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지도자들

이형선 2018. 10. 1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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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正義)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利他性)이다.

 ···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지도 않는다.

 

 ··· 정의 그 자체만으로는 곧 저급한 수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야한다. 정치인의

 현실 감각이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이다.

 역으로 도덕적 선지자의 이상주의가 인간의 현실적

 집단생활과 교류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을뿐더러 도덕적 혼란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 종교적 도덕과 정치적 도덕 간의 갈등 관계를

 생각할 때, 종교적 이상은 가장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종교적 도덕은 원래

 사회적 영향과는 상관없이 공평무사를 절대적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의 완전성 및

 아름다움과 관련지어 이 같은 이상을 정당화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바와 같이,

 종교적 이상주의는 자기실현이란 곧 자기부정의

 필연적 결과라고 믿는다. 이런 자기실현이란 물질적

 생활이나 세속적 이익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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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살다간 선지자였다고 할까요.

경제공황기에 빠진 미국,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

등 인류의 미래에 어둠과 재앙이 도래하던 그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냥 낙관론에 빠져있던 당대의

자유주의적 내지 자본주의적 사회과학자나 종교인들을

비판하며 경종을 울렸고, 그래서 많은 정치인들을

포함한 사회각계지도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

 


그의 저서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개념을 달리 표현하자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집단이기주의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의 지론처럼 정치적 집단이나 경제적 집단은 물론이고 여타 모든 사회집단 간의 관계나 거래는 가족이기주의를 포함한 집단이기주의라는 힘의 역학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저들의 정치적 도덕내지 집단적 도덕은 그 이기적인 실리나 실속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입니다. 해서 저 모든 사회집단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正義)’를 실현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실현한다고 해도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리버 교수는 비도덕적 사회의 지도자들일수록 겸손하게 어리석게 보이는 도덕적 선지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종교적 도덕은 세상 내지 사회집단의 그것들과는 이상도 목적도 우선순위도 다르고 그래야만 존재 가치가 있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된 ‘PD수첩을 저도 시청했습니다. 해서 단편적 루머로 들어왔던 모 대형교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님이지만 사심 없이 검소하게 살며, 섬기는 머슴목회를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 저도 한때 존경하기도 했던 그 교회 목사님은 이미 교황 혹은 대기업회장처럼 우상화되어 있더군요. 또한 그 교권을 대물림해서 세습하는 등 사회 여느 기업체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너중심체제의 인위적 경영이나 전국 곳곳에 세속의 부동산 투기 같은 비도덕적 사회의 행태를 확인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저 자신부터가 왠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죄송스럽게 느껴지고 그래서 절로 부끄러워지더군요.

 


개인적으론 나름대로 도덕적 인간곧 의롭고 선한 인간이자 이타적 인간이 특정사회집단에 속하거나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면 왜 절로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왜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비도덕적 사회의 일개 일원으로 동화 및 전락해버리는 것일까요? 조직 내지 집단의 생리 그 이기적 속성이나 목적이나 소속감 때문에? 입맛에 맞추는 세뇌 때문에?

물론 경제집단인 기업은 당연히 회사의 이익창출에 전념하며 그것을 우선의 목적으로 합니다. 정치집단인 여당이나 야당은 진보나 보수라는 이념을 막론하고, 언필칭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운운하지만 저들의 마음 역시 대개가 콩밭에 있습니다. 득표 전략이나 자기의 당선여부에 전념하며 집권 내지 권력행사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론 집단 역시 경영을 염려하며 진보나 보수라는 정치적 이념의 성향에 따라 우선의 논조를 달리합니다.

때론 진보 혹은 보수라는 이념의 하수인이나 들러리가  되어 그 프레임이나 유식하다는 자기 '지성'에 스스로 갇혀, 진보를 위한 진보를 고집하고 보수를 위한 보수를 고집하며 비판과 대립과 반목의 날을 세우는 직업적 논객이나 학자들도 많더군요. ‘내가 하면 정의고, 네가 하면 불의’, ‘내 편 내 집단이 하면 다 정의고, 네 편 네 집단이 하면 다 불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보수진보어느 한쪽에 줄서기를 강요를 합니다. 적군이냐 아군이냐? 그 집단에의 소속을 이분법적으로 강요입니다. 자유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보수가 집권했다 해서 나라가 곧 부강해지던가요? 평등과 복지를 지향하는 진보가 집권했다 해서 나라가 곧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화되어 망하던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새는 두 날개로 납니다.” 그것은 곧 좌우 어느 한 쪽만이 정의는 아니고, 그런 독선에 빠지면 되레 자체가 추락하고 만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의 사회정의라는 것도 남한과 북한과 일본 사회의 그것은 그 개념부터가 각각 다릅니다. 해서 남쪽의 정의가 북쪽에 가면 되레 불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저 리버 교수의 언질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 그 자체만으로는 곧 저급한 수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야한다. 정치인의 현실 감각이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이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은 선지자의 말씀이나 도덕성을 세상 물정이나 현실성과 동떨어진 어리석음(?)’으로 치부하지만,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선출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 같은 정치지도자들일수록 선지자의 도덕성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되레 저급한 수준이나 정말로 어리석은 수준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국가와 국민조차도 집단최면이나 사교의 주술에 걸린 듯 정의도 양심도 도덕성도 저급해지고 어리석어지기 마련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라는 집단최면에 걸린 독일이나 대동아공영이라는 군국주의에 사로잡힌 일본이 전쟁이라는 인류의 재앙을 자행 자초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리버 교수는 저들이 그렇게 어리석어진 요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지자의 도덕성과 올바른 메시지를 어리석게 여기고, 그 말씀 그 도움을 겸손하게 구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때문이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 중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께서 친히 강조하신, 인생 최우선의 목적에 대한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1~33)

