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고통이라는 모습 아래 숨어계신 예수님'

이형선 2018. 7. 9. 10:59



       ▣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당신의 호의와 사랑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당신이 진정으로 그들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고통이라는 모습 아래 숨어계신 예수님이십니다!


   *  

 

 나는 우리 수녀님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는 절대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언젠가 한 수녀님이 침울한 표정으로 발을 무겁게 끌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수녀님을 사무실로 불러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그 분 앞에 서거나 그 분을

  따르기 위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는 아름다운 방에서가 아니라 골고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가면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분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

 

 

 

      

      

       ▣

 

 

 



평범한 서민인 우리가 내일 청와대 오찬

혹은 재벌 회장이나 저명한 사회인사와의 오찬에

초대받아, ‘귀하신 분(VIP)’을 만나기로 했다 합시다.

아마도 소년시절 소풍가기 전날처럼 기뻐서, 행복해서,

맘이 설렐 것입니다. 두어 번 자다가 깨어 밤하늘을

쳐다보며 행여 비라도 올까 싶어 걱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적으로 작은 자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을 때, 우리의 마음이나

자세는 저 기쁘고 설레는 마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상대적 약자에겐 외려 갑질을 부리며 함부로 대하기

십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사람도 사람 나름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해타산에

빠른 인생 우리의 간사한 마음때문일까요?

 


스스로 신령하다는 어떤 자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기는커녕 되레 악령사탄에 들린 사람으로 보고 이해하며, 그 앞에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함부로, 무분별하게, 대갈하기도 하더군요. 가난한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 속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 마더 테레사와 저들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을 보고 대갈하는 사람 중 누가, 어떤 사람의 이해나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누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그리스도인이자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일까요?    

 


-심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태복음18:10)

 


그렇습니다. 그것이 작은 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이해이자 믿음입니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것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감히 업신여기는 행위가 됩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인간 그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개개인의 수호천사를 통해 인격적 관계와 관심을 가지는 ()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를 학대하면 그 부모를 직접 학대하는 것보다 되레 더 큰 가증행위가 되어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됩니다. 그래서 가학교사는 물론이고 어린이집자체마저 문을 닫아야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교회도 여타 공동체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 오늘 우리시대의 작은 자소외된 자들에 대한 인격적 올바른 이해와 접근은 그래서 중요한 명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나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등을 포함해서,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역시 사탄에 들린 사람이 스스로 신령한 사람처럼 혹은 무당처럼 행세하며 상대적 작은 이웃에게 함부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대갈하거나 갑질을 부려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금식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마태복음4:), 오직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먼저 자기 속의 사탄을 물리치신 것처럼 악령의 시험에 대한 문제는 먼저 내 속의 사탄을 물리치고자 내가 근신하고 깨어,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할문제이지 남들에게 함부로 대갈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5:)

 


따라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포함한 인간 나와 너의 속에 숨어있는 사탄보다는 그것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숨어계신 예수님을 먼저 볼 수 있는 영적 이해와 인간 이해가 필요합니다. 저 마더 테레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 개개인 모두의 절대 명제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그것은 내 정체성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대 앞에서 양인가? 염소인가?’에 대한 구분 내지 판정 그 자체의 절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마태복음25:)- 주님께선 오른편 양들이자 의인들에게 지난날 내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돌봐줘서 고맙다예비 된 나라천국이라는 영생(永生)이자 영복(永福)을 주십니다. 물론 양들은 주님을 직접 돌봐드린 적도 없었고 대접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임금곧 주님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


그렇게 심판 및 구별하신 주님께선 저들 의인들은 영생(永生)으로 들어가게하시고, 왼편의 염소들이자 저주를 받는 자들에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시고 이들은 영벌(永罰)에 들어가게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기준은 부나 권력 같은 세상 소유나 그 성공 여부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유식한 자냐, 무식한 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문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대속(代贖)의 비밀을 믿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내지 이웃을 섬기는 사랑이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랑이 된다는 저 말씀의 비밀이자 양자일체(兩者一體)의 비밀을 또한 믿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편,

염소들그러니까 실상인즉 사탄에 속했던 자들그래서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25:41)는 종말적 심판을 받은 자들은 억울하다 싶어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을 범하지 않고 잘 지킨 사람들입니다.

 다만 작은 이웃들에게 무관심했을 뿐이지요. 그게 어떻게 저주받을 정도의 죄가 됩니까?

 저희들을 지옥으로 보내시다니요?!”

 

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인즉 이럴 것 같다 싶습니다.


그 작은 이웃들이 바로 나였느니라. 너희들은 나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고통 받는 이웃에게 다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발적 선을 행하지 않은 그것이,

 피차 병든 죄인이면서 서로 긍휼히 여기며 살지 못한 그것이 죄이자 악이니라.”

 


실인즉 양과 염소는 생김새가 엇비슷합니다. 해서 저는 오른편의 양들이자 의인들’, 저들의 삶 그 의로움이나 선함이 왼편의 염소들보다 하늘만큼 더 크고 높고 거룩해서 천국의 축복을 받은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부족한 죄인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살았기에,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자 전적 은혜를 입고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서로의 유식함도 의로움도 거룩함도 차라리 도토리 키 재기이니까요. 상대적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              

 


따라서 그럴수록 지극히 작은 자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 네 고통 내 고통을 포함해서 고통이라는 모습 안에 숨어계신 예수님‘, 저 영성의 비밀에 열리는 그 자체가 진실로 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싶습니다. 그래서 또한 마더 테레사는 우리 수녀님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에는 절대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겠지요.

숨어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 앞에 기쁘게다가가지 못하는 수녀라면 진실로 그리스도와 영적 결혼한수녀는 아닐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실로 그리스도께 속한그리스도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부터가 나환자를 비롯한 각색 더러운 병자나 죄인들 속에서 살다 가신 분이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연 귀빈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방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골고다에 있습니다.’ ‘해골, 두개골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역 밖에 있는, 종교적 기득권이나 세상 부귀영화 그 바깥에 위치한 차라리 저주 받은 땅이자 처형의 언덕입니다. 치욕과 죽음의 그림자가 산재한 아웃사이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대개가 다 기피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는, 참 십자가는 예나 지금이나 되레 거기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 오늘 우리의 몫인 자기 십자가도 오직 거기 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바벨탑정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이나 부자나 명사 등 지극히 큰 자귀하신 분이나 그들의 필드나 당신들의 천국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구별해둡시다. 성경은 결코 저들 지극히 큰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물론 남달리 노력해서 정당하게 이룬 세상 성공 그 신분이나 소유나 명예 자체가 죄나 허물이 되는 것은 아니고 폄하의 대상도 아니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 내지 돌봄이 없는 인간 자기중심의 세상 성공은 저 염소의 삶처럼 그 결국이 다 허무하고 무익했습니다. ‘천국의 참 행복과는 거리가 먼, 동물처럼 허무한 삶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양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염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배부른 시대가 되어갈수록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며 양의 길을 간 마더 테레사의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가면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분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