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순교자', 본회퍼

이형선 2018. 7. 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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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그리스도의 승천(昇天)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임재(臨在)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동시대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가 땅에 있을 때, 그는 우리로부터 멀리 있었다.

  지금 그는 우리에게 멀지만 그러나 가까이 있다.”

 그것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분만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지, 단지 역사 안에 있는 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인) 리츨과 헤르만은

 부활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슐라이어마허는

 그것을 상징화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교회를 파괴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15:17)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임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임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예수는 참 인간이다라는

 진술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예수는 참 하나님이다라는 진술을 요청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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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이후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독일의 양심본회퍼.

그는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 히틀러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37세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가 39세에 처형당한 순교자입니다.

본회퍼는 시쳇말로 금수저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 국립병원장을 지냈었고,

그의 삼촌은 베를린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이었으니까요.

 


따라서 그는 사회적 기득권이나 배경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제국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를 찬양하며 제국 사상의 전도자로 살겠다고 전향만하면 죽지 않고 되레 대접받으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의한 삶보다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증인으로 죽는 삶을 택했습니다.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순교자본회퍼의 삶이나 한국초대교회 순교자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늘 도전을 주는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저분들의 신앙양심그 모범이 너무 세속화된 오늘의 기독교 신앙풍토의 부끄러움 내지 어두움 내지 타락에 늘 빛과 소금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본회퍼가 순교자 본회퍼가 될 수 있었던 그의 기독론의 출발점그리스도 이해의 출발점의 핵심을 다시 좀 묵상해봅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일반사람들도 역사적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인간 예수가 로마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까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해서 대개가 역사적 예수,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와 공자와 같은 ‘4대 성현(聖賢)’ 중 한 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존경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그런 이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신을 가진 우리의 인생은 의외로 난해합니다. ‘생로병사라는 한계를 살다가는 인생 우리의 금세와 내세에 대한 운명이나 존재의 문제는 역시 그렇게 허무한 생물학적 한계를 살다가는 특정 성현의 철학이나 도학이나 윤리도덕의 이해나 존경에 의해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십자가의 예수, 역사적 예수’,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역사적 소크라테스에서 끝나면 그것은 의로운 학문이나 선한 윤리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타자인 내 인생을 참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영원한 진리이자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도, 본회퍼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분만이 살아있는 인격의 임재를 가능하게 한다고 강조 및 변증했던 것입니다. ‘참 인간으로 죽은 후 인생 우리 모두의 숙명인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한 존재이자 승천(昇天)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음으로써 참 하나님으로 증명된 존재가 비로소 금세와 내세에 걸친 인생의 참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시대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면, 동북아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저 근동 이스라엘의 예수를 직접 뵐 수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이자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천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바람처럼 우리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영적 임재(臨在)하는 하늘의 비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금세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참 구원과 생명의 길이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19:30)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를 가진 인생 우리는 늘 보이는 인간 예수와 함께 살고 싶고, 보이지 않는 축복보다는 보이는 인간 예수의 왕좌 좌우편에 앉아 현세적 축복을 늘 풍성하게 받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12제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내가 떠나리라, 내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으리라는 말씀만 하면 금세 근심 걱정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세상에 잡아두려고, 육신 안에 잡아두려고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과는 다른 그리스도 이해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Counselor)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16:)

 


과연 저 보혜사곧 우리를 돕는 자진리의 성령그 영성의 비밀에 밝히 열려지는 거기에 진실로 유익한 실상이 있습니다. 거기에 세상을 능히 이기는능력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인 내가 너희에게 보내서오늘도 바람처럼 우리 개개인의 심령과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은 임의로 말씀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그것이자 내 영광을 나타내며,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린다는 그것입니다.

 


우리를 유식한 미혹으로 인도하는 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특정 교주(敎主)자기(自己)복음같은 그것이나 그들의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구약시대 모세나 다윗 왕의 영광 같은 그들의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는 것조차도 아닙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종인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되,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는 진리의 성령의 비밀이자 말씀의 비밀을 바르게 분별하는 자가 참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그런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자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기(自己)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고 의연하게 순교의 길을 갔으니까요. 그렇게 내 증인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 그가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my witnesses)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마지막으로 주신 저 말씀에 나오는 증인곧 헬라어 말투스순교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계시록순교자를 의미하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 순교자(martyr)’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저 말투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순교자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그리스도(Christ)’같은 성질, 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데, 과연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질이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본회퍼의 역설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닌 타인을 위한 존재인데, 오늘의 교회는 과연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른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대기업 유형의 스타 목회자부자 바리새인이 선망과 영광의 대상이 된 시대의 교회나 사회는 그래서 불행합니다. 자기의 세상소유나 세상영광이 자기를 되레 구속(拘束)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디모데후서3:) 말세현상으로 인도하여 비인간화시키기 때문에 피차 불행합니다.

과연 배부른 번영신학이나 대형건물 짓는 것이나 스타 목회자가 되는 그 모범 그 자체가 참 성령의 역사도 아니고 참 권능의 역사도 아닙니다. 참 성령과 참 권능의 역사는 이 땅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순교자가 되는 삶그것입니다. 진실로 그 자체입니다. 주종(主從) 관계나 참 푯대내지 가치관의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 이기적 복음이나 도그마에 미혹, 세뇌되어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순교자적 삶을 사는 교회나 목회자를 비판하며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심 없는 헌신의 삶앞에서는 탐욕이나 사치도 제물에 부끄러워 말문을 닫기 마련입니다. ‘머리 둘 곳 없이살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나 사도들 앞에서, 세상을 사는 저나 우리의 상대적 가난이나 고난이나 불운은 결코 대수도 아니고 축복과 저주의 상태도 가치도 아닙니다.

()도 유식한 신학도 없었던 초라한한국초대교회였지만 그래도 사회의 희망과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한마디로 순교자의 삶, 순교자적 삶을 오로지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고자했던 진실한 노력이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절감할수록 손과 발에 진실로 이타적인 헌신의 못 자국하나 없는 저 자신부터가 부끄럽습니다. 남들에게 되레 신세만 더 많이 끼치며 살아왔다 싶어 정말 부끄럽습니다. 성령께서 더욱 깨어 회개하라고, ‘회개에 합당한 삶이자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주시는 자괴감이겠지요.

저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순교자의 삶을 본받아 보다 바르게, 보다 선하게, 보다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통해 임박한 순교의 때를 지레 깨닫고 그 죽음에 대한 준비이자 죽어서 되레 사는 준비를 잘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했던 본회퍼가 거기서 깨달은 실상의 고백을 또한 묵상해봅시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기 전에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의 죽음은 실상인즉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가는 문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