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해법

이형선 2018. 11. 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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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위인들 곧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등은 결코 처음부터 믿음의 위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 믿음의 훈련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요셉의 경우를 시편에서 읽을 수 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고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편105:)

 

 요셉의 단련은 그의 죄악으로 인해

 당하는 고초가 아니었다. 일찍이 꿈을 통해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 곧 그가

 장래에 오히려 그를 종으로 팔아버린 그의 형들의

 경배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연단이었다.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 약속의 실현은 실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외로운 감옥에 갇혀있다. 그는 감옥에서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러 그의 간구에 대한 응답을

 지연시키셨다. 그로 하여금 절망 중에서 더 많은

 믿음의 과정을 배우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연단시키는 과정은 매우 길었지만

 그것은 또한 영성(靈性)이 성숙되는 시간이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그런 과정이었다.-

 

                           

                                              -레티 카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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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후 일본과 중국에 동양선교회를 설립(1905)해서

전도사역에 전념했던 미국인 선교사 찰스 E. 카우만.

그는 당시 한국에도 두 차례 방문하여 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설립을 주도했지만,

그 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아내인 L. B. 카우만과 미국으로

돌아가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감당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며

간병하던 아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우만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56세였습니다.

구원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남편은 그렇게 갔지만,

레티 카우만 여사는 절망 중에서 더 많은 믿음의 과정을

배우게됩니다. 그 고난 속에서 되레 믿음의 여인으로 성숙한

것입니다. 해서 이후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라는 저서를

내는 등 문서 및 문필을 통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사역을

하다가 90세였던 1960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과연 성경 속의 위인들, 저 레티 카우만 여사 같은 믿음의 여인도 처음부터 믿음의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 믿음의 훈련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카우만 여사가 예로 든 저 요셉의 경우부터가 그렇습니다. 요셉의 사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당시로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의미나 그 해법을 좀 상고해봅시다.

 


구약시대 야곱의 12아들중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남다른 채색옷(a richly ornamented robe)’을 지어 입힐 만큼,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시기하며 미워하리만큼 각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이 네 아내 중 그의 첫사랑이자 각별히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노년에 얻은 아들이자 그 어미 라헬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일찍 죽은 때문이었을까요. 아무튼 그런 요셉은 ‘17세의 소년때 기이한 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 얘기를 차라리 순진하도록 그대로 자기 형들에게 털어놓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이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세기37:7~9)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와 열한 형제가 요셉에게 경배한다는 내용의 꿈입니다. 가부장(家父長)제도였던 당시도 지금도 그것은 황당한 꿈이자 차라리 건방진 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요셉을 편애하던 아버지 야곱마저도 그런 그의 꿈이나 말을 꾸짖습니다.” 그러나 야곱 자신도 지난날 황량한 광야에서 홀로 돌베개를 베고 잘 때 꾸었던 기묘한 꿈 곧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꿈을 통해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의 신비를 익히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28:15)

 


그 후 과연 저 꿈, 저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의 생애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시대를 포함한 구약 당시, ‘이나 환상은 그렇듯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가 계시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그 꿈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은 그래서 요셉의 저 꿈 저 말 역시 마음에 간직해둡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을 간직해두었더라.-(창세기37:11)

 


예나 지금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 곧 성경 말씀은 과연 그것을 묵상하며 심령에 잘 간직해두는 자의 몫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자의 몫도 아니고, 허영을 좇아 부러워하며 두 마음을 품는 자의 몫도 아니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쉽게 분노하는 자의 몫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형들의 시기하다곧 히브리어 카나의심하다, 부러워하다, 질투하다, 노골적으로 분노하다등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자그때 그것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창세기4:5) 그래서 들에 있을 때 의로운 아우 아벨을 쳐 죽여 버린 형 가인의 경우처럼 안색이 변할 만큼 노골적, 그렇게 심한 시기이자 심한 분노를 의미합니다.

 


실인즉 그래서 저 요셉의 이복형들 역시 그 후 양떼를 치던 들에서 꿈꾸는 자요셉을 죽여 버리고자 모의합니다. 그때 그래도 장남인 르우벤의 만류에 의해 요셉을 죽이진 않았지만 그러나 저들은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를 받고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립니다. 그렇게 요셉은 낯선 이방 땅 애굽으로 팔려가고, 이복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그가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거짓소식으로 아버지 야곱을 속입니다.

 


그렇게 요셉의 종살이이자 당시로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은 시작이 됩니다. 요셉은 아직 어린 십대 청소년입니다. 어떤 응분의 죄악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성품이 영적으로 민감하고 가식이 없고 솔직해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의로운 요셉인데 그가 왜 애굽 땅에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동침을 요구하던 주인 보디발 장군 아내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쳤다가 되레 강간 미수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고난의 삶을 살아야만했던가?

