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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진다면,
마침내 그 십자가가 그대를 지고 그대가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 줄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이 아닐지라도
이른바 고통이 끝나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마지못해서 십자가를 진다면,
자기 스스로 새삼스럽게 무거운 짐을 만드는 것이
되므로 한결 더 짐을 무겁게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짐을 지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한 십자가를 팽개친다면,
틀림없이 또 다른 십자가를 만나게 될 것이요,
그것은 한층 더 무거운 십자가일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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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몫의 사명이자 임무를 의미하는
‘자기 십자가’는 꼭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되레 더 큰 모욕이나
손해마저 감수할 수 있는 삶의 자세도 다 ‘십자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태복음5:41)
현실적으로 차라리 바보 같은, 등신 같은,
저 말씀의 삶은 정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법적 응징이나 보복의 문제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외려 정의를 ‘완성하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넉넉한 마음이자 배려이자 포용이자 섬김의 문제입니다.
‘원수’조차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 잇속이나 이념이나 실정법, 정의 등을
밝히며 주어진 오늘의 ‘자기 십자가’나 ‘사회 십자가’를
스스로 더 무겁게 하거나 외려 ‘한층 더 무거운 십자가’나
더 복잡하게 꼬인 십자가로 만들고 있는,
실인즉 어리석고 미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자 소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악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남모를 심령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심판이나 보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겨두고,
억울한 모욕과 치욕을 당한 피해자로서의 ‘오른 뺨’이고,
‘고발’이라는 타의에 의해 벗어주는 ‘속옷’이고,
‘억지로’라는 강요에 의해 가게 된 ‘오 리'이지만,
외려 한 여유 더 보태 ‘왼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마저 벗어주고,
‘십 리’까지 동행하는 자비를 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삶이 보다 큰 소유이자 보화이자 영존(永存)의 지혜이자
가치인 ‘말씀’의 오묘한 능력을 알고 믿는, ‘심령의 부자’의 여유이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이자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늘 치열하고 늘 각박한 경쟁 내지 투쟁 논리나
가치관과는 다른, 하늘의 여유와 기쁨과 평안이
심령에 있는 ‘천국’의 삶이자 길이라는 것입니다.
‘미운 놈, 악한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삶.
긴 안목으로 보면, 과연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되레 가볍게 하는 지혜이자 영성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저나 우리 개개인이 될 수 있기를!
아울러 남북 간 대립도, 남쪽의 좌우 간이나 빈부 간의 대립도,
그렇게 풀어나가는 ‘정치판’이자 사회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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