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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회에서는 날로 개인의 권리만이
주장되고 있다. ···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은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웃은 자기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관념은
미국 문화의 심장부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 불꽃은 진로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모조리 삼켜버린다.
··· 우리는 자기의 삶만을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이웃의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망각할 우려가 있다.
또한 은혜라는 미명 하에 교만과 성적 불결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과소평가할
우려가 있다. 자아성취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본뜬 번지르르한 위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거짓복음의 가치를 과대평가할 우려가 있다.-
-존 우드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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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종교개혁500주년기념 공동학술회의’에
주강사로 초빙을 받아 내한했던
존 우드브리지(John D. Woodbridge) 교수.
70대 후반의 고령으로 현재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연구교수로 있는
저분은 방한 당시 한국교회를 향해,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휩싸인 채 복음의 능력도,
성경의 권위도 잃어버린 미국의 전철을 따르지 말라“는
요지의 충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차치하고, 미국이 초강대국이자
선진국임에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입니다. 따라서 배울 것은 물론 배워야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전철’이나 ‘미국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선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 자체가 선망이나 허세나 과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욕은 빨리 배운다”는 속언처럼
미국교회를 포함한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라는
그 세속화의 길이나 그 길의 ‘오물’까지 ‘빨리빨리’
배워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 우드브리지 교수의 갈파처럼,
“미국 문화의 심장부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개인주의나 자기중심주의, 자아성취복음이라는 거짓복음“
은 이미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있는 상태이지 결코 성경이나
복음의 진면목도 아니고, ‘청교도 정신’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진국가인 구미학문이나 신학을 배우고, 선망하는 꿈이나 비전 역시 거기서 배운 때문일까요. 기독교부흥과 번영신학이라는 대의명분에 취한 한국교회 역시 저들 사회의 ‘타락한 전철(前轍)’조차도 그대로 답습하며 “은혜라는 미명 하에 교만과 성적 불결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과소평가”한 것이 사실이었다고 사료됩니다.
또한 “자아성취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본뜬 번지르르한 위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목회자나 학자들조차도 “무의식적으로 그 거짓복음의 가치를 과대평가”한 것도 사실입니다. 목회자들이 ‘대형교회’를 맹목적일만큼 선망하며 ‘성공한 대형목회자’의 그 부흥 그 번영 그 과시를 ‘오직 본받으며’ 경쟁적으로 올 인한 것도 ‘자아성취복음’이 남긴 아주 나쁜 유산이자 인식이자 영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반어의 의미에서 말입니다.
최근에 소천하신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분은 교회가 성장해서 목자인 자신이 ‘양들’ 곧 ‘교인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되레 목회를 그만두고 신학교수로 사역의 방향을 돌렸다고 술회했습니다. 실인즉 그것은 피터슨 목사님 개인의 판단도 아니고 선택도 아닙니다. 되레 자아성취 곧 자기성취를 부인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 ‘길’을 따라가고 그 ‘문(gate)’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에서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gate)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한복음10:1~3)
그렇습니다. 이상적 목회의 관계나 규모는 ‘대형교회’가 아닙니다.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애굽기33:17)라고 말씀했던 것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 역시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라는 ‘인격관계'이자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친밀한 영적 가족 내지 영적 지체의 관계를 본받으며 지향하고자하는 ‘종’이자 목회자는 대형교회나 특정목회자를 ‘과대평가’하며 결코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성취복음’ 내지 ‘자기복음’ 그 자체가 진정한 복음도 성공도 축복도 아니니까요.
