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인생의 참 목적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형선 2018. 11. 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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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요,

 비추고 싶은 빛이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요,

 내가 나누고 싶은 기쁨이요,

 내 주위에 퍼뜨리고 싶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을 원한다면

 너그럽게 자신을 내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척이나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랑과 관계없다면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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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마더 테레사 수녀는

87년의 세상여정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분이 남긴 사랑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고 평화롭게 해줍니다.

과연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사랑이었습니다.

인간 자기의 사랑이 아니고, ‘나의 전부이자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자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었던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아가페)하라.

 (*예수)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13:34~35)

 


마더 테레사는 미인도 지식인도 학자도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신부도 목사도 신학박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파나 교파의식을 넘어서서 저들 그 누구보다도 마더 테레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면목과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 및 공감하게 됩니다. 그 요인은 한마디로 거기 말씀을 행하는사랑의 삶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엔 종파나 교파가 있지만, ‘사랑엔 종파도 교파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섬기는참 사랑이나 참 가치는 과연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지식 등 그 소유나 이른바 일류내지 주류라는 신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의 성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인생 우리는 세상의 저 소유나 신분상승을 위해, 그것에의 성공이나 성취를 위해 유아시절부터 치열하도록 경쟁하며 삽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삽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배우면서 세뇌당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이자 삶의 푯대일까요? 일류나 주류가 되고 부자나 권력자가 되어 남보다 큰 집에서 남보다 높은 담()을 쌓아놓고 사는 삶 그 자체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까요?

 


물론 우리는 너나없이 세상 내지 세속의 지평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지평을 하늘에서 좀 내려다봅시다. 성공한 부자나 권력자라해서 네 끼 다섯 끼 먹고 살던가요? 시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너무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되레 영양과잉이 되어 각종 성인병을 일으킨다고 하잖아요?

사람은 너나없이 간사한 동물이기도 합니다. 해서 배가 부르면정욕을 탐하게 되고, 내로라하는 이생의 자랑이나 교만에 절로 빠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2:16~17)

 


그럼 영원히 거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하늘의 뜻,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이 진실로 기뻐하시는 인생의 목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삶의 목표이자 명제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 해답인즉 두 계명으로 집약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인생의 목적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 그것이 인생의 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빈 자루는 서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빈 부대는 자기도 설 수 없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서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건실하게 노력해서 부나 권력을 소유도 해야 하지만, ‘세상에서의 내 성공그 자체가 인생의 참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결국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전도서1:2) 인생의 목적이나 삶의 목표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고, 그 신기루 같은 허영이나 허세를 다투어 선망해서도 안 될 절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복음6:9)

 


주기도문맨 첫 구절인 저 말씀에 나오는 거룩하다곧 헬라어 하기아조성별하다(consecrate), 성화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자 하나님의 뜻인 인생 첫째의 목적과 그와 같은 둘째의 목적에 대한 거룩한 분별력이 맨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너나없이 성화(聖化)’되기는커녕 금세 세속화되기 마련이니까요.

 


오늘의 한국교회가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이나 봉사를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거하기는커녕 벌써부터 외려 사회의 비판이나 지탄을 받는 것은 인생의 지상목적이자 기독교의 지상목적에 대한 거룩한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적 인식이 성화의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되레 세속화의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한 술 더 떠 챙기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챙기는 그것보다 차라리 더 비열하고 가증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영원히 거하는인생의 목적이자 신앙의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그런 삶 그런 관계를 배우는 그 자체입니다. 성공한 특정 대형목회자나 신령한 교주에게 배우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배워야하는 그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내 왕국을 이루는, 그런 이기적이자 자기중심적인 성공이나 성취가 인생이나 신앙의 진정한 목적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도 했지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체하는

 태도나 동정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다정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체하는 태도나 동정심으로 하는 그런 선행이나 봉사는 그 생명이 길지 못합니다. 되레 내 것 주고 욕 얻어먹기십상입니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다정함이라는 형제의식이자 인격관계입니다.

죄인이나 병자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외식적인 겸손도 아니었고, 많이 가진 자나 높은 자가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그런 시혜적 동정심도 아니었습니다. 저들을 섬기는어버이 같은 헌신적 희생적 사랑이었습니다. 심령의 감동 및 감화는 늘 사심 없이 섬기는 사랑거기서 옵니다.



