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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신은 죽었다”는 메시지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신적 자존성을 부여해주었다. 인간에게는
인간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적이고, 지금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존재의 구조도 부여받았다.
여기에는 유한한 자유의 구조도 포함된다.
유한한 자유는 자존성이 아니다.
··· 용기(勇氣)는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다. 비존재는 운명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경험되며,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삼중의 위협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는 자기 자신의 힘이나 자기 세계의 힘보다
더 강한 존재의 힘 속에 뿌리내리고 있어야한다.
일부로서의 자기 긍정이나 자기 자신으로서 자기 긍정은
비존재의 다양한 위협을 넘어서지 못한다.
··· 개별화의 축은 신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종교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거기에서 유래한 용기는 종교적인
경험 속에서 표명되는 개인적 현실에서의 확신의 용기이다.
신비적인 연합과 구별하여 이 관계를 용기의 원천과의
인격적인 교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두 유형은 대조되긴
하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화와 참여의
극적인 상호 의존성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개신교 내에서 확신의 용기는 종종 믿음의 용기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확신은 믿음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 믿음은 신비적 참여와
개인적 확신을 모두 포용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의 표현으로서 종교적 만남을 묘사한다.
성서주의,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주의도 이러한 점을 강조했다.
··· 종교개혁자들의 용기는 (*가톨릭, 마르크스주의, 나치주의 등)
집단의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아닌 것처럼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도 아니다.
그들의 용기는 두 가지 용기를 초월하고 연합시킨다.
왜냐하면 확신의 용기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그와 정반대의 사실을 선언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멈춘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실존에 관하여 확신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확신의 용기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유한한 것에도, 심지어 교회에도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그 용기는 오로지 하나님께 바탕을 두고 있다. 독특하고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께만 바탕을 두고 있다.-
-폴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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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 틸리히 교수의
저서,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제가 임의적으로 발췌한 글입니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의 간극 내지 배리를
자신의 고백처럼 그 '경계선에 선 자'가 되어 일체화시킨
저 석학의 다소 어려운 학문의 요지를, 보다 쉽게
이해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 싶은 내용
몇 대목을 나름대로 엮어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실인즉 19세기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언급한 이후, 인간의 죄악과 불안과 무의미와 허무의식 등은 외려 가중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니체의 후예’인 실존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신(神)이 되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용기’를 주창 및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나 ‘아담의 후예’들이 한편으론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아가 그런 실존주의 사조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나 히틀러의 나치즘 같은 집단주의로 비화되었지만 나치즘도 구소련 공산체제도 다 ‘불행한 실험’의 상처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산 교훈을 통해 우리는 그런 ‘용기의 한계’ 및 ‘구원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그 한계를 늘 기억하며 명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 폴 틸리히의 언급처럼 인간은 ‘유한적 자유’를 가진 ‘유한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타의적으로 세상에 와서, 한세상 살다, 타의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인간이 예컨대 자살로 자기 생을 마감한다 해서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파괴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그런 자유나 자존심은 진정한 자유도 용기도 아니고, 자기 구원도 사회 구원도 아닙니다. 단적인 사례로 ‘자살의 모범’이 자살을 낳는 생명경시풍조는 그 자체가 사회적 불행이자 비극의 상처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절감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참 용기’이자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참 존재이자 절대 존재인 ‘창조주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19세기 이성 이후 노골적으로 이혼하기 시작했던 ‘신(神)의 존재’와 다시 결혼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산업이 고도로 발달 및 번영하고 그래서 ‘스스로 배가 부르고’, 첨단을 누리며 사는 현대인이 되었다 해서 ‘운명과 죽음의 위협,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이라는 실존적 ‘삼중의 위협’으로부터 정녕 자유로워지던가요? 진실로 행복해지던가요? 되레 그 반대로 날로 가중되는 각종 비인간적 관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아니던가요?
