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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잃고 괴로워하는 여인에게
사역자가 해주어야 할 것은 그녀에게는
아직도 아름답고 건강한 자녀가 두 명이나
남아 있다는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자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간의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역자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이 잘못된 이유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을 막는 것이라 봅니다.
그릇된 가정(假定)을 삶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그릇된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우리 인간의 상태에
없어서는 안 될 상처들로 이해될 때에만
창조적으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
사역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입니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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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입니다.
저 자신도 이웃도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서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이웃의 상처나
고난이나 고통을 이해하고 그 불운 내지 불행을 창조적으로
극복 내지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부터가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하신 그 고통, 그 고독, 그 상처.
세상이나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린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는 절대고독은 인간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것은 곧 최후의 절망, 종말론적 절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인간 우리를 대신해서 ‘크게 소리 질러’ 이렇게 ‘대속(代贖)의 절규’를 토로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27:4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던가요? 신(神)은 죽었던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림이나 외면을 의미하는 것도, 사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내 뜻 우리의 뜻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침묵이자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침묵이었습니다. 어설픈 위로보다 더 심오한 사랑이었습니다. 과연 그 반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고난도 세상도 죽음도 다 ‘이긴’ 치유자이자 구원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2:18)
저는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 나오는 저 발췌문을 묵상하면서 고난과 고통의 대부이자 대명사로 통하는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의 경우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1:1)이자 ‘동방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였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그런 ’동방의 의인‘ 욥은 그러나 그 후 잔혹한 유목민족이자 약탈자인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의 습격에 의해, 이어 ’하늘에서 떨어진 불‘에 의해 소유하고 있던 가축이나 종들을 다 잃고 맙니다.
가혹한 시련이자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거친 들에서 큰바람이 일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맏아들의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던 욥의 열 명의 자녀들이 한순간에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계속되는 인재(人災)와 천재(天災)! 나아가 욥조차도 시쳇말로 ‘피부암’에 걸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통 악창이 납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마저 저주의 말을 퍼부어댑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integrity)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과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2:8~10)
그 후,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옵니다.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혀 ‘울며 자기의 겉옷을 찢고’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말없이 앉아있기만 합니다. 친구들의 침묵. 거기까지의 우정은 외려 좋았습니다. 욥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후 욥과 세 찬구들의 신앙적 내지 신학적 견해이자 변론이 이어지는 3장부터 31장까지에서 야기되는데, 당시 ‘건강한’ 세 친구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이자 의인 행세를 하면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라는 저울로 욥을 저울질하며 일방적으로 훈계 및 정죄를 합니다. 한마디로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 있더냐? 네 고난은 다 네 죄악 때문이다. 네가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에는 심은 그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고난’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보다 ‘큰 그릇’이나 ‘순금’으로 만들기 위해 허락하시는 ‘훈련과 연단을 위한 고난’이 있고, 인간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양’이 되어 당하신 ‘대속의 고난’도 있습니다. 이상이 성경에 나타난 ‘고난의 네 가지 유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저 헨리 나우엔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대개 ‘잘못된 이유’나 이해로 인해 ‘그릇된 가정(假定)을 삶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는 그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그릇된 가정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병고나 고난이나 죽음 등의 불상사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도 역시 ‘그릇된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 누구나 우환이나 고난, 재난이나 불행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도 틀릴 수 있고, 저도 실수나 실족이 잦은 죄인입니다. 