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하나님'

이형선 2018. 6. 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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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문제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전을 한다.

 특히 과학적 방법으로 자란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 실증적 검사로 분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의심하고 심지어 거부하도록 배웠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우선 그분은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해결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1:18)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14:18)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바울은 그분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1:15)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 경향이 있다.

 

 “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천년 전에 독생자 예수를 통해 나타나신 것처럼)

 오늘날 자신을 보이도록 나타내는 길은 없나요?”

 

 그렇다. 그런 길이 있다. 요한은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문장으로 그의 첫 번째 서신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저 문장(요한복음1:18)을 다르게 결론짓는다.

 ‘요한일서에선 이렇게 썼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한일서4:12)

 

  ‧‧‧ 새롭게 되는 일이 없는 선교는 위선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세상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존 스토트-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이는 하나님

예나 지금이나 신비의 문제입니다.

인류 대대로의 초자연적인 숙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중적 논법으로 증명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 다시 보이는 육신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오신 그 하나님의 비밀이자 신비를, 공생애의 삶을 통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고 또한 성령(聖靈)을 통해 깨닫고 확인한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 것입니다.

 


-말씀(Word)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14)

 


말씀곧 헬라어 로고스보이지 않는관념이나 개념이 보이는것으로 구체화된 그런 의미의 , 말씀, 를 의미합니다.

부연하자면, 1세기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플라톤이 사용했던 저 헬라어 로고스를 종교용어로 활용해서 그것을 세상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존재이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신적 정신이라고 역설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신적 정신이라는 저 철학적 표현조차도 분명하게 구별해서 성경적 언어인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실인즉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적인 문제는 영적으로만 풀립니다. 그것을 믿음으로만 풀린다는 것입니다. 해박한 이성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풀리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의 비밀이자 믿음의 비밀을 강조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63)

 


따라서 하나님의 정체성이자 본질성은 구약시대에도 보이는모습으로 선재(先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여도 구약성경은 눈에 보이듯이, ‘토라율법을 위시한 구약의 모든 계시이자 예언이자 언약 그 말씀으로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때가 되자 그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마침내 메시아가 되어 세상에 친히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존재'라는  영적 신비 곧 성령 잉태의 신비이자 '이중적 논법'의 신비가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저 사도들처럼 직접 뵈올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자 고민은 성공회 사제로 사역하다가 근년인 2011년에 9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저 석학이자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존 스토트의 문제이자 고민이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오늘날 자신을 보이도록 나타내는 길은 없나요?”라는 현대인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뭐하고 답변할 수 있을까요? ‘믿으면 안다’, ‘알기 위해 믿는다‘, 먼저 믿어라? 무조건 믿어라? 물론 다 틀린 답변은 분명 아닙니다. ’믿음이 늘 더 큰 믿음으로 인도하고, ’긍정이 늘 더 큰 긍정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니까요. 계시 및 복음의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심령의 자세, 순종의 자세,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의()‘이자 은혜이자 성령의 비밀한 도우심이 더욱 크게 나타나는구원에의 길이니까요.

그럴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 내지 종말론적 사관(史觀)에 열리면 헌법이나 형법이나 민법 등의 세상 실정법이 참 정의도 아니고, 이성이나 과학이나 인문학 등 세상 학문이 참 정의도 진리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 자체가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정의이자 진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17)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자 하나님’(요한복음1:10)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핵심요인도 그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2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의 문제이자 고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및 승천하신 후 사도들 중 세상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사역했던 저 사도 요한이나 저 현대의 사제 존 스토트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 없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믿음만을 강조하는 말이나 글이나 설교 중심의 전도 내지 선교에는 한계가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사역 노년기에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성령(聖靈)을 통해 제자들의 심령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통해 오늘도 세상에 보이는 하나님, 보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4:15~16)

 


그렇습니다.

()이신 하나님의 정체성이자 본질성은 로고스말씀입니다. 인생을 영원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정체성이자 본질성은 또한 아가페거룩한 사랑이자 이타적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문화(成文化)된 곧 기록된 성경 말씀과 구현되는 사랑은 분명히 눈에 보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또 다른 인도자이자 돕는 자이자 위로자이자 변호자인 성령(聖靈)’의 그 비밀한 인도와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난 제자들의 심령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제자들의 몸을 통해 사랑의 삶으로 오늘도 '보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또한 그럴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8:9)

 


지금 우리 속에는 정녕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현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일까요? 다만 기복을 위한 명목상의 제자삯꾼이라는 직업으로서의 제자로 살면서,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게적당히 믿고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저 자신부터 회개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미국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여권이 있어야만합니다. ‘믿음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믿음이 있어야만합니다. ‘아가페(사랑)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아가페가 있어야만합니다. 스스로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온전히알고 있는 참 제자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면오늘도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이 내 삶을 통해 절로 구현되기 마련이니까요.



사도 바울의 고백 역시 그러하듯이 과연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고린도전서13:13)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문제에 대한 제일의 답변은 아가페(사랑)의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또한 그렇게 오늘도 '보이는 하나님, 보이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언할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의 강조일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세상에 온 그리스도인 예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13: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