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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이 완악한 사람들의 고집을
꺾고자 하신다면, 그들에게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온유하게 강림하심으로써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조차
이미 상실해버린 죄인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그들이 간구하지 않은 자비를 굳이
베풀고자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거룩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절대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것은 오히려 공의로운 방법이 못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마음을 다 바쳐 중심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숨어계신다면 그것 역시 공의로운 처사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온전히
인식시켜주시고자 했다. 그리하여 온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시고,
철저히 하나님을 기피하는 자들에게는 또한 숨어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시고,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빛으로 나타내시고, 반대로 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어둠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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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제정된
실정법인 헌법 형법 민법 등 국법(國法)을
위반한 사람들을 이른바 ‘죄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속된 그런 죄수들이 자유를 잃고
갇혀 사는 곳을 ‘교도소’라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내지 ‘하나님의 왕국’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친히 들려주신 ‘금기의 선악과(善惡果)’라는
최초의 법이 그것이고, 이후 선지자 모세 등을 통해 친히
계시해주신 ‘율법(律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그 후손인 이스라엘도 그리고 오늘의 인간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위반했습니다.
죄다 ‘죄인들’이 된 것입니다.
해서 지구촌 자체가 ‘하나님의 교도소’이자
‘하나님의 병원’이 되어버린 형국에 이른 것입니다.
저 파스칼의 언급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런 ‘교도소’에 갇힌 “완악한 사람들의 고집을 꺾고자 하신다면” 그곳에 연거푸 번개나 우렛소리와 함께 벼락을 때리는 이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고, 하늘에서 ”너희들, 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다 죽는다! 당장 뒈진다!“고 천하가 진동하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연일 공포의 으름장을 놀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소에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온유하게 강림하심으로서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실로 ‘비둘기처럼’ 온유하게 강림하셨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모세가 광야 40년 세월을 인도하는 중에, 감사하기는커녕 걸핏하면 되레 자신을 향해 원망 불평하며 대적하던 ‘완악한 백성들’을 향해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민수기20:10)라고 우렛소리처럼(?) 꾸짖으며, 저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라도 하듯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두드린 것처럼, 그렇게라도 해야 직성이나 울화가 풀리고 후련하실 텐데 왜 그런 모세를 외려 꾸짖고 정죄하며 예나 지금이나 오래 참으시며 침묵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 및 사랑하는 신앙은 타자(他者)의 인간적 강요나 간섭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과의 사랑이든, 인간 남녀의 사랑이든, 모든 신뢰 및 사랑의 정서나 감정은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발현되는 것은 분명 아니니까요. 세상 어버이가 다 큰 자식에게 충의나 효도를 강요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외려 어버이의 입만 아프기 십상인 것처럼 말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공의이자 창조 질서이자 자연의 질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서 저 파스칼은 그런 이치를 되레 ‘하나님의 공의(公義)’라고 정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조차 이미 상실해버린 죄인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그들이 간구하지 않은 자비를 굳이
베풀고자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거룩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절대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것은 오히려 공의로운 방법이 못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마음을 다 바쳐 중심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숨어계신다면 그것 역시 공의로운 처사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타내심’과 ‘숨어계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이고 그 자체에 심오한 영성의 비밀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간구’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회개’하지도 않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며 하나님을 ‘나타내심’은 되레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질서도 아닙니다.
죄인에게 응분의 심판을 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로 이로” 심판하는 것이 ‘공의’이자 ‘율법’이자 질서라는 것입니다. 한편 제물인 ‘대속(代贖)의 희생양’ 없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 역시 오히려, 절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세상을 위한 질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창세기1:2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인간들 곧 자녀들이 타락한 ‘탕자(蕩子)’이자 죄인들이 되어갈수록 스스로 ‘한탄’하시며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많이 ‘고심’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차라리 당연한 부성애이자 모성애이니까요.
