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심령의 '빨래'와 심령의 '부자' 사이

이형선 2018. 7. 2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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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도 지워지지 않는 때

 물속에 넣어 불린다네

 

 아무리 고백하여도 남아 있는 죄

 사랑의 물속에 불린다네

 

 비비고 구기고 방망이질하여도

 삶고 접고 돌이질 하여도

 

 그래도 남아 있는 검은 얼룩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죄의 자죽이여.

 

 뜨겁게 내려 쪼이는 햇살아래

 두팔 벌리고 빨랫줄에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의 찢어지는 아픔을 보았네

 

 아, 나는 비로소 표백되었다네-

 

                     

                          -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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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흰옷을 해 입었는데 어디선가 묻었는지

기름때 같은 것이 묻어서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물속에 표백제를 넣고 하루쯤 담가 불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러운 얼룩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우리 속에 때처럼 끼어 있는 죄. 우리 안에 얼룩져있는

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성찰하게 했다.‘

 


사울이 개명해서 작은 자바울이 되었던

연유에서일까요. 본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평소부터 작은 잎(小葉)’이라는 그 이름이 퍽 인상적이고

좋다 싶었던 시인 김소엽(金小葉) 교수.

그분의 저 시 빨래를 하며’(全文)와 거기 부연된 시작노트를

다시 읽어본 후, ‘내 옷, 내 몸의 때와 얼룩 그리고

내 속사람, 내 심령의 때와 얼룩의 상태는 과연 어떨까?

그렇게 자문하며 저 역시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해보았습니다.

 


실인즉 흰옷을 입으면 자그마한 때나 얼룩조차도

금세 눈에 띕니다. ‘검은 옷을 입었을 때는 전혀 둔감했거나

개의치 않았던 사소한 언행(言行)의 더러움마저 금세 발견됩니다.

그래서 양심 내지 속사람이 흰옷을 입은 사람이 되어갈수록

내 노력, 내 수행만으로는 결코 때나 얼룩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내 한계를 또한 절감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때고 얼룩이고 더러움이고

자시고 상관하지 않을 수 있어 활동적으로 편리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차라리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겉옷의 원색일 수는 있어도, ‘속옷의 원색은

분명 아닙니다. 인간 심령의 본래적 색깔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scarlet)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crimson)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이사야1:18~20)

 


그렇습니다. 심령의 원색은 눈과 같은, 양털 같은희색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령의 원색은 청결한, 순결한흰색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저 말씀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색깔은 희색진홍색입니다. 검정색은 흰색의 반대의 색깔이지만 적대(敵對)의 색깔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홍색, 진홍색은 적대의 색깔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불순종의 로 얼룩진 색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심령이 이미 진홍색으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죄악이나 허물이나 더러움이나 사악함 자체에 둔감하고 그래서 안일했습니다. 자기들의 현재 상태가 죽음을 앞둔 죄인이자 멸망을 앞둔 왕국이라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자 위중한 시국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변론하자곧 재판용어인 히브리어 야카를 사용해서 현재 상태를 법적으로 저울질해보자고 먼저 제안 및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기회의 부여이자 은혜의 부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일개 작은 자처럼 혹은 일개 작은 잎처럼 겸손하게 나아가 자기 심령 내지 죄악의 위중함을 깊이 회개하면 살 수가 있었습니다.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으며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기회이자 은혜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아시리아와 바벨론제국의 칼에 삼켜지고말았습니다. 그렇게 남북 왕국이 다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이자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심령의 색깔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요?

검정색? 빨강색? 그 농도는 또한 어느 정도일까요?

