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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바다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밥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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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리긴 했지만
팝가수가 ‘노벨문학상(2016년)’을 받은 것은
의외이자 초유의 이변이기도 했기에 각별히
주목을 받았던 유태계 출신의 미국인 밥 딜런.
‘전통가요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가 20대 초반의 청년이던
1962년에 작사 및 작곡했다는 저 노래,
‘바람만이 알고 있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은 잘
알려진 대로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노래이지만,
한편으론 구도자(求道者)의 시일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저는 구도의 시각에서 저 노래를 좀 음미해보고 싶습니다.
저기서 밥 딜런은 먼저 ‘존재의 문제’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인간, 한 사람의 진실한 인간에 대한 희구 그것은 곧 ’구도자(seeker of truth)‘의 희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12:1)는 지혜자 솔로몬의 체험적 인생고백이자 신앙고백처럼, 그것은 과연 '청년의 때에' 먼저 고민해야 할 진실로 가치 있는 숙제이자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보다 더 많고 높은 부나 권력이나 출세나 ‘포탄’을 차지하는 ‘소유의 문제'나 종말적으로 '헛되고 헛된' 세속의 그 모든 가치관이 우선의 명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를 고민하며 희구했던 저 청년 ’구도자‘는 그 구도의 길 내지 여정에서 이런 명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말을 바꾸자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발견에의 희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제이자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 간에, 집단들 간에, 이념들 간에, 국가들 간에, 패권을 위한 무수한 ‘포탄’이 수시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 내지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나마 잠들기를 원하지만 그런 ‘평화’나 ‘안식’은 인간이나 세상 이념에서 나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저 가수 밥 딜런이 예나 지금이나 그 참 ‘대답’을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물론 20대 초반 그맘때는 저도 그랬지만, 저보다 인생선배인 저 밥 딜런도 그 ‘대답’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 주먹’이나 ‘포탄’이 행세하는 세상이자 꿈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허무하도록 무더기로 죽어가는 세상에서 느끼는, ‘신(神)의 존재’ 내지 ‘진리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밥 딜런은 구도적인 자기의 그 숙제이자 명제를 섣불리 부정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그 희구에의 가능성을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라는 긍정적 미래형으로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희구에 대한 대답, 구도자에의 ‘대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대답을 ‘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 참 대답이 ‘바람 안에(Blowing In The Wind)’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 길’이라는 인생의 여정을 가는, 구도의 여정을 이제 시작하는 젊은이로서 그것은 되레 겸손하게 열려진 자세이자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그런 삶의 자세는 구도의 여정이자 지향 푯대가 저 ‘바람’으로 되레 분명해졌고 거기서 인생의 명제에 대한 대답이자 정답을 구하고 배울 수 있다는 미래적 자기 희망이자 비전 그 자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시 주목해봅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wind)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Spirit)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3:7~8)
저 말씀에 나오는 ‘바람’과 ‘성령’이 헬라어 원문에는 동일한 단어인 ‘프뉴마’로 되어 있습니다. ‘프뉴마’가 곧 ‘바람, 영, 성령. 심령, 신령’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루아흐’도 역시 ‘바람’이자 ‘성령’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靈)’ 곧 ‘성령’은 예나 지금이나 ‘바람’처럼 임의로 불며 오갑니다. 인생의 금세와 내세에 대한 삶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참 대답이자 해법을 알고 있는 ‘성령’. 그것은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또한 이렇게 역설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11:13)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가장 좋은 것’은 또한 무엇일까요? 떡? 고기? 돈? 부귀영화? 대궐? 고급승용차? 유산? 세상에서 실속 있는 건 사실 그것들입니다. 그것을 ‘풍성하게’ 주고받는 것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사랑’이자 ‘축복’의 방정식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전혀 다릅니다. 차라리 엉뚱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강조해놓으시고, 주신다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왜 고작 ‘성령’일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있을까?
저는 20대 초반 당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학적 내지 인문학적 혹은 기복적 취향이나 접근이 더 강했기에, ‘성령’이란 건 당장의 내 희망 내 필요 내 실속과는 상관이 없거나 무익한 ‘바람’ 정도로 이해했으니까요.
그래선지 그렇게 ‘추상적 성령’이 ‘인격적 성령’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 객관적 실존이나 현존이 체험적으로 이해되기까지,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기’(욥기42:5)까지 저에게도 이후 ‘광야의 세월’이자 ‘연단의 세월’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바람’도 바람 나름이듯 태풍이나 폭풍은 인간이나 세상을 날려버리고 뒤집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인간을 거듭나게도 한다는 ‘성령'의 체험을 통해, 그 ‘하나님의 영’이자 ‘말씀’이 ‘만유의 주인’되심의 비밀을 확신하기까지 말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면, 거듭나면, 영육(靈肉) 간에 ‘일용한 양식’이나 ‘세상을 이기는 능력’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안식이나 지혜나 자족이나 담대함 등 ‘하늘의 참 복’이 절로 임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목을 매도록 다투어 줄서며 선망하는 재벌이나 권력도 그 소유로 행세 및 군림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일용할 양식’ 그 이상의 소유는 먹지 못합니다. 저들 역시 한계를 살다 역시 빈손으로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남는 건 그런 행세나 유세도 아니고 군림도 아닙니다. 되레 섬김이나 헌신 같은 이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참 성령’을 받으면 그 삶의 열매부터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기 분수가 ‘포도나무’든 ‘무화과나무’든 ‘감람나무’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열매 곧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5:22~23)
따라서 세상의 ‘허무한 바람‘ 안에서 살 것이냐,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바람‘이자 ’영원한 바람‘ 안에서 살 것이냐? 그것은 진실로 먼저 구해야 할 인생 최대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 ’가장 좋은 것’이라는 최대의 가치 및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 있고, ’곤고한 내 운명‘이 ’하나님의 영(聖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재벌의 자녀보다 더 가치 있는 ’하나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하늘의 언약과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아니야, 이제는 아니야.
친구여, 그 대답은 더 이상 ‘바람’만이 알고 있는 게 아니란다. 그래서도 안 된단다. 친구여, 그 확실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있고, ‘그의 제자들’인 너와 내가 ‘지금 여기서’, 현재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한단다. 나아가 ‘거룩한 바람’ 곧 ‘성령’을 진실로 받은 사람에겐 절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열매’가 있게 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단다. 하늘 아래서, 하늘 안에서, 타인 내지 이웃과 함께 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세상, 우리의 보다 나은 공존과 평화와 자유의 삶을 위해서!
-나(*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7: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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