오늘 건강하다는 인간 나도 너도 내일 암에 걸릴 수 있고, 장애인이 될 수 있고 갑자기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겉사람’ 곧 흙으로 된 사람의 육신은 ‘천하의인’이든 ‘천하장사’든 그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기 마련입니다. 순서가 좀 다를 뿐 누구나 필연적이자 숙명적으로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방주'를 준비하며 살았던 '노아'에게 '홍수 심판'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고 재앙도 아니었듯, 진실로 '천국'을 준비하며 살았던 사람 곧 사도 바울처럼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 사람들은 자발적 고난의 길은 물론이고 순교의 길 내지 죽음의 길조차도 되레 각오하며, 감사와 찬송하며, 기뻐하며, 의연하게 갔습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고난이나 불행을 이해하는데, 인과응보 사상이나 ‘그릇된 가정’에 빠져 함부로 훈계나 정죄(定罪)를 해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의인 욥의 고난’은 고난 당시엔 인간 너도 나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들’은 차지하고 ‘한 몸’인 ‘아내’마저도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결과적 내지 종말적으로 인간의 비참한 실존 상황에서 되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욥기42:5), 성령 체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친히 만나 부활신앙이자 영원한 생명에의 구원에 열려지는 ‘훈련과 연단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치유자’이자 고난당한 자들의 대부가 된 욥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산 소망과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스스로 잘 믿는 의인 행세를 하며 ‘인과응보의 고난’이라는 고정관념과 ‘그릇된 가정(假定)’으로 욥을 정죄했던 ‘세 친구들’은 되레 하나님께 큰 질책을 당했습니다. 저 구약시대 ‘세 친구들’의 논리나 인간 혹은 고난에 대한 이해는 아직 변화되지 못한 신약시대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한복음9:2)
과연 사도 바울의 절절한 토설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 그렇게 ‘비참한 죄인’이라는 인간 자기의 실존 그 타락한 정체성을 진실로 체득하지 못한 ‘제자들’일수록 외려 ‘유치한 독선’이나 교만이나 기복신앙적 우월감에 빠져 이웃을 함부로, 경솔하게, 판단 및 정죄하곤 합니다. 서로가 죄인이자 모두가 죄인인 인간 ‘우리’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해도 없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긍휼도 사랑도 없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이 꼭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일까요? 꼭 인과응보의 불행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을 직접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구걸하며 연명하던, ‘날 때부터 맹인’된 작은 이웃의 고난과 운명에 대한 이해와 긍휼이 지고한 ‘하나님의 안목’에서 발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과거적 인간 이해'나 고난 이해와는 전혀 다른 '미래적 인간 이해'입니다. 저 주님의 답변에 나타난 비전은 인과응보의 고난이냐, 훈련과 연단을 위한 고난이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냐, 그런 신학적 교리적 개념이나 분류도 아니고, 특정 이념이나 ‘그릇된 가정’에 의한 변론이나 정죄도 아닙니다.
설령 '부모의 죄'나 '자기의 죄' 때문에 불행한 '맹인'이나 '탕자'가 되었다 쳐도, 불행한 그 고난 및 가난의 와중에 있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타자도 ‘그릇된 가정’이나 사상이나 세상 이념(理念) 등의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될 절대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과 긍휼을 구하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려는 이해와 노력이 절대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비전은 주어진 그 모든 실존적 비참이나 곤고함을 통해 되레 영안(靈眼)이 열려 인간 자기의 태생적 죄인 됨과 비참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구원의 명제 그것입니다. 가출했던 ‘탕자(蕩子)’처럼 밑바닥 ‘돼지우리’에서 되레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고, 겸허하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명제 그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인간의 고난을 그렇게 ‘하나님의 안목’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서 그 당사자를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리는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어야한다는 명제 그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병자’에겐 부귀영화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운명의 늪에 빠진 ‘죄인’에겐 유식한 학자나 군자나 수행자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오직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불학무식한 거지였지만 자기의 정체성이 ‘비참한 죄인’임을 ‘비참한 운명’을 통해 되레 절감했던 ‘맹인’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만나 그 은혜를 입고 육안까지 열리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그 역시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갚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저도 우리도 지난날 다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아무쪼록 그런 저나 우리도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 이웃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릴 수 있게 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릴 수 있는 상처 ‘이긴’ 치유자,
고난 ‘이긴’ 치유자, 세상 ‘이긴’ 치유자가 될 수 있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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