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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계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적 혼란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지는
않는가? 국가 간의 평화 대신에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엘 헌팅턴이 최근에 예언한 ‘문명의 충돌’에
불가피하게 운명 지어질 수밖에 없는가?
‧‧‧ 현재의 대부분의 분쟁에서 전쟁은 기본적으로
문명이나 종교가 아닌, 영토, 천연자원, 무역과 돈에
관련되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 정치적
• 군사적 이해관계이다.
··· 전세계 갈등의 배후에 있는 원인을 보지 못하는
피상적인 정치가들과 정치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종교는 세계 정치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헌팅턴 이전에 토인비에 의해서도 주장된 것이다.
종교는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의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동질적 종교가
동질적인 인간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토인비적 의미의 성장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종교 갈등의 잠재성을 고려해야 한다.
문명간 그리고 종교간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인류에게 미래란 오히려 음울한 것은 아닐까?
만약 미래의 갈등들이 주로 문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미래는 끝없이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점철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문명간의 갈등은 피할 수 있다.-
-한스 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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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세계 석학 103명이 제시한 21세기 예측〉
(클라우스 슈밥 엮음)이라는 책에 수록된,
독일 튀빙겐대학 신학과 교수였던 한스 큉 박사의 기고문
‘문명 충돌에 대한 대안’에서 제가 임의적으로 발췌한 글입니다.
물론 한스 큉 교수는 개신교 소속이 아닙니다.
가톨릭 사제입니다. 교황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고
신격화시키는 이른바 ‘교황 무오설(Papal infallibility)’을 위시한
가톨릭 교리나 전통들을 비판하며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큉 박사의 가톨릭 교수직은 교황청에 의해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사제직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니까요.
여하간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저 큉 박사는 일찍이 ‘문명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또한 피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21세기인 지금 유럽이나 미국, 중동 각국에선 이슬람 과격분자들에 의한 강력사건이나 테러, 분쟁이 속출하고 있고, 인도나 미얀마 등지에서도 역시 문명 내지 종교 간의 분쟁이나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 난민’이나 ‘다문화 민족’ 문제 등이 목하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장난민이나 무슬림 테러가능분자들은 당연히 분별 및 경계해서 ‘국민의 행복권과 안전권’을 보호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타 종교나 문명권 사람들을 무작정 배척할 수만도 없는 것이 국제적 현실입니다.
해서 저는 큉 교수의 저 기고문을 거의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큉 교수의 저 ‘문명 충돌에 대한 대안’이자 해법은 그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1993년 9월 4일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서 만든 세계윤리선언에 나타나있는’ 이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개인은 나이, 성, 인종, 피부색, 육체적 • 정신적 능력, 언어, 종교, 정치적 관점, 국적이나 사회적 출신에 관계없이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 이 선언은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과 윤리적 전통 내에서 입증된 황금률(Golden Rule)인 하나의 원칙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에게 받고자하는 행동을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해주어라.”
이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식으로든 네가 대접을 받고 싶은 그대로 너도 다른 사람을 대접해주어라”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삶의 모든 측면, 가족과 공동체, 인종, 국가와 종교를 위해 침해될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안이자 해법은 곧 이 한마디 말씀으로 압축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7:12)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 저 ‘황금률(黃金律)’이 또한 모든 ‘특별계시’와 ‘자연계시’에 나타난, 기독교와 여타 종교에 나타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계시이자 공통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명 충돌에 대한 대안’이자 해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명백합니다. 참 진리는 과연 석학의 거창한 학문이나 철학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지적 유희나 독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물론이고 스스로 도통한 종교인이나 유식한 학자다 쳐도 거기서 끝나면, 직업으로 끝나면, 그 부나 권력도 그 종교도 그 학문도 그 인격도 인생의 종말 앞에서 다 허무한 것입니다. 저 ‘황금률’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다 무익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저 ‘황금률’은 곧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정작의 숙제이자 명제는 늘 여기서 외려 제기됩니다.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기도 한 인간 우리가 과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혹은 대접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던가?