기왕지사, 과거지사는 하는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시인처럼 과연 내가 비비고 구기고 방망이질하고 삶고 접고 돌이질한다고 해서 본래적 흰옷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식한 현대의 문화나 첨단 문명의 표백제를 쓴다고 해서 흰옷이 되는 것도 아니고, 히말라야의 수도승처럼 고행한다고 해서 흰옷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간이 절망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신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도리어 저 모든 인간 나의 노력에 철저하게 절망할 때,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비참한 사람이로다!”(로마서7:24)라는 인간 나의 한계를 통감 및 절감할 때 비로소 십자가 대속(代贖)의 비밀에 열려지게 됩니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타락이 곧 나의 타락이 된 것처럼, ‘골고다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영성의 비밀에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2:20)

 


실로 그렇습니다. 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있는 변론내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주홍 같은, 진홍 같은죄인임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에게 십자가 대속의 비밀이 열립니다.

재삼 주목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그것입니다. 저 사도 바울의 고백이자 증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삽니다.’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표백흰옷을 입은 참 인간이자 참 부자로 가치 있게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심령이 청결한 흰옷을 입었다 해서 그것으로 참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현실은 또 다르다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관 내지 가치관의 문제이겠지만, 그러나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空手來空手去)’ 여정은 분명 인생 공통의 길이자 숙명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보다 영원한 하늘을 보는 자가 참 부자라는 의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과 도우심을 받으며 사는 자가 참 부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5:8)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람들은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실속이나 이해타산이나 탐욕이나 남다른 소유욕을 위해 경쟁하거나 거기 연연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런 성취나 소득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도 축복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여유나 평안이나 기쁨을 가지고,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심(物心)을 되레 이웃과 조용히 나누며 기꺼이 미련한 자바보가 되어 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미련한 바보라고 말하는 아무개가 혹은 사도 바울처럼 환난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궁핍 안에 있는 자가 실인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自足)의 삶’(빌립보서4:11)을 살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그 어떤 부자나 권력이나 학자보다 외려 더 큰 부자이자 현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족하는 사람보다 더 큰 부자는 없으니까요. ‘안식(安息)’보다 더 큰 자산도 없으니까요. 분명하게 구별해둡시다. 그것이 신약성경전체에서 주님과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참 부자의 상()이자 모델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富饒)자니라.-(요한계시록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를 통해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신 말씀인 저 부요한곧 헬라어 플루시오스는 재물이나 재산 등이 부한, 부요한, 풍성한의미의 형용사이자 부자라는 명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실상은 네가 부자라는 칭찬이 됩니다. ‘실상은 네가 참 부자라는 것입니다.

비교적 내지 상대적 의미에서, ‘부자 청년영원한 생명을 얻고자예수께 직접 찾아오기까진 했으나 재물이 많아서되레 근심하며 떠나간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도 다시 들어봅시다. 이 말씀에 나오는 부자라는 명사 역시 저 플루시오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19:)

 


저나 우리는 저 부자 청년서머나 교회중 진실로 어느 쪽에 속한 사람들일까요? 어느 쪽 인생의 가치관을 진실로 선망하고 갈구하며 사는 사람들일까? ‘지극히 비현실적인예수나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보다는, 되레 지극히 현실적인 부자가 되고 싶어 거기 목을 매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예수 이름으로그렇게 천민자본주의식 성공이나 번영을 후배 내지 후손들에게 가르쳐왔고, 가르치고 있는 교회인 것은 아닐까요?

 


실상인즉 그렇다면 우리는 남의 빨래를 탓하기보다는 서둘러 내 빨래부터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천국영성의 비밀도 현존이자 세상 현실이자 실존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확실하면 믿으면서부터, 진정으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의 신앙은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스스로 배부른자만 내지 교만에 빠져 되레 영안(靈眼)이 어두워져 남아 있는 검은 얼룩, 지워지지 않는 죄의 자국을 보지 못한 그 자체부터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저 시인처럼 빨랫줄에 거꾸로 매달려봅시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에서 배운 차라리 영악한 기존의 지혜나 지식이나 가치관을 분별 및 성별해봅시다. 자원해서 미련한 자바보처럼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바라다봅시다. ‘십자가의 찢어지는 아픔이 보일 때까지 그래서 , 나는 비로소 표백되었다네라고 신앙고백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나아가, ‘참 부자의 표상이자 모범인 사도 바울의 이런 고백이 또한 진실로 나의 고백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