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에는 항상 단수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는 말에는
‘내 시간이 주의 손에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의 시간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그것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온전히 드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교제!
얼마나 거룩하고 복된 일입니까!
그분의 형상을 닮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능력 있게 섬기는 것!
이 모든 게 단 하나의 조건 아래 묶여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과 그분의 생명에
참예할 수 있도록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 빛과 열기를
비출 수 있도록 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달려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
주지하다시피 지난 주,
6월 12일에 싱가포르에서 적대관계였던
북·미 정상이 만나 역사적인 악수를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 공존의 질서가
저 ‘정상들의 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세상 매스컴은 분명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나 미래가 정작 저 ‘정상들의 손’에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내 시대, 내 앞날’도, ‘우리 시대, 우리 앞날’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증언 및 확언하고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개역성경, 시편31:15)
저 말씀이 ‘개역개정(改正)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나의 앞날(my times)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31:15~16)
다윗 왕이 노년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며 쓴 저 ‘시편’에 나오는 ‘시대’ 곧 히브리어 ‘에트’는 ‘시간, 시대’를 의미하지만 또한 ‘운명, 기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 운명, 내 기회’가 ‘주의 손에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고, ‘한반도의 운명, 한반도의 기회’가 ‘주의 손에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패권이나 핵무기 등을 가진 당대 국가의 ‘정상들’일 것 같아도, 인류의 역사는 동물의 역사나 그 밀림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또한 달라야만 합니다.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내지 인류에게 성별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공의 그 사랑의 말씀을 계시해주신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進化)되었다는 ‘학설’이 과학이자 진리이자 신(神)처럼 행세하는 이 시대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는 저는 ‘대학자 찰스 다윈’이라고 해서 이른바 ‘수백만 년’ 전의 화석을 온전하게 분석해서 진화과정을 확증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진화론’ 역시 다만 하나의 ‘학설'이자 ‘가설’이자 ‘가정(假定)’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현대의 이른바 ‘첨단과학’이나 ‘첨단의학’으로도 인체내부조직의 메커니즘이나 희귀질병의 원인이나 치유법을 온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계가 있는 그런 과학이나 학문으로 ‘수백만 년’은 차치하고, 천년 된 화석과 만년 된 화석의 차이나마 온전히 분별 및 분석해서 이른바 ‘진화의 과정’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문외한인 저의 과문 내지 맹목 때문일까요? 저는 그 자체부터 왠지 회의가 듭니다.
각설하고,
내 시대도, 내 앞날도, 내 운명도, 내 기회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의 시대나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나 운명이나 기회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절로 하나님께 기도 및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렸던 저 앤드류 머레이 목사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 역시 그러면서 저렇듯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던 것이겠지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저 개인의 앞날이나 운명도, 남북 간 한반도의 앞날이나 운명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먼저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정상들을 포함한 인간 우리 모두의 ‘심령을 통찰하시는 분’이자 그 심령을 때론 완악하게 때론 온유하게 간섭 및 섭리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때론 악한 백성에겐 악한 통치자를 허락하고, 타락한 백성에겐 타락한 통치자를 허락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겐 어리석은 통치자를 허락해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해방’이라는 소명을 하나님께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상’일 수 있는 ‘선지자 모세’와 애급의 ‘바로 왕’이 ‘정상회담’을 할 때, ‘마음이 완강해진’ 바로 왕은 그래서 모세의 ‘출(出)애굽’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한사코 거부합니다. 바로 왕의 마음이 ‘완강해진’ 그 자체가 바로 왕 자기의 임의적 의향인 것 같아도 그것은 실인즉 그렇게 교만을 부리도록 ‘내버려둔’ 하나님의 심오한 간섭이자 섭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miracle)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출애굽기10:1~2)
바로 왕의 ‘마음이 완강해질수록' 그래서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심하지도 않을수록, 애급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응징이자 ‘표징’인 ‘이적'은 되레 가중됩니다.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黑暗) 재앙’ 등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의해 ‘바로의 장자’와 모든 애굽인과 가축 등 ‘처음 난 것’이 ‘밤중’ 한순간에 다 죽어버리는 재앙이 그것입니다. 장자를 잃은 바로 왕은 두 손을 들고 맙니다. 다급해진 바로는 ‘그 밤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 출(出)애급을 승낙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보낸 후에’ 바로는 다시 ‘마음이 변하여’ 저 심야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파기하고, 저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직접 애급군대를 이끌고 추격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출애굽기14: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왕의 저 추격은 그와 그의 중무장한 군대를 외려 자멸의 길, 죽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자 현재적 심판이었다는 그것입니다.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과 도우심에 의해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지만’, 추격하던 바로 왕과 그 군대는 죄다 그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으니까요.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에 내밀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애굽기14:28)
아무쪼록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저 애급 바로 왕의 전철(前轍)을 반면교사 삼아, ‘마음이 완악해져서’ 스스로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교만이나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나님은 종말적으로 저 다윗 왕의 ‘시편’에서 이어지는 고백처럼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하게 갚으시는’(시편31:23), 심판과 역사의 참 주체이자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성찰해야 할 절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고집하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이 완악하도록’ 내버려둔 실상인즉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시대, 우리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과 함께 먼저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절대 필연성 역시 거기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에 달려있고'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 내지 대화, 그 소통의 관계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에 대해 기쁘게 ’응답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니까요.
‘세상의 떡’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진실한 자’의 삶에 하늘의 참 복이 있는 이유도 과연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와주셔야만 ‘내 시대, 내 앞날’에도, ‘한반도의 앞날’에도, 진실로 복이 있는 하늘의 참 보화와 생명과 평화가 ‘백두산과 한라산의 단비’처럼 비로소 위로부터 내려오기 마련이니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call),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33:3)
'한 오멜의 영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순교자', 본회퍼 (0) | 2018.07.02 |
---|---|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알고 있는 대답' (0) | 2018.06.25 |
'상처 입은 치유자'를 위하여 (0) | 2018.06.11 |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하나님' (0) | 2018.06.04 |
존 베일리의 '아침기도'와 '주기도문'의 삶 (0) | 2018.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