실인즉 오늘의 우리 세태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처럼, 대개의 ‘대형교회’ 그 끝의 열매나 영향력이 안 좋더라고요. ‘대형’ 그 자체가 ‘성공한 목회자’ 개인의 권력이 되어 ‘당신들의 천국’이자 ‘왕국’이 되어버리더라고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목하 몇몇 특정 대형교회나 문제 교회의 ‘비리’나 ‘세습’이나 ‘종말’을 대비한다는 ‘피지 낙원’ 등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전체 한국교회가 ‘골빈족’이라는 미개인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비판과 비하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과연 대형교회는 물론이고 대형기업이나 대통령이라는 대형권력을 이미 이뤘다 해도 “나 아무개가 이뤘다”는 그 ‘자기성공’으로 인해, 우리가 늘 드리는 ‘주기도문’에 명기된 말씀처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기”는커녕 되레 ‘아버지의 이름’이 수치나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개그맨들의 비판과 풍자거리로 전락이 된다면,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失足)시킨다면 그것은 형제에게도 그리스도에게도 “죄(罪)를 짓는” 악한 행위입니다. 해서 그렇게 “불타는” 개인주의적 자기나 자기중심의 ‘성공’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나 하지 못한 편이 외려 더 나을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失足)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후서8:12~13)
사도 바울은 과연 ‘선한 목자’ 그리스도를 오직 본받으며 살았던 또 다른 ‘선한 목자’였습니다. ‘어둠의 시대’이자 ‘세속화 시대’일수록 ‘세상의 빛과 소금’인 목자 내지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저 정도의 양심이나 도덕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은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우리 시대의 자아 성취적 내지 자기 과시적 성공주의나 물질주의나 기득권층의 ‘갑질’ 그것은 적극 경계하고 척결해야 할 ‘사회적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성공한 자아성취복음이라는 거짓복음을 과대평가”하며 특정인간을 우상화시켜 그 ‘목자’ 중심으로 모인 교회나 집단 역시 그 목자 ‘자기의 말씀’이 ‘주의 말씀’보다 더 강조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교인들에 가하는 ‘영적 갑질’이기에 더 크고 더 악한 ‘사회적 죄악’일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자기의 삶만을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이웃의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망각할 우려가 있는” 시대를 사는 오늘의 기독교지도자 또는 종교지도자일수록 여타 사회지도자들보다 더 겸손하고 더 조심해야 할 절대이유도, 더 높은 양심이나 도덕성이 필요한 절대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힘 내지 권력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고, 실패한 쿠데타는 반역”이라는 공식 그것입니다. 경제부흥과 번영이라는 결과만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상관없다는 공식 그것입니다. 따라서 “성공한 쿠데타는 무죄이고, 실패한 쿠데타만 유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그 자체가 ‘약’이 되기도 하지만 ‘심판’이 되기도 합니다. 거기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후대의 역사는 ‘성공한 쿠데타’도 ‘성공한 자아성취복음’도 다 그 거짓됨이나 오류를 익히 분별 및 판결했습니다. 신앙유무를 막론하고, 사람은 ‘떡’이나 ‘재물’이나 ‘권력’ 그것들의 ‘번영’만으로 사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럴수록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그것은 과연 진실로 고상하도록 멋진 일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이자 복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나 지식이나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이나 병을 고치는 은사” 등 각종 ‘성령의 은사’를 남달리 많이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선천적 장애인을 말씀으로 치유한 적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사도행전14:10)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주변의 무리들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면서 일행인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화 및 신격화시킵니다. 심지어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까지 나와서 저들에게 경배하며 제사하고자 합니다. 그 경배를 묵인한 채 은근히 자기 과시를 하며 누리고 있으면, 인간 자기가 절로 신격화된 교주가 되어 대형교회나 집단을 이룰 수도 있고 그래서 ’자아성취복음이라는 거짓복음‘이나 ‘자기왕국’을 이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외려 ’거짓복음과 참 복음‘에 대한 ’분별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로마서12:2)하는 그런 ’거룩한 분별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사심(私心)이 없었던 사도 바울은 그런 저들을 적극적으로, 결사적으로 만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렇게 ’참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사도행전14:15)
그렇습니다. 특정인간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것도, 그런 숭배를 받는 것도, 심지어 대형자기왕국을 이룩한 것조차도 다 “헛된 일”입니다. 흐르는 시간이, 후대의 역사가 그것을 절로 증명해줍니다. 참 영안(靈眼), 맑은 영안을 가진 자는 ‘선지자’처럼 그것을 ‘미리 보는 자’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인이나 ‘주의 종’일수록 저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 기도하며” 사심 없이 살아야 할 절대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을 재삼 절감하게 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의 완성(完成)이자 완덕(完德)인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서면, 그리스도 앞에 서면, 저나 우리는 그 진리와 선한 양심의 거울 앞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죄와 허물을 늘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럴수록 되레 인간 내 “오호라”의 한계를 깨닫고 더욱 겸손해질 수 있고 그래서 “예수의 이름, 예수의 피”에 의한 대속의 구원 그 전적 은혜나 신령한 은혜도, 범사에의 감사도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웃의 고통이나 결핍에 대한 이해도 섬김도 사랑도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스스로 배가 불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벗어나면, 인간 자기가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면, 되레 ’참 지혜‘도 ’거룩한 분별력‘도 잃어버리기 마련이고 그래서 결국엔 오욕과 불행을 자초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오늘의 ’나쁜 전철‘을 반면교사 삼아 크게 깨닫고 크게 배우는 것 역시 ’참 지혜’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참 제자'나 '참 알곡'에게 산교육이자 재교육을 시키시는 주님의 섭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로새서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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