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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려들지만, 성령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셨던 예수님을 보라.
그분이 이 땅에 살면서 활동하실 때,
세상이 그분을 얼마나 반대하고 핍박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는 언제나 핍박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독교를 세상에
잘 적응하는 종교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에 적응하려는 것은 십자가 때문에 당할지도 모르는
수모를 피하고자 함이 아닌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가 말씀의 빛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그것이다.
-에이든 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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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때문일까요.
스스로 가야할 생명의 길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요.
찬바람이 냉대하듯 사납게 불어도
오가는 발길에 거칠게 채여도,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낙엽이
우리네 인생처럼 서성거리고
있는 12월의 거리.
정월은 있어도
13월은 여전히 없는 것을.
이 겨울에 잘 죽어야
오는 봄에 잘 사는 것을.
12월의 거리
어디에선가 문득,
종말을 분별하는
시대의 복음처럼 문득,
성탄 캐럴이 울려 퍼지면
우리는 겨울나무처럼 서서
낙엽이 되어 비워진
저 공간 저 바람 속에서
아득한 과거의 향수 같은
모음을 듣습니다.
푸른 꿈 먹던 계절일 수도 있고,
배고픈 설움의 시절일 수도 있고,
고뇌하며 방황하던 계절일 수도 있고,
끙끙 앓던 고통의 시절일 수도 있는
고향의 모음을 듣습니다.
하늘이 허락하신
그만큼의 인연에 감사하면
버릴 인연은 없는 것을.
더 바라면 욕심인 것을.
하늘이 허락하신
그만큼의 은혜에 자족하면
버릴 시절은 없는 것을.
더 바라면 탐욕인 것을.
좋은 날 궂은 날,
이른 비 늦은 비,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고 구원이 되고
속사람의 인격이 되게 하신,
아하, 그렇게 우리를 키우신
본향의 모음을 듣습니다.
또 한해의 세월은 가고,
외로운 실존처럼
낯선 기회처럼
홀로 남은 달력은
그래서 문득 우리에게
현존의 의미를 묻습니다.
덧없는 세월을 이기는,
허무한 삶을 이기는,
존재의 가치를 다시 묻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
무성한 이념의 잎사귀도
지성이라는 현학의 잎사귀도
다 낙엽이 된 지금.
더 단순해진 화두만 남습니다.
마지막 한 장의 화두만 남습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진실로 영원한
생명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선한 진실로 선한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justice)를 행하며,
인자(mercy))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인생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임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삶의 참 가치나 진리가 무엇임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과연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아닙니다. 세상 인간들의 주된 관심이나 거래처럼 재물이나 제물이나 뇌물을 받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서 저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한마디로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삶이라고 정의 및 집약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 내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예배나 양 무리와의 관계만도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웃 내지 인간과의 관계이자 사회정의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양심’이 되어야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더 중한 바’의 가치를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justice)와
긍휼(mercy)과 믿음(faithfulness)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23:23)
따라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이나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고 되레 사회적 비판과 비하의 대상이 된 것은, 교회 안에서의 드림이나 관계보다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토저 목사님의 언급처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가 되었기에 세상의 적대나 견제나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가 있고 거기에 미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는 종교”가 되어 너무 세속화되었기에 받고 있는 비판이자 비하라면,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이나 세상의 정권 또는 물권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받는 결과론적 적대라면, 그것은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할” 어둠의 문제이자 생명 및 생존 자체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20세기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생전에 ‘개혁의 메시지’를 줄기차게 선포했던 저 에이든 토저 목사님의 말씀에 재삼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시대 선지자’ 미가나 ‘20세기 선지자’ 토저 목사님이 각각 저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저분들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의 반석 위에 지어진 신앙인격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13:16~17)
대형교회를 이룬 목회자는 물론이고, 대형기업이나 대형권력을 이룬 인간 그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될 절대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영성의 비밀을 망각하고 내로라 자만 내지 교만 내지 독선에 빠지면 되레 자기가 불행해지고 집단의 신앙풍토마저 절로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동행(同行)’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길을 같이 감, 길을 같이 가는 사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 ’동행‘이고 ’길을 함께 가는 무리’가 ‘일행’이 되는데, 일행과는 달리 동행은 그 관계가 일대의 일의 의미가 강합니다. 낯선 그리고 물릴 수도 없는 ‘나그네길’, 단 한번뿐인 여정을 가는 인생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파스칼의 명언처럼 ‘생각하는 갈대’인 인생 우리는 유신론자 무신론자 유물론자를 막론하고, 어차피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동행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절해무인고도에서 홀로 사는 사람도 섬과 바다와 동물 등 자연과 함께 동행하며 하늘 아래서 산다는 큰 틀의 의미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자연이나 동물과 함께 사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 오묘한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 그 ‘조물주’와 인격관계를 이루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대화하며 ‘겸손하게,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진실로 지혜와 복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해서 그런 사람은 절해무인고도에서도, 극한의 불운이나 환난이나 역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도다”(요한복음8:29)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는 여유와 평안 및 진리와 생명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14:6~7)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신 ‘예수의 진면목’을 진실로 알게 되면 절로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저 관계의 신비는, ‘영(靈)이신 하나님’의 역사 곧 참 “성령의 역사는 하나로 통한다”는 일체(一體)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에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열려진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사도 및 제자들이나 신앙위인들은 그래서 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또한 ‘사도행전’이자 ‘성령행전’은 예나 지금이나 여일하게 살아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제자들도 주님께 말씀만 배웠을 때는 실상인즉 그런 ‘예수의 진면목’을 맛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말씀을 들은 제자 빌립부터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8)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선 제자들에게 장차 세상에 임할,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께 구하여 세상에 보내주실 성령“의 미래적 비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한복음14:16~18)
‘또 다른 보혜사(Counselor)’이자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거하고 또 너희 속에 계시리라”는 저 말씀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너희와 동행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과 동행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이자 자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람’ 같은 ‘성령’(*퓌뉘마)을 통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예나 지금이나 제자들과 동행하고 있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것이나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거나 거기 연연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한마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본받아” 성별 및 성화되기는커녕 되레 세속화 내지 속물화되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토저 목사님의 저 언급처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기독교를 세상에 잘 적응하는 종교로 만드는” 그것이라면 수량적 대 부흥 및 대형 교회를 이뤘다 쳐도 ‘나중의’ 열매 그것은 자신에게도 교회에게도 피차 불행할 것입니다. 거룩했던 ‘처음사랑’을 잃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자”의 경우가 허다하도록 많은 세상이니까요.
현자 솔로몬이 그랬지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는다“(잠언13:20)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참 ‘지혜로운 자’입니까? 솔로몬? 아닙니다. 성공한 대형목회자? 유학파 신학박사? 다 아닙니다. 성자 성녀? 역시 아닙니다. 물론 저들에게도 배울 건 배워야겠지만, 그럴수록 ‘거룩한 분별력’은 더욱 필요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주인(主)’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지 못하면 ‘종’이 절로 ‘주인’보다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커지는 그곳엔 절로 악령의 시험과 미혹이 난무하기 마련입니다. 구속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 지혜'는 물론이고 '솔로몬의 지혜'조차도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혜'였다는 그 한계를 우리는 늘 겸손하게 명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부활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완성된 지혜’이자 ‘참 지혜’이자 ‘영원한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더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에서 당하는 일체의 고난도 불행도 비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조금이라도 더 ‘세상의 정의’이자 ‘세상의 사랑’이자 '세상의 선한 양심’이 될 수 있는 저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볼지어다, (*예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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