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참 '정의란 무엇인가'

이형선 2018. 8. 2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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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의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 교수는

 '아름다움과 바름에 관하여(On Beauty and Being Just)'라는

 멋진 책자를 펴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자기중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열린 마음으로 정의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목회 현장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이들은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했다.-

 

                                 

                                                  -팀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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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는 팀 켈러 목사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Generous Justice)’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저 언급이 또한 팀 켈러 목사의

원제 표현 그대로 너그러운 정의의 요지일 수

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최근 언론을 통해 이른바 청와대와 사법부의 재판거래문서나 정황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각종 민감한 시국사건에 대한 전 정권의 그런 비리나 불의는 물론이고, 오늘도 성폭력이나 실세들의 비리 사건 등에 대한 상식 밖의 판결에 도무지 승복할 수 없다며 폭염까지 무릅쓰고 관계 요로나 광장에서 시위하는 사림들에 관한 기사나 광경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새삼 참 정의란 무엇일까?’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사법부의 독립이나 권위조차도 불신의 대상이 되면서, 실정법에 근거한 법적 정의가 진정한 사회정의는 결코 될 수 없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정의(正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문명사회가 되어갈수록 더욱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의거한 권력형이나 경제형 양극화나 계급적 불평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더욱 사회적 화두로 부상이 될 것입니다.

십여 년 전이던가요.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주목을 받았는데, 그 책에서 정의라는 화두는 계속 던져지지만 그에 대한 확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치철학교수와 학생들 간에 오간 학문적 강의 및 토론의 집대성이니까 이론적이자 학구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정의에 대한 해답이 명료하지 않고 상대적 비교개념에서 끝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습니다. 물론 ()이 없는 정의(正義)’일 수 있는 오늘의 자유주의 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선이 있는 정의를 지향하는 교수의 정의관을 엿볼 수는 있었습니다만, 그럴수록 사회나 국가의 공동선을 위해 선이 있는 정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의(正義)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인가를 우리끼리 알아보자.-(욥기34:4)

 


욥기에 마치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처럼 등장하는 저 엘리후의 제언처럼 우리도 성경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선인가’, 그 명료한 답변을 알아봅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웃이라는 전제와 만나야합니다. 정의도 선도 다 이웃 내지 타인과의 관계이니까요. 한마디로, 성경 말씀 그대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삶 그 자체가 바로 참 정의이자 참 선이니까요. 정작의 문제는 그런 전제 앞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게 종교적 이상일 수는 있어도 그게 어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더냐? 차라리 위선적인 수사나 도그마 아니더냐?”

실로 벽 같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저는 저 팀 켈러의 언급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자기중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열린 마음으로 정의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목회 현장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이들은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했다.-

 


우리는 그렇게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성경 속의 인물로 단연 사도 바울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15:9~10)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마친 사도 바울. 그는 과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큰 용서의 아름다움이자 큰 은혜의 아름다움을 절절하게 체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이후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섭리를 오직 믿었기에 되레 그 은혜에 빚진 자의 자세로 이웃 모두를 섬기며 참 정의를 구현하며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진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산 사람들이나 교회는 남들이 보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설령 불이익을 당해도 자발적 정의나 이타적 정의의 삶을 살 수 있었고, 고달픈 사명의 삶도 심지어 순교당하는 형극의 삶까지도 되레 기뻐하며 감사하며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범사가 합력해서 선이 되고구원이 된다는 섭리를 확신하는, ‘금세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부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와 '다시 오시는'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확신하는 신앙을 소유하고 늘 깨어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렇듯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자 이타적 그리스도 인격에겐 실망도 실패도 없는 법입니다. 인생여정의 목적 자체가 전적으로 내 뜻, 내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에 있기 때문이자 삶 자체가 오직 주신 소명 내지 사명을 수행하는 '종(일꾼)'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특히 지도자나 법조인들일수록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정의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참 선()’이니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또한 거기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to act justly),

 인자를 사랑하며(to love mercy),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저 말씀 중 정의곧 히브리어 미쉬파트재판하다, 판결하다솨파트에서 유래된 법적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한 정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등 인간의 이념에 의거한 정의, 공의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인자(仁慈)를 사랑하며에서 인자헤세드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은혜, 자비, 긍휼을 의미합니다. ‘돈을 사랑하며’, ‘권력을 사랑하며’, ‘탐욕이나 정욕을 사랑하며사는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 공부도 사업도 열심히 하되 그것으로 이웃을 섬기며 인자, 자비, 은혜, 긍휼을 베풀기 위한 목적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삶을 살라는 것. 네 몸, 네 자식, 네 가족에게 베푸는 그런 사랑그런 은혜를 이웃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삶이자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삶이자 이상이자 인격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代行)이자 대속(代贖)의 십자가통해 비로소,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정의와 선에 대한 명료한 답변이자 롤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지상명령앞에서 더 이상 변명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14:34~35)

 


예수 그리스도의 저 내가 너희를 사랑한사랑은 이기적인 사랑도 거래를 위한 사랑도 아닙니다. 혈통적 사랑도, 남녀의 사랑도, 학문적이나 이념적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위시한 구약시대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주신 율법이자 말씀 그 ()’ 정의(正義)’ 인자(仁慈)가 일체(一體)된 사랑이자 완성(完成)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 정의이자 참 선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과연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서13:10) 해서 우리는 저 구약의 선지자 미가의 말씀을 감히 이렇게 완성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아, 주 예수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삶으로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이념이고, 하나님의 정의가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정의세상의 정의는 이해득실에 따라 청와대와 사법부의 재판거래처럼 거래되기 마련이니까요. 하나님의 정의를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 두려운 줄 모르는 인간적 교만과 이욕 때문에 인생 우리는 늘 어리석은 맹목과 거래를 자행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 이상으로 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오늘의 한국교회는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고로, 여기서 저 팀 켈러 목사가 금년 3월 방한했을 때 한국교회를 향해 했던 충고를 다시 들어봅시다.

 


"교회가 커지고 권력이 강해지면 교회지도자들이 권력과 부에 무릎을 꿇고 부패하게 됩니다.

 이는 서양교회에서도 이미 경험한 문제지요. 유혹과 권력의 문제에 직면할 만큼 힘을 갖게 된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감추지 말고 어떻게 회개하고, 권력남용을 다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이들’, ‘나 같은 죄인 살리신하나님의 은혜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들은 실로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하루가 일생'이라는 종말론적 사관과 신앙을 가지고 상대적 정의가 아닌 절대적 정의를 실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너그러운 정의(Generous Justice)’의 삶을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저나 우리도 풀의 꽃 같은나그네 인생 여정을 마치기 전에,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감히 이렇게 고백하며 증언을 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일국의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이 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격의 성공이자 영원한 생명에의 성공이 아닐 수 없겠지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