그럴수록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종교적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가족이나 자녀를 살리고 아울러 이웃을 살리는 진정한 ‘용기의 원천’과의 만남이자 ‘인격적인 교감’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 교감’과 ‘신비적인 연합’은 폴 틸리히의 저 언급처럼 ‘대조되긴 하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별화와 참여의 극적인 상호 의존성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합’ 내지 ‘합일(合一)’의 의미를 우리는 구약시대인물 ‘욥’의 사례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장차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되어 세상에 오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적으로 미리 ‘뵈옵고’ 이렇게 고백했으니까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42:5~6)
그렇습니다. 참 존재이자 절대 존재이자 참 ‘용기의 원천’을 체험적이자 인격적으로 만나면, 비존재 내지 상대적 존재 내지 거짓 존재의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회개하기’ 마련입니다. 인간 자기가 ‘율법적 의(義)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고 주장하고 고집하던 대단한 자긍심 혹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 등 그 모든 것이 실인즉 ‘티끌과 재’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자 무가치한 것임을 절로 절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고난을 받든지 축복을 받든지, 죄인이든지 의인이든지 죄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무익한 종’ 같은 존재이자 피조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겸손의 의미’를 알았다는 알레고리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17:10)
우리 존재 자체가 ‘무익한 종’이라면 우리가 소유한 부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용기도 다 ‘무익한’ 것이 됩니다. 실인즉 다 ‘유한한’ 것이자 ‘허무한’ 것입니다. 해서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자 반증으로 귀결됩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그 ‘은혜의 원천’이 곧 선하신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19)
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태복음6:33)고 말씀하신 그 '의'와 같은 단어인 '디카이오쉬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옮음, 의로움, 정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정녕 그렇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정체성이 ‘죄인’이자 ‘탕자’이자 ‘무익한 종’인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자 그 언약 그 계시 그 용서 그 구원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무익한 종’의 세상 자기 성공이나 성취나 소유는 물론이고 대단한 수행이나 선행이나 의로운 공로조차도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그런 걸로 교만해져서는 더더구나 안 됩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자 은혜가 없다면 저 욥의 고백처럼 인간 자기라는 존재는 실인즉 한줌 ‘티끌과 재’라는 ‘무익한 종’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런 인간 자기 정체성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거기서부터 ‘진실한 믿음’은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타가 공인하리만큼 율법적으로 흠이 없었던 ‘동방의 의인, 욥’이었지만 ‘진실한 복음 신앙’은 맨 끝장인 ‘42장’에서 되레,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 계시적 의미에 우리는 각별히 유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욥은 자식도 소유도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통해 다 잃고 몸마저 악질에 걸려 신음하던 비참한 자기를 찾아와 “모든 게 네 죄 때문이라”고, 율법적이자 자의적으로 함부로 비판하며 정죄하던 ‘세 친구’라는 작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용서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의 진리이자 가치가 아닌, 오직 복음(福音)의 진리이자 가치 중심에서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숙(成熟)입니다. 그래서 외려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욥의 그런 용서와 기도 자체가 바로 저 폴 틸리히가 말하는 참 ‘존재의 용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누가복음6:37)
과연 ‘주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늘의 복도 더해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성경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은 과연 하나로 통합니다. 진정한 ‘존재의 용기’는 유한한 한계를 사는 허무한 존재가 아닌, 진실로 영원한 ‘절대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발현된다는 비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오직 거기서 ‘생수의 강’처럼 세상을 이기는 담대한 용기도 이타적 사랑에의 용기도 분출하고 때론 초월적 용기까지도 분출한다는 그 ‘비밀’ 말입니다. 그래서 저 폴 틸리히도 나아가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믿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용기가 생겨난다. 믿음은 불확실한 뭔가에 대한 이론적 긍정이
아니라, 평범한 경험을 초월하는 뭔가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어떠한 상태이다.
이러한 힘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 자체의 힘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비적인 경험과 인격적인
만남은 동일하다. 그러한 두 가지 모습 속에서
믿음은 존재의 용기의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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