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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많고 할 일이 너무 많은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소음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가 매우 어렵다.
종종 우리는 귀가 멀어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시는지
알지 못하고,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부르시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게 된다.
‘부조리하다(absurd)’는 말속에는 라틴어
‘수르두스(surdus)’라는 어근이 들어가 있는데 그 말은
‘귀가 멀었다(deaf)’라는 뜻이다. 영적 생활이 훈련을
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좀처럼 듣지를 못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언제나 아버지의 음성에 유의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도이다. 모든 기도의 핵은 귀로
듣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것이다.
‧‧‧ 고독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런 소망스러운 임재를 점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기쁨과
평화의 시작을 지금(現世)부터 맛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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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첨단문명사회’를 사는 오늘의
우리는 저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의 언급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소음이 너무 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각종 매스컴이나 상업광고는
물론이고, 이 시대를 점령한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이나 각종 SNS 기능도 한편으론 ‘바깥의 큰
소음‘이자 ‘잡다한 소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손에 스마트폰이 없으면 금세
불안해지는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면서요.
그러나 그런 ‘바깥의 소음’이나 다수(多數)가 곧 세력이
되는 ‘군중의 소리’가 인생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평안의 소리’는 아니고, ‘생명의 소리’도 아닐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5: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저 말씀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생 우리는 영혼이 ‘죽은 자들’입니다. 스스로 거듭난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현재적으로 듣지 못하면 여전히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저 헨리 나우웬 교수의 언급처럼 “고독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늘 노력해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늘 ‘듣는 자’가 늘 ‘살아날 수 있고’ 늘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쁜 세상일이나 너무 크고 강한 ‘바깥의 소음’으로 인해 귀가 멀어져 하나님의 음성이자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면 절로 소통의 관계는 단절되기 마련이고,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관계가 단절되면 그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실존주의 화두인 인간 우리의 ‘부조리(不條理)한 삶’도 실상인즉 거기서 비롯됩니다. “귀가 멀어” 정작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대개가 때론 중얼거리며 때론 부르짖으며 우리의 이런 저런 ‘내 사정’에 대한 ‘내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영육 간에 형통하고 복 받기를 희구하는데 저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도이다. 모든 기도의 핵은 귀로 듣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듣는 것이고 그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뜻,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성까지도 잘 들을 수 있는 그것이 ‘참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臨在) 앞에서' 올바로 서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을 수 있는, 일대 일로 서있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고독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저 고독은 ‘외로운’ 고독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나우웬 교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기쁨과 평화의 시작을 지금(現世)부터 맛볼 수 있게 된다”고 체험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럴 것이 그것은 하나님과 영적 사랑을 나누기 위한 고독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모든 사랑은 은밀한 데서 옵니다. ‘일대 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 곁눈 팔거나 외도하는 남편 혹은 아내와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참된 기도‘를 통해 늘 깨어 있는 사람들이자 늘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독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 나누는 그 기쁨 그 평안 그 사랑을 세상과 나누는 그 어떤 사랑이나 가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부터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언제나 아버지의 음성에 유의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셨다.“
실인즉 ‘12살’ 소년시절부터 그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부모님과 친족들을 따라 ‘관례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는 그 일행 속에 없었습니다. ‘하룻길을 간 후’ 붐비는 무리의 행렬에서 그것을 확인한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수소문합니다. ‘사흘 후’ 비로소 찾은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쟁쟁한 선생들 중에 앉아 감히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탓하자 그때 소년 예수는 이렇게 오묘한 답변을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누가복음2:49~50)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영성의 비밀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광야로 나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는’(마태복음4:2) ‘고독의 훈련’을 통해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후에도 무리를 떠나 홀로 ‘산’이나 ‘바다’나 ‘골방’ 등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고독의 훈련’을 즐겨하셨다는 것입니다.
‘출(出)애굽의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도 당대의 문명국가였던 애굽의 공주의 양자이자 왕자 신분으로 애굽 학문에 통달한 박사였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의 유식한 학문이나 인간적 혈기 내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세이던 모세를 광야로 인도해서 이후 40년 동안이나 ‘광야 훈련’이자 ‘고독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이렇게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3:4`5))
황량한 광야 40년 세월의 ‘영성 훈련’을 통해 비밀한 그리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모세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인격적 소통관계를 위한 ‘들을 귀’가 열렸을 때 모세는 비로소 ‘출애굽’이라는 민족대과업을 성취할 선지자이자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모세와 함께 거론 또는 비견될 만큼 큰 선지자였던 분단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 왕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적으로 부요했고, 군사력도 막강했습니다. 아합은 자기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보다는 실세인 주변 국가들을 의지하며 그들과 정략결혼도 불사합니다.
그래서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성정이 잔인하고 사악한 이세벨은 ‘비 햇빛 불 등을 주관하여 풍요를 주는 하늘의 신, 바알과 땅의 신, 아세라’라는 우상종교의 열렬한, 차라리 광신적인 숭배자였습니다.
해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이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지자들을 되레 학살하고, 이스라엘 땅에 수년 동안 큰 가뭄이 있으리라고 예언했던 선지자 엘리야를 체포하고자 지명수배령을 내리는 등 박해를 자행하며, 온 이스라엘 왕국을 ‘바알 신’ 왕국으로 만들고자 광분합니다.
