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지도자' 모세의 '겸손'과 '교만' 사이

이형선 2018. 5. 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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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내리깔고 보는 한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죽음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자신도 시험해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는, 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겨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진짜 시금석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느냐’,

 또는 나 지신을 하찮고 더러운 존재로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 더 좋은 쪽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는 것이겠지요.-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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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큰 죄곧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엔 그 사람이나

그 교회나 공동체나 사회가 불행해집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야고보서4:6)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겨지는교만에 사로잡혀 바리새인유형의 신앙인이 되면 세상 일반인보다 되레 더 돈이나 차별을 좋아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행세하며 외식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저들에게 은혜를 주시기는커녕 되레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질타를 주셨습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어떤 모습이 진정한 교만이고, 어떤 모습이 진정한 겸손일까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던 선지자 모세를 진짜 시금석으로 삼아 그것을 상고해봅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12:3)

 


온유한곧 히브리어 아나우겸손한, 가난한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원문에는 메오드라는 부사가 붙어 아나우 메오드로 되어 있으니까, 심령이 심히, 지극히, 매우, 겸손한 사람’(a very humble man)임을 의미합니다.

젖먹이 때 파라오 공주의 양자가 되어 왕실에서 자란 모세는 애급 학문에 통달한 지식인입니다. 민족의식도 강해서 억압받던 히브리 동족을 자기지식, 자기혈기, 자기의지로 구원하고자 애급사람을 쳐 죽여서 매장해버릴 만큼 매우,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살인사건으로 인해 애급에서 도망갑니다. 이후 유배지일 수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일개 처량한 목자로 무려 ‘40을 삽니다. 그리고 ‘80노년의 나이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을 받습니다. 그때 모세는 비로소 주의 종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로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your servant)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애굽기4:1)

 


은 곧 하인, 노예를 의미합니다. 당시 들은 말이나 소나 나귀와 같은 주인의 일개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자기(自己)’내로다라는 걸 주장할 자격도 권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主人), 하나님 앞에서진정한 겸손이나 가난의 의미는 되레 거기서 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자기가 아예 없는경지를 의미한다는 것. 저 루이스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는상태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상대적인 시소게임입니다. 내가 커지고 높아질수록 하나님은 절로 작아지고 낮아집니다. 내가, 자기가, 아예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의 상태이자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고 사심 없이 섬길 수도 있는,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인격이자 인권(人權)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의 종이라는 인격이 되었기에 되레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구원자가 되어 ()애급대장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가 정작 그토록 소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질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 광야 므리바에 이르렀을 때, 거기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모여서 다시 원망 불평하며 모세와 아론을 공박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닌, '세상의 종'이자 그 육신 중심으로 살던 나라와 땅에서 '출애급'한 이후 38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랑했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로 먹고 마시며 살아왔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걸핏하면 원망 불평을 쏟아내는 백성들! 모세도 인간인지라, 그런 백성들의 완악함에 분통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그때 왕년처럼 인간적 자기혈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감정 내지 격분에 사로잡혀 자기하나님이 되어버린 것. ‘내가, 우리가하나님보다 커져버린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겸손을 잃고 다시 매우 교만해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you rebels),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수기20:10)

 


반역한(패역한) 너희여하모림간사한, 간교한, 부정한 너희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부르심 받아 다만 명령(*말씀)받은 바를 행하는지도자이자 목자(牧者)인 인간 모세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임의적으로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교만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자 몫이자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회중곧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는이적이나 섭리 역시 우리곧 모세나 아론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모세는 하나님의 , 하인이자 대언자, 대행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speak) 물을 내라 하라”(민수기20: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격노한 모세는 하나님의 저 말씀으로 물을 내지 않습니다. ‘반역한 너희를 두들겨 패기라도 하듯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칩니다. 오버 액션을 취한 것. 자기과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 내로다가 더 커져버린 것입니다. 특정 인간 지도자가 '율법' 혹은 오늘의 '실정법'보다 더 커져버린 것입니다. 법 위에 군림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와 현대를 포함한, '율법의 대부'이자 '법적 정의'의 대부인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의'만으로 인간 우리가 우리의 이상향인 '가나안 복지' 내지 '낙원' 내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할 절대 이유도 절대 한계도 다 거기 있습니다.        



-모세가 그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20:11)

 


사소한(?) 언행의 실수 같지만 저 행위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자기 신격화 내지 우상화와 같은 맥락의 큰 죄악이자 큰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모세의 형인 대제사장 아론에 이어, 모세도 정작 그리던 가나안 땅엔 들어가지 못하고 120세를 일기로 광야에서 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전에서 내 거룩함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0:12)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 한계를 살다 빈손으로 가는 모세는 인간 모세입니다. 인간 우리의 그 자기한계, 자기분수를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그 구별이자 성별이 곧 거룩함입니다. 구별거룩함을 잃고, 모세가 목자가 아닌 심판자가 되었을 때 되레 모세는 죽어야했습니다. 과연 겸손과 교만도, 생명과 죽음도 바람처럼 임하는성령과 악령의 역사가 늘 그렇듯 한순간에 교차합니다. 늘 먼저 (主人) 하나님께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그것을 절감한 때문이었겠지요. 자기의 죽음을 미리 알았던 위대한 지도자모세는 그래서 후세들이 혹여 악령의 미혹에 빠져 인간 자기의 시신이나 무덤을 숭배의 대상으로 신격화 내지 우상화하지 않도록 매장지조차 알리지도 남기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유언했던 것이겠지요.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은 국부(國父)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지만, 인간 자기내로다하는 과시를 남기지 않고 다시 여호와의 종의 모습만 남긴 채 하인답게 흔적도 없이 죽은 것입니다. 한편 유대인 전승이나 외경 등에는 모세가 '승천'했다는 일설도 있긴 합니다만 성경이자 정경은 이렇게 명기하고 있습니다.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명기34:6)

 


끝으로,

다시 자기본분 자기자리를 되찾은 모세가 후세들에게

마지막 남긴 행위언어의 의미를, 저 지극한 강조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풀어보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s)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1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