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참 인간이 되신 말씀'의 '재창조' 사역

이형선 2018. 7. 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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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창세기를 여는 말과 유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말씀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한다.

 “처음에 그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도 그 말씀과 함께 있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은 첫날부터

  하나님을 위해 준비된 말씀이었다.”(요한복음1:1~2)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인격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용서와 심판,

 자유와 깨달음, 자비와 은혜, 기쁨과 사랑, 자유와 부활이

 생겨난다. 망가지고 타락한 모든 것과 죄악 되고 병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구원을 얻는다.

 

 왜냐하면 첫 창조 이후에 어디선가 일이 잘못되었고

 (창세기는 그 이야기도 전한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잡는 일 역시 말씀하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인격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 정도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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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 영성신학의 거장이자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잘 알려진 유진 피터슨.

그가 그의 저서이자 성경번역서인

메시지(The Message) 신약요한복음 머리말

서술한 저 발췌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저 단상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에 대한 집약이자

핵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를 여는 말과 유사하게 하려는

사도 요한의 그 의도창조하시는 하나님중심으로

우리 역시 구약성경 창세기에 다시 주목해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created).-(창세기1:1)

 


창조하다곧 히브리어 바라무에서 유를 창조하다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언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지혜를 받아 저 말씀에 각별히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어떤 기묘한 물질이나 아메바나 박테리아 같은 세포나 세균을 이용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말씀으로창조하셨다는 성경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에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하나님은 말씀이르시되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God said),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1:2)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으로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나 고도로 상징적이자 은유적인 창세기의 비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장()이나 절()은 후대에 들어 분류된 것이지만 여하간 ‘2에는 인간 창조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의 부연이 있습니다. 그 연유는 인간의 이중적 정체성에 대해 주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2:7)

 


따라서 총론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보다 디테일한 각론에 들어가면, 인간은 땅의 흙생령(生靈)’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과 육()’ 속사람과 겉사람의 창조인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질인 땅의 흙하나님의 영이라는 이중인자(因子)를 가진 인간 우리는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과 물질(財物)’ 혹은 순종과 불순종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실인즉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부터가 그렇게 오락가락거리다가 사탄이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아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또한 먹지 말라. 먹으면 네가 죽으리라말씀으로 식용을 금하신 열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창세기3:6)를 되레 따먹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 곧 참 하나님을 아는 참 인간으로 낙원(paradise)’에서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우리의 인생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으로 악령을 이기지 못하고 되레 악령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말씀으로 육()을 이기지 못하고 되레 육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말씀보다 먼저 선악과을 구하다가 되레 낙원을 잃고만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우리는 자범죄(自犯罪)는 차치하더라도, 조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대물림되는 원죄(原罪)에 의해 태생적 정체성부터가 타락한그래서 허무한 죽음의 길을 가는 죄인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것이 또한 고도로 은유적 내지 계시적 내지 추상적으로 기록된 창세기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핵심 메시지입니다. 초자연적 창조비화나 편집성 여부 등에 집착해서 그 신뢰성에 대한 이성적 회의나 비평학적 접근이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면, 그것의 핵심 메시지는 오직 하늘입니다. ‘하늘은 보지 않고, 동양인의 손가락이냐, 서양인의 손가락이냐? 사실화법의 손가락이냐, 추상화법의 손가락이냐? 그런 식의 비평학적 이해나 접근이 정작 중요한 지혜나 지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불순종한, 그렇게 거역한, 아담과 하와는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는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영적 교제 및 소통하는 천국이자 하늘의 참 행복을 잃어버린 관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심령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 유진 피터슨의 표현 그대로, ‘첫 창조 이후에 어디선가 일이 잘못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을 일이 절실하게 필요해졌던이유입니다. 보통 잘못된 게 아닙니다. 치명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순전한 희생양이라는 대속물(代贖物)’이자 참 인간둘째 아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첫 창조 이후에 어디선가 일이 잘못되었고

 (창세기는 그 이야기도 전한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잡는 일 역시 말씀하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인격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 정도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렇습니다.

바로 잡을 일 역시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창세기’, 저 태초부터 선재(先在)하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세상에 오신 분 곧 참 인간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영과 말씀 안에서 거듭나는 구원재창조차원에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주목한 사도 요한은 그래서 신약성경 요한복음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Word)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당시 범문화권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이지만 그러나 저 말씀로고스플라톤의 로고스내지 철학적 로고스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개념을 인위적 내지 이성적으로 형상화시킨 그런 , 말씀,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유진 피터슨의 언급처럼 창세기를 여는 말과 유사하게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먼저 소개한 후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짐짓 고도의 신학적 어법으로 기술한 것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재창조사역에 대한 각별한 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재창조 차원의 구원이 불가능한 로고스는 실인즉 무익한 철학적 로고스에서 그칠 뿐, 사도 요한이 의도로고스의 진정한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4)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언하신 재창조사역

나를 먹는 그 사람을 다시 살리는말씀의 비밀을 다시 들어봅시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친히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영()이자 생명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나 그것을 번역한 저 유진 피터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입니다. 그렇게 태생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우리 인생 자체를 바로 잡는 일구원이라는 재창조사역이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4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루신수많은 초자연적 기적들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당시 불치병이었던 나환자들이나 각색병자들은 물론이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악취까지 풍기는 나사로를 비롯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기도 하고, 바다 위를 걷기도 하고, 폭풍이나 풍랑조차도 말씀으로잔잔하게 하십니다.

죄다 그것을 목격했던 제자들이 증언한 내용입니다. 종교 사기꾼이나 모리배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죄다 처참한 순교의 길을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해서 저 사도들의 사심 없는 증언은 진실이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법이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말씀으로 이루신예수 그리스도의 저 모든 초자연적 기적들이 의미하는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초자연적 기적들을 행했던 선지자 모세를 위시한 여타 선지자들이나 성현들이나 종교교주들과는 달리, 죽음조차도 이기고 부활까지 했던 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증명 및 선포하는 진정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무엇일까요?

그분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언어이자 인격적 표현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그것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거듭나는진정한 구원도 재창조도, ‘낙원내지 천국의 회복도 다 거기서 좌우되기 마련이니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한복음14:9~11)

 


아무쪼록 저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자 말씀그 자체이신 저 그리스도의 비밀을 반석처럼 믿고, 곤고하고 허무한 인생의 태생적 멍에나 운명으로부터 거듭난, 진실로 재창조차원에서 거듭난 새것, 새로운 피조물이 다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살아도 세상을 이기는 천국에서 살고, 죽어도 죽음을 이기는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그럴 것이 '새것'으로 재창조된 사람 마음의 눈에는, 천지도 자연도 어려운 환경이나 여건도 다 낙원이나 천국처럼 '새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사도 바울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