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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별들을 쳐다 봐.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지금 가르쳐줄 수가 없어. 그 편이 더 좋아.
내 별이 아저씨에게는 여러 별들 중의 하나가 되고,
그럼 아저씬 어느 별에서든 즐거워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별들이 모두 아저씨의 친구가 될 거야.
그리고 아저씨에게 내가 선물을 하나 하려고 해.”
그는 다시 웃었다.
“아! 얘, 그 웃음소리가 좋다!”
“그게 바로 내 선물이 될 거야. 그건 물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이지?”
“사람들에 따라 별들은 서로 다른 존재야.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별은 길잡이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인 사람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
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별들을 갖게 될 거야.”
“무슨 뜻이니?”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겐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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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언제 읽어도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정화시켜주고,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보다 깊은
‘샘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싶습니다.
저도 20대 청년시절엔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바람처럼 앓던 문학청년이었기 때문일까요.
낫살 먹은 지금도 여전히 버리지 못한
미련 같은 바람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면,
‘어린 왕자’ 같은 작품 하나 남기고
‘별나라’로, 아니 ‘하늘나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싶은 바람이 그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홀로 비행기를 몰다 비행기엔진사고로 사막에 불시착한 ‘나’는 그 사막에서 별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 친구처럼 서로 사귀게 됩니다.
‘집 한 채보다 클까 말까한’ 작은 별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친구처럼 가꾸며 살고 있었던 어린 왕자는 ‘네 개의 가시’를 가진 그 장미와의 사이에 ‘골치 아픈 일’이 빈발하자 그 장미를 홀로 내버려둔 채 가출(?)한 이후 다른 여러 별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지나온 첫 번째 별에는 백성이 단 한 명도 없는 자칭 임금이 살고 있었고, 두 번째 별에는 온통 허영에 사로잡힌 남자가, 세 번째 별에는 술꾼이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자꾸 술을 마신다는 사림이었습니다.
네 번째 별에는 돈을 위해 돈을 세는 재미로 사는 수전노 같은 상인이, 다섯 번째 별에는 일을 위해 일을 하는 일중독자 같은 가로등관리인이 살고 있었고, ‘먼저 번 별보다 열배나 큰’ 여섯 번째 별에는 지리학자인 ‘늙은 신사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리학자는 풍부한 지식은 있었지만 그 역시 자기 세계에 갇힌 채 한 발짝도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선지 그는 어린 왕자에게 지구에의 여행을 권유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렇게 일곱 번째 별인 지구에 오게 된 것입니다.
사막을 오랫동안 걷던 끝에 어린 왕자는 ‘길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 ‘길’에서, “이 세상에 나와 같은 꽃은 하나뿐”이라고 자기에게 말했던 자기 별의 그 장미꽃과 ‘똑같은 꽃들’이 지구에는 셀 수 없도록 많다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합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을 가졌으니 부자인줄 알았는데 내가 가진 꽃은 그저 평범한 한 송이 꽃일 뿐이야"라고 자탄하며 풀밭에 엎드려 울기까지 합니다.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슬프고 외로웠던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친구하자고 말하지만 여우는 거절합니다. 친구가 되려면 서로 ‘길들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말하면서. 나아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들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나아가 여우는 또한 이런 ‘비밀’까지도 알려줍니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아주 간단해.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중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것을 잊어선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길들인 것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습니다.’ 가족관계 및 인간관계를 맺어온 부모님에게도, 자녀에게도, 형제자매에게도, 이웃에게도, 심지어 동물과 식물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사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여우의 저 말에서 어린 왕자는 비로소 자기의 ‘골치 아픈 일'에 대한 해답을 얻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장미꽃들’이 있지만 그들 중 ‘내가 길들인’, 정성을 들여 가꾸며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온 장미꽃이 자기의 유일한 친구이자 소중한 반려라는 것을.