그 무렵,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엘리야는 스스로 아합 왕 앞에 나타나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정면대결을 자청합니다. 아합 왕을 통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에 모이도록” 해서, ’여호와의 선지자‘ 이름으로 무려 450대 1, 아니 850대 1의 진검승부를 자청한 것. 해서 “어느 신(神)이 참 하나님인가?”를 가리는 ’갈멜산의 영적 대결‘이 마침내 시행됩니다. 우리 ’배(腹)‘만 부르게 해주면, 우리에게 ’떡‘만 많이 주면, ’여호와‘도 좋고 ’바알‘도 좋다는 식으로 살던 당시의 ’모든 백성‘ 앞에서 시행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하니, 백성들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열왕기상18:21)
이윽고 갈멜산 제단에 각각 송아지를 잡아 번제물로 올려놓고 양측의 선지자가 간구한 후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다”는 엘리야의 제언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그 말이 옳도다” 함으로써 제사의식이 거행됩니다. 엘리야는 그 우선권 내지 우선순위마저 바알 측에 넘겨줍니다.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는 종교 실세일 수도 있는 ‘바알 선지자들’은 번제물을 올려놓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그러자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18:28)까지 합니다.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소제 드릴 때까지” 간구해도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과연 자해(自害) 내지 고행하는 의식이나 남다른 기인 행각을 하는 여타 종교의 그것이 거룩한 신앙도 아니고 진실한 신앙도 아닙니다.
이윽고 엘리야의 순서가 되자 그는 제단 앞에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18:37)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습니다.” 순간 양다리 걸치는 신앙으로 현실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고 있던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탄성 및 환호성을 지릅니다.
나아가 미혹을 일삼던 거짓 종교의 허상에 격분한 백성들은 엘리야의 지휘 아래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사로잡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서 처형시켜버립니다. 아합 왕도 백성들의 그런 격분과 소동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아합 왕을 통해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벨 왕비는 발끈하여 즉각 사신을 보내 엘리야에게 이렇게 악착같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열왕기19:2)
한마디로,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리라”는 것입니다. ‘갈멜산 대결’이라는 큰일을 통해 이룬 큰 승리감에 취해있던 엘리야는, 바알의 무능한 허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만큼 이제 이세벨도 모든 백성들도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심”으로써, 저들이 더 이상 우상숭배를 강요도 고집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내 생각,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세벨의 사악한 대응에 크게 낙심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아합 왕과 모든 백성 앞에서 ‘불 응답’인 이적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혼자 남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나까지 죽도록 내버려두실 것인가?
세상 무슨 일이든 그것이 '내 생각, 내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인간 우리는 누구나 낙심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울하고 답답한 지경에 빠지면 절로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850대 1의 대결까지 담대하게 감행했던 선지자 엘리야는 그 담대함을 잃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19:3)버립니다. 물론 ‘큰 틀’이자 ‘전체의 틀’에서 보자면 그것조차도 ‘고독의 훈련’을 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가 이세벨의 사정권을 피해 광야의 길을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서 간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시쳇말로 그는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도망’ 내지 피신한 경우가 되겠지요.
-엘리야가 (*호렙 산)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뺏으려 하나이다.-(열왕기19:9~10)
엘리야가 들어간 저 ‘굴’ 곧 히브리어 ‘하 함므야라’는 정관사가 있으니까 ‘그 굴’이 되는데, 지난날 선지자 모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때 머물렀던 ‘호렙 산’의 ’바위 틈’(출애굽기33:22), ‘그 굴’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전승이나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하간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굴(cave)’이라는 ‘네 세계, 네 생각, 네 고정관념, 네 한계’에서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환상이든 실제이든 그것을 통한 메시지의 의미가 정작 중요한, 아래의 다양한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a gentle whisper)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19:11~13)
예나 지금이나 인간 우리는 영웅의식이나 돌출의식이 크고 강할수록 세상에서 과시적일만큼 ‘크고 강한’ 대형성공이나 이적이나 표적을 원합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능력이나 ‘지진’이나 ‘불’을 일으키는 능력을 원합니다. 열정적인 엘리야도 왕년에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했던 대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런 이적이나 능력이나 성공 그 자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런 초자연적 이적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적 사건 그 자체와 하나님의 내밀한 임재를 별개로 구별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크고 강한 이적을 행사하며 대형 사역을 하던 엘리야의 외적 신앙인격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엘리야의 내적 신앙인격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런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를 듣고 거기 응답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등 그의 몫으로 남은 사역을 다 마친 후, “홀연히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에 실려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열왕기하11:)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임종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복된 소리‘는 과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입니다. ‘산을 옮기는 이적’이나 ‘대형 바벨탑을 이루는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세미한 말씀’입니다. 세미한 그 음성 그 말씀은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학문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서 그 모든 것을 되레 비우고 낮추는 ‘케노시스의 훈련’이자 ‘고독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보다 성숙한 십자가를 구하는 노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고 강한 일, 화려한 일, 과시적인 일을 선망하며 구하는 우리는 그래서 여전히 너무 바쁘고 그래서 오늘도 바람처럼 임하는 ‘참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자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정말 ‘귀 있는 자’들일까요? 각종 탐욕으로 인해 이미 ‘귀가 먼 자’들인 것은 아닐까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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