따라서 내 세상 야망이나 야심이나 탐욕이나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그것은 막말로 하나님을 직업적으로 이용 내지 활용하는 것이지 참 신앙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참 제자가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관계이자 목적과 방법이 전도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짓복음입니다. 설령 병자를 고치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쳐도 그것은 거짓복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령하다는 여타 종교인이나 무당도 때론 병자를 고치기도 하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은 하나입니다. ‘부활의 길, 생명의 길은 하나입니다. 너나 내가 안 믿어도, 못 믿어도 하나입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죽음의 길을 가는 내 길그리스도의 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내 손에 움켜쥔 것이 많고 내 배에 채워진 것이 가득한 부자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좋은, 영원히 좋은, 그 어떤 것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자기를 부인하는자기를 비우는지혜의 절대 필요성도 과연 거기 있습니다.

 


물론 국내외를 막론하고 약육강식의 논리, 힘 내지 패권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무대는 냉혹합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밀림처럼 동물의 세계처럼 살벌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처럼 살다가 동물처럼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네가 허무한 동물이라고 해서 나도 허무한 동물이 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네 속과 내 속의 동물을 볼수록 그런 자기를 부인하고그런 내 길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택하는 그것이 정작 참 믿음이자 참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듯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사랑하는 법이자 삶을 배우기 위한 시작이자 바탕입니다. 거기서 머물러서도 끝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관계보다 성숙되고 성화(聖化)된 관계가 곧 사랑의 관계이니까요. 해서 남달리 믿음으로 의롭게 됨(以信得義, 로마서1:17)’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부터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2~3)

 


진실로 그렇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태산 같은 대형교회나 기업을 이뤘다 해도, ‘군림하는 사랑이 아닌 섬기는 사랑이 없으면,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소유를 다 털어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도록 수행하고 헌신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온 인생 모두에게 내 소유는 애초부터 없었고, ‘내 몸의 정체성 역시 흙이자 티끌이니까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며

심문하던 현장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했던수제자 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심한 자괴심과 무력감에 빠져 있던 베드로를 몸소 다시

찾아주십니다. 그때 주님께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시몬 요안노우, 아가파스 메;)”라고 두 번 묻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 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스스로 부끄러워 신적 거룩한 사랑인 아가페로 답하진 못하고,

절친한 친구의 우정(友情) 같은 사랑필리오로 두 번 다 답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나 혈육 간의 사랑인 스톨게와는 구별된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도 세 번째는 필리오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시몬 요안노우, 필레이스 메;)” 그럼 네가 나를 절친한 친구만큼이라도 사랑하느냐? 그런 의미가 되겠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하며역시 필리오로 이상과 동일한 세 번째 고백을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지만그래도 사랑의 관계라는 고백이 되겠지요.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 목회자의 사명이자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선한 목자가 되려면 믿음의 관계보다 성숙되고 성화(聖化)사랑의 관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섬기는 사랑이자 헌신적 사랑의 관계가 절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 번이나 강조하는 신신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삯꾼이나 직업종교인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질문 저 말씀은 베드로나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나아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세 번이나 강조하는 주님의 실존적 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저 질문에 우리는 오늘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내가 주를 믿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기도 내 소원 이뤄주시면 내가 주를 믿겠나이다? 주의 권좌 좌우편에 앉게 해주시면 내가 주를 믿겠나이다?

다 아닐 것입니다. '참 사랑'은 이기적인 조건도 거래도 피차 없는 법이잖아요. 사랑은 이유나 논리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거잖아요.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치나 정의의 문제가 이치나 정의의 문제로 끝나면 부부도 민족도 서로 증오하며 '이혼'하기 마련입니다. '참 사랑'은 서로의 차이나 다름이나 틀림은 물론이고 심지어 허다한 죄나 허물까지도 덮어줍니다. '정의'라는 저울질의 힘보다 그 힘이나 배려의 차원이 높고 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사랑일 때 비로소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진즉 죽어 마땅한 죄인인 내가 오늘 입고 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적으로 '은혜'이자 '긍휼'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 내 실존의 정체성 자체부터가 '빚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곧 신랑의 사랑에는 신부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합일(合一)의 관계이자 상호 인격관계이자 소통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의미입니다. ‘신랑믿는거기서 끝나서는 안 되다는 것입니다. 내 복, 내 소원 성취를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는 거기서 끝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한 주께서 주신 새 계명대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게 응답할 수 있는 저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아가페)이라.-(고린도전서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