비약을 시켜보자면, 저 ‘관계’는 20세기 이성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유태계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의 명저 ‘나와 너(I and Thou))’라는 그런 인격관계이자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인간과의 관계도, 신(神)과의 관계도, ‘나와 그것’이라는 ‘목적관계’가 되거나 그렇게 끝나선 결코 안 되는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무책임한 ‘그것’으로 끝나면 피차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종국적으로 자기가 되레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해서 어린 왕자는 그제야 ‘작은 별’에 홀로 남겨진 자기의 ‘장미꽃’의 소중한 가치와 그에 대한 책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어린 왕자는 지구에 온 지 꼭 1년이 되는 날, 떠나온 별이 그리우면 언제든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던 ‘노란 독뱀’에게 물려 쓰러집니다. 어린 왕자는 그렇게 숨을 거두고, 하고 많은 꽃들 중 유일한 인연이자 ‘관계를 맺고’ 살아온 자기의 ‘장미꽃’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별나라의 ‘작은 별’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작가인 생텍쥐페리 자신이 사막 내지 광야에서의 고난과 고독을 통해 얻은 자기의 ‘골치 아픈 일’에 대한 해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저씨’인 ‘나’도 그때 비행기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데 비로소 성공해서 세상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으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너도 나도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 각자에게 허락하신, ‘70억 명’이라는 지구촌의 ‘하고 많은 꽃들’ 중 유일한 자기의 반려자나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또는 이웃으로 허락하신, 그 모든 인연 및 실존적 관계의 섭리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그 인연이나 관계에 대한 자기 몫의 사랑의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회개하고’ 자기 몫의 자리로 각각 되돌아가야한다는 의미에의 강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 관계가 ‘골치 아픈 일’뿐인 악연(惡緣)이다 쳐도, 내 아량으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원수’다 쳐도, 그것을 내가 감당해야할 ‘내 몫의 십자가’로 주신 그럴만한 응분의 이유가 있는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고 그 악연이나 원수조차도 용서 및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응분의 심판조차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에 죄다 맡기고 말입니다.
인생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향기’이자 ‘영원히 살아있는 향기’인 ‘샤론의 꽃 예수’가 있는 ‘세상의 집’으로, 그리고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절대이유이자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저 ‘어린 왕자’도 저 ‘여우’도 저 ‘아저씨’도 모르고 첨단의 의학박사도 모르는, 악령이자 죽음의 영인 ‘독뱀’에 물려 고난과 고통을 당해도 다시 살 수 있고 심지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의 ‘비밀’이자 진정한 부활에의 ‘비밀’이 오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집’ 그리고 ‘하늘의 집’에 돌아가 영원히 복되게 살기 위해 서둘러 회개하고, 먼저 ‘천국의 열쇠’라는 ‘비밀’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너’라는 일대 일의 인격관계이자 신뢰관계이자 사랑의 관계를 ‘반석’처럼 굳게 맺어야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bronze snake)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광야에서 독)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수기21:8~9)
구약성경에 나타난 저 과거적이자 역사적인 ‘놋뱀’은 또한 장차 세상에 오실 미래적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자 계시입니다. 이중적 언급인 것입니다. 그 성취가 곧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친히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3~15)
오늘의 우리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아야 할, 무엇보다도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들린 ‘십자가의 예수’를 쳐다보아야 할 절대이유가 진실로 거기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죄악과 죽음을 대속(代贖)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이자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의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어린 왕자’가 별나라로 돌아가기 전, ‘아저씨’인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저 상단의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별들’이나 ‘천국’은 과연 “사람들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로 나타납니다. ‘영성의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별은 길잡이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인 사람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 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저런 ‘별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저 모두와의 관계가 ‘나와 그것’이라는 ‘목적관계’ 내지 ‘이기적 관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별’ 또는 ‘천국’과의 관계가 그렇게 끝나선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 왕자가 애처롭게 죽어가는 지경에서도 ‘아저씨’인 ‘나’에게 마지막 ‘선물’로 애써 ‘웃음’을 보여준 그래서 희망에의 비전으로 인도하는 인격관계이자 이타적 사랑의 관계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닐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이 먼저 ‘환상 중에(in a vision)’ 자식이 없는 아브람을 되레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셔서 “그를 이끌어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의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15:5)는 말씀을 주신 그 자체부터가, 고달픈 광야인생여정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에게 ‘꿈(a dream)’을 통해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창세기28:12)를 보여주신 그 자체부터가, 다 하나님 및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희망에의 비전이자 ‘나와 너’의 관계이자 영적 대화 및 소통의 관계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럴 것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곧 신(神)과 죄인인 인간을 하나로 잇는, 유일한 영적 소통의 다리이자 구원의 다리인 저 ‘사닥다리’ 역시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십자가’에 대한 예언이자 계시이니까요.
과연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죄인인 인간 저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그 형극의 자리이자 저주의 자리에서 되레 죄인인 저나 우리를 죄다 용서하시고 포용 및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이타적 헌신 그 궁극적 신앙인격의 완성이자 모범을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되레 부활하여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조금이라도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할 필연도, 저 어린 왕자를 '본받아' 이웃에게 ‘마지막 웃음’이라는 ‘선물’이라도 남기고 세상을 떠나야 할 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별들을 갖게 될 거야.
···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아저씨에겐 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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