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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는 설교, 그야말로 설교의 연속이다.
성경에서 가장 긴 설교이며, 어쩌면 이제까지
설교자들이 전한 설교 가운데 가장 긴 설교인지도
모른다.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온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신명기는 그의 마지막 설교다. 설교를 마친 후 그는 설교단을
평야에 남겨둔 채 산으로 올라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 모세는 모압 평야에서 이 위대한 설교를 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과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을
하나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과 섭리를 현재시제로
옮기고(1-11장),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계명과 언약도
현재시제로 옮긴다(12-28장). 그런 다음 그는 당부와 노래와
축복으로 그 모든 것을 마무리하며, 오늘 여기서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시작하도록 그들을 떠나보낸다(29-34장).
“자, 가자!(Let’s go!)”-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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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리던 이 시대의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님이
85년이라는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지난 주,
10월 22일(현지시간)에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셨더군요.
그분이 남긴 ‘마지막 말’은 “가자(Let’s go!)”였다고 합니다.
저는 “가자!” 또는 “함께 가자!”라는 저 피터슨 목사님의
마지막 말씀이자 유언을 접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저분의 사역(私譯)이자 대표저서일 수 있는
⌈메시지(The Message)⌋ 중 ‘구약성경 신명기’ 부분에
나오는 ‘머리말’이 그것입니다. 이유인즉 역시 피터슨
목사님이 쓴 저 상단의 발췌문 곧 ‘신명기 머리말’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종’이자 ‘위대한 선지자’였던 모세의
인생에 대한 마지막 결어를 “자, 가자”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 말로 압축시켜놓았었으니까요.
따라서 저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전후의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원과 섭리를 ‘현재시제’로 옮기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말씀 곧 계명과 언약을 현재시제로 옮긴 것처럼 피터슨 목사님은 ‘신약성경’이나 ‘모세 오경’을 ‘일상 언어’로 옮기고, “당부와 노래와 축복으로 그 모든 것을 마무리하며, 오늘 여기서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시작하도록 그들을 떠나보냄으로써“ 자기의 소명을 다 마치고 ‘할일을 했을 뿐인 무익한 종’처럼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난 모세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싶었고 또한 그래서 심령의 중심에 간직한 그것을 인생의 마지막 말로 남긴 것이라 사료됩니다.
“자, 가자!(Let’s go!)”
어디로, 누구에게 “가자”는 것일까요? 어느 길로, 누구의 길로 “가자”는 것일까요? 전자는 인생의 목적이자 삶의 푯대에의 명제가 됩니다. 후자는 인생의 방법론이자 삶의 롤 모델에의 명제가 됩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은 단 한 번뿐입니다. 연습과정도 없고, 물릴 수도 없고, 지우개나 ‘레테 강’으로 지울 수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길’은 어지럽도록 많습니다. 나란히 줄서서 질주해야만 살아남는 고속도로처럼 넓고 많습니다. 돈의 길, 권력의 길, 명예의 길, 이념의 길, 주색의 길 등 차라리 미혹 및 유혹하도록 많습니다.
나아가 주지하다시피 저 돈 권력 명예 이념 주색 등이 각각 탐욕이나 야욕의 지경에 이르면 저 대상 자체가 그대로 ‘우상’이 되고 ‘신(神)’이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이자 결국은 ‘신기루’ 같은 허무와 무의미 그것입니다. 내로라하던 인생도 이념도 ‘초상집’에서 그대로 끝나버리면 통전의 인생 자체가 “헛되고 헛된” 한편의 허사가(虛事歌)나 장송곡 이상의 가치는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내 후회하지 않을 ‘참 길’을 찾아, 인생의 참 목적을 향해 ‘한 길’을 가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14:6~7)
그렇습니다. 구약시대 내내 희구하던 곧 인류대대로 희구하던 ‘세상에 오신 메시아’를 “알았고 또 보았던” 사람들은 신약시대나 지금이나 복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인,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 비밀을 “알았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저 말씀을 문제 삼아 ‘예수의 독선(獨善)’ 운운하며 비판하는 경우도 있던데, 저 독선은 ‘교만에의 독선’이 아닙니다. ‘사랑에의 독선’입니다.