요셉 역시 인간인지라 당시로선 몹시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자기를 종으로 팔아버린 원수인 이복형들에 대한 증오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하늘을 향해 자주 “Why? Why me?”라고 부르짖기도 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그 연유를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후에는 알았습니다.“ 연단과 성숙의 13년 세월 그 후의 역사 곧 요셉이 감옥에서 되레 바로 왕이 꾼 ’7년 대풍년과 7년 대흉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적인 꿈을 해몽하기 위해 갈 수 있는 인연과 길과 기회가 열렸고, 이후 바로 왕의 전적 신임과 총애를 입고 애굽의 2인자총리가 된 후 역시 가나안 땅에 임한 대흉년의 와중에서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입하고자 찾아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함으로, 17살 때 꾸었던 그 이 세상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적이자 예언적이자 섭리적인 꿈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종으로 팔려간 것은 한마디로,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놓고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인과응보(因果應報)적으로 묻던 제자들에게 답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이자 말씀 그대로, “자기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한복음9:3)이었습니다.

 


요셉과 저 이복형들과의 해후는 무려 20년 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금세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른 체하며 형들이 스스로 회개할 수 있도록 양심을 자극하고 일깨우며 기회를 줍니다. 그러다가 재차 양식을 구하러 오던 때 비로소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 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45:5~8)

 


요셉을 종으로 팔아 애굽땅 이리로 보낸 이는 분명히 이복형들이었습니다. 이복형들이 원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3년 동안이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고난과 설움의 세월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저 고난의 세월은 과연 신앙 및 인격이 성숙하는 세월이었습니다. 해서 요셉은 그 모든 고난과 설움의 세월이나 운명을 원수들과 나와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로 이해하고 풀어냈습니다. 한마디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보복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형들을 되레 용서하고 위로하며 안심시키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시한 가족 전체를 애굽 땅으로 모셔옵니다. 따라서 요셉은 도합 70인 이스라엘 가족의 구원자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다가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을 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죽음 문제까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 카우만 여사 역시 인간인지라 병든 남편을 위해 간병하면서 때론 하늘을 향해 “Why? why me?”라고 부르짖었을 법도 하니까요. 낯설고 물설고 언어도 설은 동양 땅에 가서 주의 일에 전념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선교사 부부 카우만입니다. 그런 남편에게 몹쓸 병을 주시고, 끝내 그 병으로 남편을 불러 가신 하나님이 무심하고 야속하다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 이십에 팔려 낯선 나라 애굽에 종으로 끌려간 저 요셉처럼 그렇게 병고에 의해 하늘나라로 끌려간(?) 카우만 선교사가 하늘나라(天國)’에서 되레 애굽총리같은 귀인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영적 기근을 앓으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외려 축복일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죽음의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도 그랬지요. “세상에 있는 당신들이 더 행복할지 내가 더 행복할지는 신()만이 안다.

 


기실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내내 살 수 있다면, 죽은 자가 세상에서 산 자보다 되레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 및 천국의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꿈 혹은 환상 혹은 신비체험을 통해 삼층천(三層天)’이리는 하늘나라까지 들려 올라가보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5:8)고 공공연하게 고백했습니다. 막말로 빨리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과연 평소부터 천국을 준비하고 사는 자는 그렇듯 살고 죽는 것조차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멋진 자유입니까. 얼마나 명쾌한 진리입니까.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관이자 고상한 우주관입니까. 저는 그 자체가 좋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입니다. 기복이나 만사형통을 위해서 믿은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고난과 고통과 불행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다 그렇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천국과 나와의 관계에서 능히 풀어지고 명쾌하게 풀어지는 그 영성의 비밀이자 진리가 좋아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생 고난의 해법은 한마디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한복음9:3)이자 그 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자 말씀이 응할 때까지”(시편105:19)라는 그것입니다. 금세 및 내세에서의 구원의 문제라는 것. ‘구원의, 구원에 의한, 구원을 위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 요셉에게 주어진 13년 동안의 고난이나 악연(惡緣)은 요셉의 구원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및 민족의 구원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자 섭리였습니다. 그렇듯 저 카우만 선교사의 병고(病苦)나 그 기간 역시 그가 하늘나라 총리급(?) 영혼이기에 그 구원에 합당한 영혼으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자 섭리였을 것입니다. 고난이나 병고는 인간의 영혼을 단련시켜 순금(gold)으로”(*욥기23:10) 승화시켜줄 수 있으니까요.

 


오늘의 인생 우리 각자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이나 악연이나 병고 등에 대한 이해나 해법도 다를 바 없습니다. 크든 작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주신 곧 예비하신 우리 몫의 일 내지 사명이 있고 응분의 십자가도 운명도 수명도 각각 있기 마련이니까요. 해서 저 역시 한마디로 인생의 고난 때문에 아니 고난 덕분에’,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욥기42:5)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종이자 작은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고난 자체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자 긍휼이자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 모든 고난의 해법은, 저 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죄인들인 이복형들이 이스라엘 그들 가족을 위해 예비 되었던 구원자인 요셉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모든 범사가 합력해서 ()’이 되고 구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성사되고 확인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죄인들인 우리는 인류를 위한 영원한 구원자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성사되고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당대와 미래를 포함한 이중적 계시의 의미이자 현세적 거듭남내세적 부활로 인도하시는 뜻입니다. ‘금세의 천국과 내세의 천국이중적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고난이나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는 명쾌한 해법이자 진리가 과연 거기 있습니다.

 


-너희가 (*예수)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