물론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듯 ‘내 자식, 내 가족’은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몸’ 이상으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는 차라리 불가능하도록 어렵습니다. 인간 우리의 이성적 노력이나 종교적 수행이나 깨달음으로 동정이나 선행을 베풀 수는 있겠지만 ‘내 몸처럼’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것. 성경적 표현으로 성정이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예’로서는, 태생적 혹은 동물적 혈과 육의 존재로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그것이 과연 우리가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할 절대이유이기도 합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의 영성의 비밀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감정이나 ‘자기를 부인하고’, 인간관계의 충돌이나 그에 대한 응징이나 심판을 포함한 범사를 겸손하게 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성령’의 실재와 비밀을 알아야만, 먼저 ‘사랑(*아가페)이신 하나님’ 그 마음 그 뜻을 알아야만, 그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고 그래서 타자(他者) 사랑도, 원수 사랑도, 타 문명권 사랑도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곧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지식인이자 공회의원인 니고데모)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3:5~8)
진실로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복음22:)는 말씀을 준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내 노력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가톨릭 교황이나 그 교리나 전통을 잘 믿는다고, 해박한 플라톤 철학이나 마르크스 사상을 마스터했거나 추종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저 한스 큉 교수는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자기 교수관이자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이렇게 토로했던 것이겠지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기독교 신앙을 논하는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앙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실인즉 예나 지금이나 ‘바람처럼 임하는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의 신앙위인인 모세나 다윗 왕에게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이해가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세적 은혜나 축복을 아무리 많이 받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역사’이자 ‘멸망당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오늘의 이른바 '성공한 대형목회자'나 소위 '신령하다'는 특정교주에게 인도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렇게 인도 및 세뇌시키는 영은 다 미혹의 영이자 악령입니다. 그래서 ‘처음’과는 달리 ‘나중’ 내지 ‘끝’이 안 좋습니다. 대개가 돈이나 재산이나 여자, 기득권 또는 후계자 문제 등으로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하거나 지극히 이기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사람인 '내로다'나 '내 것'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오직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게 합니다. 그것이 저 큉 교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신앙의 독특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진실로 아는 자는 이웃도 자기 몸처럼 자기 자신처럼 진실로 알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이웃에 대한 참 이해도 모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마더 테레사는 그래서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이라는 종교나 이념의 다름을 떠나서 어려운 이웃을 다 ‘내 몸처럼, 예수님처럼’ 대접하며 사랑할 수 있었고, 손양원 목사님 역시 이념 내지 사상의 다름을 떠나서 심지어 ‘내 자식을 둘이나 죽인 원수’조차도 입양해서 ‘내 몸처럼, 내 자식처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과 사랑을 우리도 배우자는 의미에서. ‘나환자들의 아버지’였던 손양원 목사님이 여순반란사건 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입양하고자 했던 당시, 그 일에 반대했던 딸에게 했다는 이런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성경말씀에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란 말씀이 있다. 네 오빠를 죽인 그 사람은 원수다. 주님은 원수를 용서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았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힌 채) 목숨을 걸었으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도 지켜야 할 거 아니니?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안 지키면 그건 말이 안 되잖니?“
제가 신앙도 성경도 잘 모르던 갓 스무 살의 청년시절. 나환자들 환부의 피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 치료하기도 했다던 저 손 목사님의 일화를 애양원 나환자들에게서 듣고 절로 존경심이 일어, 여천군 그 해변에 있던 목사님의 묘소를 찾아가 그 앞에서 나름대로 인생의 가치나 목적을 묵상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이젠 낫살을 지극이 먹은 지금, 48세에 공산군의 총탄에 순교 당하신 손 목사님보다 훨씬 낫살을 더 먹은 지금, 차라리 우직하도록 겸손하게 말씀을 말씀 그대로 지킨 저 신앙위인의 시종일관한 삶 앞에서 제가 저의 저 청년시절 때보다 되레 더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 때문일까요?
선행도 아가페의 사랑도 베풀어야 할 때나 기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 때나 기회를 놓치면 천사를 놓치고 영원한 하늘의 복을 놓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론 안일하게 때론 무력하게 때론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싶은 제 지난 삶에 대한 미진함에서 오는 자괴감이겠지요.
과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대접하는, 최고선(最高善)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나 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심령으로 하는 것이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런 마음, 그런 인간애를 가지고 가정이나 사회공동체에서의 인간관계 그 모든 충돌은 물론이고 나아가 세상 모든 문명이나 종교나 이념간의 충돌 그 모든 것조차도 ‘넉넉히 이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보다 평화로운 나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구현할 수 있는 저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live at peace with everyone).-(로마서1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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