‘내 자식’에게 어머니는 한 사람 뿐입니다. 아버지도 한 사람 뿐입니다. 그렇게 ‘유일한’ 사랑의 관계이자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대신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자기 제자나 연인에게, 나 말고 다른 남자나 다른 길도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정작 아량이 넓은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은 참 사랑의 진면목이나 의무도 모르고, 그래서 헌신도 희생도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사람일 것입니다. ‘기생집 기둥서방’ 같은 다원주의적 성향의 사람일 것입니다.
각설하고, 해서 저 유진 피터슨 목사님 역시 ‘모세보다 더 복이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그럴 것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인 ’그리스도의 비밀’을 그 역시 신령한 영성(聖靈) 체험을 통해 직접 “알았고 또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성가이자 영성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평소부터 늘 이런 요지의 고백 및 권유를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거는 것, 전적으로 거는 것,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함께 갑시다!”,
아울러 그것은 저 ‘신명기’라는 ‘마지막 설교’에 나타난 구약시대 모세의 메시지처럼 “금세의 가나안 땅도, 내세의 천국도 함께 갑시다!”라는 의미이자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처럼 “십자가의 길도, 부활의 길도 함께 갑시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여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신명기30:15~18)
선지자 모세가 자기의 임종(臨終)을 미리 알고, ‘약속의 땅’이자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남긴 저 ‘마지막 설교’이자 ‘유언’이자 ‘예언’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행했을 때 저들은 과연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생존하며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배부른’ 저들이 타락 및 세속화되어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섭리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해서 내분(內紛)을 앓다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북왕국은 앗시리아제국의 칼에, 남왕국은 바벨론제국의 칼에 의해 각각 멸망당하고 맙니다.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는 저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생명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개 문학적 표현이나 윤리도덕이나 지식이나 교훈으로 끝나는 개념이 결코 아니라는 것. 진정한 신앙은 그 ‘말씀의 생명력’이자 ‘영성의 비밀’에 대한 ‘두려움’을 알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계시나 섭리를 통해 ‘오늘도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가지면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이스라엘 민족’일 수 있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오직,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집중 및 순종하는 단순한 삶’을 살았던 저 모세나 저 유진 피터슨과 정녕 “함께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섬기는” 세상의 돈이나 재물, 권력, 명예, 정욕 등 저 모든 ‘세속의 다른 신(神)들’이나 그 늪에 이미 깊숙이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영성이나 도덕성이 이미 마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네가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한국교회나 우리 개개인 역시 저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역설했던 사도 바울도 실인즉 선교 현장에서도, 순교 현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을 향해 한결같이 “함께 가자!(Let us go!)”고 외치던 사도였습니다. 그 역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2:12)
저는 한국교회에 ‘성령행전’을 통해 이미 수적 양적 부흥을 주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중심이 이제는 질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곧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자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알곡과 쭉정이’ 또는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추수 때’이자 ‘심판의 때’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생 개개인에게 임하는 종말론적 ‘죽음’이나 그 ‘때’까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내일 아니 오늘, ‘세상의 종말’이나 ‘인생의 종말’이 온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느 쪽일까요? ‘천국’에 들어갈 ‘알곡’? ‘불 심판’에 들어갈 ‘쭉정이’나 ‘가라지’? 나아가 ‘알곡의 삶’은 정작 어떤 삶일까요? ‘알곡의 삶’은 신학이나 철학을 포함한 현학적 논리나 지적 유희나 탐구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 및 '복음' 자체이자 '영적 생명력' 자체이신 그래서 그 '이름' 자체에 기묘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비밀이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life)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soul)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16:24~25)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삶은 ‘속사람’이 ‘알곡’이 되는 삶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저 그리스도의 가치관 내지 인생관에 대한 저 정도의 확신 및 각오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저를 포함해서 진실로 부끄러워하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제자들” 곧 ‘알곡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함께 가자(Let us go!)”고 동일한 요청을 하고 계시니까요. '십자가'에서 끝장나는 길을 가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의 길'까지 "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그 '영원한 생명'의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말씀 그대로 ‘진리에 속한 자’가 되어, ‘들을 귀 있는 자’가 되어, 저 ‘동행에의 초청’을 기쁘게 들을 수 있는 저나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일어나라, 함께 가자!(Rise, let us go!)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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