르고 선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물질적으로,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이나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상인즉 그렇다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우리 편이 되어주실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브리지(Noblesse Oblige)’라는 모범을 보이지 못한 지도자들부터 ‘전쟁’이라는 ‘현재적 심판’이 터지기 전에 먼저 진심으로 회개해야 할 필연적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불굴의 신념도 용기도 승리도 다 심령(心靈) 내지 ‘마음이 청결한 자’(마태복음5:8)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복’이니까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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