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개미에겐 두려움이 없다'

이형선 2018. 9. 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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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는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개미에겐 죽음이나

 자기의 나약함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자기 도시와 공동체 전체의 생존 문제

 때문에 걱정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기가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일은 없다.

 

 개미에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개미집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각각의 개미는 인체의 세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손톱을 깎을 때 우리의 손톱 끝이 그것을 두려워할까?

 면도를 할 때 우리의 턱수염이 면도기가 접근해 오는 것에

 전율할까? 뜨거운 욕탕물의 온도를 가늠하려고 발을

 집어넣을 때 우리의 엄지발가락이 두려움에 떨까?

 

 그것들은 자율적인 단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왼손이

 오른손을 꼬집어도 오른손은 왼손에 대해 아무런 원한을

 품지 않는다. 오른손에 왼손보다 더 많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고 해서 시샘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자기를 잊고

 유기체와도 같은 공동체 전체만을 생각한다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쩌면 그것이 개미세계의 모듬살이가

 성공한 비결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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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소설 개미

전 세계의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단의 저 글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이 다소 긴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어린 시절 개미와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지런함의 대명사인 개미는 사람도 사나운 개나 사자나 호랑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과연 개미에겐 죽음이나 자기의 나약함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일개 곤충이자 미물이면 나약한자기분수를 알고 상대적 거물이나 대적이 다가올 경우 다른 곤충이나 동물들처럼 알아서 기거나도망가거나 숨어야할 텐데 차라리 미련한 바보 같다 싶은 개미는 도무지 그런 본능적 기회적 처세술조차 없습니다. 해서 마치 후퇴를 모르는 인해전술의 군사들, 살든지 죽든지 오직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군사들 같기도 합니다.

물론 그래서 헤프게 죽음 당하기도 하고 때론 떼로 몰사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세계내지 개미나라라는 공동체의 모듬살이가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 이상으로 생존 및 번식하고 있습니다.

 


베르베르는 개미들의 그런 성공의 비결자기를 잊고 유기체와도 같은 공동체 전체만을 생각하는일념과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함에서 그 요인을 찾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여기서 이런 비약을 품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영원한 생명의 유기체와 같은 하나님나라만을 생각한다면 되레 두려움은 사라지고, 상대방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시기하지도 않으며 오직 지상명령 내지 푯대만을 향해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고난도 박해도 죽음조차도 예사로 여길 수 있을 텐데 싶은 이상이자 소망 말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언6:6~8)

 


우리가 개미가 하는 것을 보고 얻을 지혜양식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욕이나 탐욕이 아닌, ‘개미나라라는 공익 및 공존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도 대견하고,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개미군사들의 행진이자 행군은 오직 명령에 따라 죽고 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그 이상이다 싶어 우리가 보고 배울 가치가 충분하다 싶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2:3~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집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저 표현처럼 다 그리스도의 군사(soldier)’입니다. 군사에게 두려움은 제 일의 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저 제자이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1:7~8)

 


진실로 그렇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악령이자 미혹의 영이 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평안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고난도 죽음도 넉넉히 이기는강인함 의연함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인 것입니다.

 


나아가,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닥쳐오기 마련인 원치 않는 어떤 고난을 수동적 내지 오래 참는 믿음으로 잘 이기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능동적 내지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저 사도 바울!

사랑하는 제자이자 믿음의 아들에게 복음과 함께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사도 바울은 비정한 사람일까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일까요? 그럴 것이 오늘의 신앙풍토의 솔직한 트렌드는 예수 믿고 부자나 권세자로 입신출세해서 고난과는 담 쌓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아라는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 유형의 가르침이 곧 실속 있는 사랑이자 다다익선의 축복이 되어 다수의 환영을 받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누구의 가르침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일까요? 그 분별 내지 성별은 각자의 판단에 맡겨둡시다. 분명한 것은, 후자에게 배운 자는 더 큰 자기 몫의 세상 축복을 받기 위해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 내는 바리새인적 모범(?) 교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도 바울처럼 순교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나 '제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그것이겠지요. 훌륭한 장군 밑에 훌륭한 부하가 있고,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고난을 배운 자, 고난을 각오한 자에게 닥치는 고난은 이미 고난이 아닙니다. 되레 선()으로, 겸손으로, 성숙으로 인도하는 미학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자기 몫의 사명을 다 마치고 죽은 후,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그 거룩한 사명이자 막대한 임무를 이어받은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이런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9)

 


한마디로,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군사,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자하면 되레 산다는 것. 그런 큰 믿음과 큰 각오를 가지고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나 대적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 실존적 불안이나 두려움에 잡혀 사는 저나 우리라면 그것은 실상인즉 우리가 금세와 내세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의 나라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개미의 담대함을 배워야 할 이유도, ‘겁 많은 개일수록 (입으로만) 잘 짖는다는 속언을 명심해야 할 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불행이자 거국적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며 낙심하던 미국인들을 향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발했던 근대사의 명언이자 메시지를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입니다. 정체불명의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런 두려움에 빠지면 후퇴를 전진으로 바꿔놓는데 필요한 노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고력을 통해 우주나 자연을 운행하는 신()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고, 모든 인간은 ()의 자녀라는 논조의 철학을 설파했던 1세기 전후의 그리스 철인 에픽테토스도 일찍이 같은 내용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두려운 것은 고난이나 죽음이 아니다. 고난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이다.“

 


실인즉 하나님이 지으신 개미나 여타 곤충이나 짐승들은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 공포나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더라고요. 눈 댓 번 깜빡거리다가 그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조용히 가더라고요. 심지어 우리 인간도 '순진한 어린아이때까지는 그러잖아요? 그런데 왜 어른이 되면 되레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 공포 불안 두려움 등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그만큼 더 인간적인 내 생각이나 계산이나 미련이 많다는 반증이겠지요. 생각이 단순하지 못하고 복잡하다는 것.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 믿음도 산 소망도 없고, 대개가 세상이나 돈에서 시작해서 세상이나 돈에서 끝나는 허무한 믿음이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미에겐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내 것, 내 소유, 내 생각이 많을수록 미련도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많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에겐 역시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달든지 쓰든지 그 모든 범사 그 모든 섭리에 감사하며 순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주어진 내 모습 이대로에 감사하며 순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심령을 다스릴 줄 아는 참 지혜이자 실력이자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며 산 사람들, 내일 및 내세를 준비하며 산 사람들에겐 오늘의 고난도 죽음조차도 이미 불안이나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욥처럼 거지 나사로처럼 차라리 저주 받은 것 같은삶의 형국에 처해도, 사도 바울처럼 여타 사도들처럼 참혹한 죽음의 형장 앞에 처해도, 앞서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그 모범을 본받아 되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나 죽음조차도 되레 유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개미에게 주어진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이런 하나님의 은혜이자 각오이자 고백이 또한 진실로 저의 것,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