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알고 있는 대답'

이형선 2018. 6. 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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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바다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밥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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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리긴 했지만

팝가수가 노벨문학상(2016)’을 받은 것은

의외이자 초유의 이변이기도 했기에 각별히

주목을 받았던 유태계 출신의 미국인 밥 딜런.

전통가요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공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가 20대 초반의 청년이던

1962년에 작사 및 작곡했다는 저 노래,

바람만이 알고 있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은 잘

알려진 대로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노래이지만,

한편으론 구도자(求道者)의 시일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저는 구도의 시각에서 저 노래를 좀 음미해보고 싶습니다.

 


저기서 밥 딜런은 먼저 존재의 문제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인간, 한 사람의 진실한 인간에 대한 희구 그것은 곧 구도자(seeker of truth)‘의 희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12:1)는 지혜자 솔로몬의 체험적 인생고백이자 신앙고백처럼, 그것은 과연 '청년의 때에'  먼저 고민해야 할 진실로 가치 있는 숙제이자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보다 더 많고 높은 부나 권력이나 출세나 포탄을 차지하는 소유의 문제'나 종말적으로 '헛되고 헛된' 세속의 그 모든 가치관이 우선의 명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를 고민하며 희구했던 저 청년 구도자는 그 구도의 길 내지 여정에서 이런 명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말을 바꾸자면, ‘하나님이웃에 대한 발견에의 희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제이자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 간에, 집단들 간에, 이념들 간에, 국가들 간에, 패권을 위한 무수한 포탄이 수시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내지 흰 갈매기사막에서나마 잠들기를 원하지만 그런 평화안식은 인간이나 세상 이념에서 나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저 가수 밥 딜런이 예나 지금이나 그 참 대답을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말씀에서 나옵니다.

 


물론 20대 초반 그맘때는 저도 그랬지만, 저보다 인생선배인 저 밥 딜런도 그 대답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 주먹이나 포탄이 행세하는 세상이자 꿈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허무하도록 무더기로 죽어가는 세상에서 느끼는, ‘()의 존재내지 진리의 개념그 자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밥 딜런은 구도적인 자기의 그 숙제이자 명제를 섣불리 부정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그 희구에의 가능성을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라는 긍정적 미래형으로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희구에 대한 대답, 구도자에의 대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대답을 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 참 대답이 바람 안에(Blowing In The Wind)’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 길이라는 인생의 여정을 가는, 구도의 여정을 이제 시작하는 젊은이로서 그것은 되레 겸손하게 열려진 자세이자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그런 삶의 자세는 구도의 여정이자 지향 푯대가 저 바람으로 되레 분명해졌고 거기서 인생의 명제에 대한 대답이자 정답을 구하고 배울 수 있다는 미래적 자기 희망이자 비전 그 자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시 주목해봅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wind)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Spirit)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3:7~8)

 


저 말씀에 나오는 바람성령이 헬라어 원문에는 동일한 단어인 프뉴마로 되어 있습니다. ‘프뉴마가 곧 바람, , 성령. 심령, 신령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루아흐도 역시 바람이자 성령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예나 지금이나 바람처럼 임의로 불며 오갑니다. 인생의 금세와 내세에 대한 삶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참 대답이자 해법을 알고 있는 성령’. 그것은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구도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또한 이렇게 역설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11:13)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가장 좋은 것은 또한 무엇일까요? ? 고기? ? 부귀영화? 대궐? 고급승용차? 유산? 세상에서 실속 있는 건 사실 그것들입니다. 그것을 풍성하게주고받는 것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사랑이자 축복의 방정식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전혀 다릅니다. 차라리 엉뚱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강조해놓으시고, 주신다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왜 고작 성령일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있을까?

 


저는 20대 초반 당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학적 내지 인문학적 혹은 기복적 취향이나 접근이 더 강했기에, ‘성령이란 건 당장의 내 희망 내 필요 내 실속과는 상관이 없거나 무익한 바람정도로 이해했으니까요.

그래선지 그렇게 추상적 성령인격적 성령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 객관적 실존이나 현존이 체험적으로 이해되기까지,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기’(욥기42:5)까지 저에게도 이후 광야의 세월이자 연단의 세월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바람도 바람 나름이듯 태풍이나 폭풍은 인간이나 세상을 날려버리고 뒤집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인간을 거듭나게도 한다는 성령'의 체험을 통해, 그 하나님의 영이자 말씀만유의 주인되심의 비밀을 확신하기까지 말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면, 거듭나면, 영육(靈肉) 간에 일용한 양식이나 세상을 이기는 능력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안식이나 지혜나 자족이나 담대함 등 하늘의 참 복이 절로 임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목을 매도록 다투어 줄서며 선망하는 재벌이나 권력도 그 소유로 행세 및 군림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일용할 양식그 이상의 소유는 먹지 못합니다. 저들 역시 한계를 살다 역시 빈손으로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영원히 남는 건 그런 행세나 유세도 아니고 군림도 아닙니다. 되레 섬김이나 헌신 같은 이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삶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참 성령을 받으면 그 삶의 열매부터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기 분수가 포도나무무화과나무감람나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열매 곧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5:22~23)

 


따라서 세상의 허무한 바람안에서 살 것이냐,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바람이자 영원한 바람안에서 살 것이냐? 그것은 진실로 먼저 구해야 할 인생 최대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 가장 좋은 것이라는 최대의 가치 및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 있고, ’곤고한 내 운명하나님의 영(聖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 재벌의 자녀보다 더 가치 있는 하나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하늘의 언약과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아니야, 이제는 아니야.

친구여, 그 대답은 더 이상 바람만이 알고 있는 게 아니란다. 그래서도 안 된단다. 친구여, 그 확실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있고, ‘그의 제자들인 너와 내가 지금 여기서’, 현재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한단다. 나아가 거룩한 바람성령을 진실로 받은 사람에겐 절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열매가 있게 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단다. 하늘 아래서, 하늘 안에서, 타인 내지 이웃과 함께 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세상, 우리의 보다 나은 공존과 평화와 자유의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7: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