 


한편, 미국 제42대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리버 교수의 저 저서를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과 도움을 준 ‘5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 및 공표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클린턴도 지향하는 가치관이 도덕적 인간이기를 원했고 그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개인적이자 도덕적 인간의 자리를 떠나 사회적 자리 곧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국가 내지 비도덕적 사회의 지도자 자리에 오르자 성공한 그 권좌에서 스스로 교만해진 그는 되레 비도덕적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 상징적 사례로 우리는 백악관에서 자행되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스캔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유부남인 그는 그로 인해 탄핵 소추까지 받으며 국제적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윗 왕도 같은 맥락의 사례가 됩니다. 일개 미천한 목동에서 출발한 도덕적 인간다윗일 때, 그는 아주 신실하고 의롭고 선한 인간형의 모범이었습니다.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국민영웅으로 부상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모범적이도록 겸손한 도덕적 인간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차기 왕재로 부상한 다윗을 직접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적했고 그래서 도망 다니는 노정에서 사울 왕을 되레 두 번이나 직접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원수에 대한 응징이나 보복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자기 손에 피를 묻혀 스스로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만큼이나 신실한 도덕적 인간이자 신앙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통일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어 승승장구하게 되자 역시 비도덕적 사회의 생리일 수 있는 집단의 힘내지 병력의 힘을 알게 모르게 의지 및 과시하며 그 타락한 생리의 늪에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성공한 그 사회 그 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고 세속화되면서 영성(靈性)이 둔감해집니다. 그래서 비도덕적 권력의 악행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휘하의 군사들이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던 당시, 그 일선에서 싸우고 있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들여 간통을 한 것입니다. 그 후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그것을 감추려고 우리아 장군을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하게 하지만, 충직한 우리아 장군은 야전사령관인 내 주 요압과 군사들은 일선에서 전투 중인데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내 처와 자리이까”, 그렇게 말하며 끝까지 고사합니다.

 


그러자 영성과 양심이 이미 마비된 다윗은 사령관 요압에게 은밀한 지령을 내립니다. 우리아 장군을 최전선에 내세워 적군인 암몬의 칼에 맞아 죽게 하라는 교활한 음모가 담긴 편지를, 그것도 우리아 장군의 손에 들려보냅니다. 그 편지를 받아든 사령관 요압 역시 아니요(No)”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충직한 애국자인, ‘내 부하 우리아를 살려달라는 간청도 양심의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음모 그대로 수행해서 우리아 장군을 전투 중 적의 칼에 맞아죽게 합니다. ‘비도덕적 정권내지 비도덕적 사회의 그런 구조악이자 비리이자 비밀을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지요.

 


-다윗의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사무엘하11:27)

 


그래서 하나님은 정치적 도덕이나 사회정의이상으로 공평무사를 절대적 이상으로 삼아야 하는 종교적 도덕을 보내십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준엄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사무엘하12:10)

 


다윗은 하나님을 업신여긴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살아계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이웃에게 저지른 비도덕적 권력의 가증한 네 악, 네 비리, 네 이기적 행위가 곧 , 하나님을 업신여긴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 왕은 가정적 및 국가적인 의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작 주목할 것은, ‘정치권력에 취해서 자행한 다윗의 저 간음과 살인교사라는 악한 행위를 꾸짖으며 하나님의 선지자역할을 수행해야 할 오늘의 대형교회목회자라는 종교권력역시 비슷한 유형의 악을 알게 모르게 되레 자행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모두도 역시 알게 모르게 저런 을 자행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가 (主人)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보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재물, 권력, 명예, 기득권, 색욕,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이 다 영적 간음이자 주님을 상대적으로 죽이는 행위이니까요.

 


지난주 ‘PD수첩에서 방영한 내용에 의하면, 저 대형교회가 하나님께 드린 교인들의 헌금비자금 800억원을 은밀히 관리해 온 것이나 전국각지에 ‘1,600억원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던데, 그런 투자의 모범이나 투기성 재산형성이나 무속신앙적 또는 불로노득적 횡재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일까요? ‘종교권력을 가진 나와 내 가족만 살면 비자금 담당 장로님은 자살해서 죽어도, 혹은 우리아 장군처럼 억울하게 죽어도 상관없는 것일까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기독교지도자목자의 양심과 도덕성이 이래선 정말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리가 결코 없잖아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Yes),

 아니라 아니라(No)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태복음5:37)

 


그렇습니다. “아니다는 권위적 높은 사람들에게 늘 환영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아니라 할 건 아니라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이자 선입니다. 서로를 진실로 살리는 길입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특정 집단이나 정권의 비도덕성에 세뇌되어 외면 및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되레 입니다.

아무쪼록 다윗 왕의 경우처럼 되레 가정적 및 국가적 재앙이 되지 않도록, ‘한국교회적 재앙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서둘러 회개해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실 때는 외려 너무 늦은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 배가 불러예수 그리스도를 외려 교회 안에서부터 다시 죽이고 있는 죄인들인 저나 우리 모두의 영적 카이로스이자 회개의 카이로스는 늘 오늘이자 지금 여기서이니까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