그래서 죄인들인 인생 우리들을 위한 구원의 해법으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는 제물 곧 ‘대속(代贖)의 희생양’이 됨으로써 ‘공의’를 이루고, 그 ‘대속의 희생양’의 비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제물’을 들고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임마누엘 언약’(이사야7:14)이자 ‘새 언약’(예레미야31:31)을 구약시대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고, 그 언약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내 죄악’을 짊어지고 ‘내 대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이자 복음의 시대는 열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 그래서도 안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구원의 해법이자 기회는 위로부터 주어졌지만, 여전히 먼저 자발적인 ‘내 회개, 내 간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탄생(聖誕)’을 통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제일성으로 “회개하라(Repent),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4:1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아가 자발적 구도(求道)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11:)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저 ‘영, 성령’ 곧 헬라어 ‘퓌뉘마’는 ‘바람’과 동의어입니다. ‘영’은 ‘바람’이 그렇듯 예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숨어계심’의 존재라는 것. 그러나 ‘바람’이 또한 그렇듯 분명히 살아있는 실재이자 운동력을 가진 실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그렇게 여일하게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聖靈)을 주심’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나타내심’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의 하늘 아버지이고, 너는 나의 아들이다”라는 영적 관계의 확인이자 인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자든 양자 입양을 통해서든 ‘재벌의 자녀’나 ‘대통령의 자녀’가 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세상 의식주 문제 같은 생활고 염려에 매일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상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당연한 상식이나 지식은 잘 알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당연한 참 상식이나 참 지식은 모른다는 그것입니다. 저들의 자녀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녀’의 비밀한 배경과 당연한 소유를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오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7:32~33)
기원형의 말씀도, 가능성의 말씀도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다 명령형이자 단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살든지 죽든지” 그렇게 확실하게 믿어야하고,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차원적 저런 생활고 염려보다, “주의 일을 염려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의 사정, 나의 필요’를 너무 모르고 계신다거나 무관심하다고 느끼질 때는 내가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아닙니다. 외려 더욱 겸허하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올바른 영적 관계인지의 여부를 심사숙고해봐야 할 때입니다. 체면 운운하며 궂은일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녀나 자기를 고집하며 다른 길을 가는 자녀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그것은, 올바른 신앙도 관계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우리에게 그 어떤 것이 꼭 필요하다면 설령 구하지 않아도 ‘대궐’도 주시고, ‘명품’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치이자 허영이자 이웃 사랑과는 배치되는 과시이자 낭비라면 구해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인 우리네 인생 ‘전체의 틀’에서 볼 때 되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거나 우리를 시험이나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 사욕이자 탐욕에서 비롯된 그것이라면 더더욱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되레 ‘진실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부끄러운 ‘내 사욕, 내 탐욕, 내 투기’에 응답해주시는 것은, ‘내 타락, 내 죄악’에 대해 모르거나 눈감아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결코 아니라는 그것입니다. 그것은 외려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신”(로마서1:26) 자식 혹은 이미 ‘내버린 자식’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막의 교부들’처럼 “우둔한 제가 잘못된 길로 가면 채찍으로라도 쳐서 바로 잡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영적으로 민감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타내심’ 그 영성의 비밀 안에서 늘 살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세상이 모르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가치이자 생명이자 복된 소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숨어계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비유로 들어 언급하신 ‘포도나무’의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분명히 오늘 우리의 눈에 보입니다. ‘나타내심’의 하나님이자 ‘보이는 하나님’ 그 창조주의 비밀이자 신비가 자연속의 저 포도나무의 비전 및 창조질서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한복음15:5~6)
예나 지금이나 “나(예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저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반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포도나무’도 나름대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입으로 들어가 뒤로 빠지는’ 열매입니다. ‘생명의 열매’가 아닌 ‘썩을 열매’이자 끝이 ‘허무한 열매’더라는 것. 사이비 종교 ‘교주의 열매’는 물론이고, 일국의 ‘대통령의 열매’조차도 정권이 바뀌면 금세 허무해지는 그것 아니던가요?
과연 ‘세상의 열매’ 그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5:22)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를 또한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더 기쁘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해서 하나님과 독대(獨對)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타내심’ 그 진면목과 일 대 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 사람들은 그래서 하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가지에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고 해서 스스로 교만해져 ‘포도나무’를 떠나 내로라 자기 영광의 길을 간 ‘가지’는 그래서 또한 불행할 것입니다. 결국엔 세상 내지 사회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되레 비판 및 비하하며 불에 던져 사르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자기 열매도 자기 영광도 자기 생명조차도, 허무하도록 잠깐이자 순간인 그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계심’의 하나님일까요, ‘나타내심’의 하나님일까요? 인간 나도 사랑하지만 인간 너도 사랑하는 ‘공의’와 ‘사랑’의 ‘온전하신 하나님’일까요, 이기적인 내 야심 내 야망의 성취를 위한 ‘반편의 하나님’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목하 ‘한국교회’라는 “마른 가지를 모아서 불에 던져 사르고” 있는 현실인 것은 혹여 아닐까요?
‘주인’을 떠난 ‘종’이나 ‘가지(枝)’의 결국은 하나 같이 불행했습니다. 아무쪼록 ‘온전하신 하나님’의 ‘나타내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참 포도나무’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겸손하게 그리고 사심 없이 그 안에 꼭 붙어사는 가지의 삶을 통해, 자기 몫의 ‘선한 열매’이자 ‘성령의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맺을 수 있는 저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잠언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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