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새로운 사람의 성탄'을 위하여

이형선 2018. 12. 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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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나는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이 강림하신 이 기쁜 명절을

 축하할까? 노래를 가지고 할까,

 보배를 가지고 할까? 아니다, 아니다.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하리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어려운

 일에 임할 각오를 새롭게 하리라.

 주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의 죄와 싸울

 결심을 가지고 하리라.

 나사렛 예수님,

 금년 이날 다시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이 결심을 견고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통 출산 방법을 천하게 보셨기

 때문은 아니다. 인류 이상의 생명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강림하신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이것은 죄악 세상에 나타나신

 둘째 아담에게 저절로 부과된 직분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새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데

 필요했다. 나는 성경의 기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변화의 순서로 볼 때,

 또는 우리 인류의 절실한 요구에 비춰 볼 때

 이 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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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예언자이자 복음 전도자였던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69년의 생애를

마치고, 1930년에 하늘나라로 가신 분입니다.

자연 과학자이자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신학자이기도 한 저분은 당대 일본 청년들에게는

물론이고, 대한제국의 청년들 곧 성서조선의 김교신

선생이나 씨알의 소리함석헌 선생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스승이기도 합니다.

 

 

특정 기독교 교파나 교회의 예배의식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이고,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임을 늘 강조하며

복음주의적 신앙을 겸허하게 고백했던 그는,

일본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했기에 핍박도 많이 받았고

기존교회로부터 오해와 경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나 성경 해석을 들은 사람들은

그 영성의 깊이에 하나 같이 감동을 했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쓴

성경주석은 지금 읽어도 영성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 그는 그의 저서 일일일생(一日一生)에서 발췌한 저 상단의 내용처럼,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 모두가 회의 내지 불신하는 심지어 스스로 유식한 목회자나 신학자라는 사람들조차도 불신하는 사례가 많은 성령 잉태동정녀 탄생에 대해 감히 확신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새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데

 필요했다. 나는 성경의 기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변화의 순서로 볼 때,

 또는 우리 인류의 절실한 요구에 비춰 볼 때

 이 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저 역시 이 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는 진실로진실로 새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녀의 관계에 의해 보통 출산의 방법으로 태어난 누군가는 성현군자일 수는 있어도 참 메시아일 수는 없으니까요. ‘죄인인 나와 십 보 백 보 차이일 뿐인 그 피의 정체성이자 그 한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요.

 

 

제 나이도 내년이면 이른바 은퇴 연령이라는 70세가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신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남겨놓고 싶은 제 몫의 신앙 고백이자 간증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제 약한 것을 털어놓자면, 저는 광주서중 일학년 때 부모님을 일시에 여의고 그 몇 년 후 처량한 보행 장애인의 몸까지 되었습니다. 해서 남달리 운명이라는 화두이자 숙제를 끙끙 앓으며 20대 청년시절을 살아야했습니다. Why? Why me? ‘전생(前生)’에 내가 남달리 죄를 많은 지은 때문일까?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시는 것일까?

 

 

생전 시 어머니는 너도 외삼촌처럼 꼭 법관이 되어라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셨지만, 제 목하의 현실은 폐허 같은 밑바닥이자 벼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되레 좌절감이 더 컸던 저는 차라리 미련 없이 자살하고 싶은 비관적 고뇌를 앓으며 문학청년이라는 허울 아래 허무주의자 혹은 개똥철학자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모의 죄와 내 죄라는, 곧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이라는 숙제에서 비롯된 고뇌의 삶이었지만 아울러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또한 사도 바울 같은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이자 한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고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wretched)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1~24)

 

 

곤고한 사람곧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안드로포스비참한, 불쌍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저는 영적 거룩한 고뇌를 앓던 저 사도 바울과는 달리 발등에 떨어진 불운이라는 저급한 차원의 운명 때문에 앓은 고뇌였지만, 분명한 것은 거기서 내가 깨달은 한 법은 저 사도 바울이 깨달은 한 법과 같은 맥락의 의미일 수도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곤고한, 비참한, 가엾은인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자곧 참 메시아는 나처럼 남녀의 관계에 의해 태어난 생물학적 인간으로는 불가능하고, 인간들이 만든 주관적 신()’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 및 통감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물론 불경에서 읽었던 석가도 나보다 훌륭한 분이었고, 공자나 맹자나 노자나 장자도 나보다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성현군자(聖賢君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저런 분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과 운명의 늪에 빠진 내 운명에서의 구원의 문제는 다릅니다. 피차의 정체성이 생물학적 존재큰 도토리작은 도토리를 구원하지 못하듯이 죄성(罪性)이 죄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죄인(罪人)이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 및 통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참 구원은 과연 이나 육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 차원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의 이른바 간사한 마음차원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마음 이상의 세계인 곧 내 한계를 절감하고 오호라라는 탄식을 절로 토로할 수밖에 없는 영적(靈的) 세계의 문제이자 자살을 포함한 모든 죽음이 생명의 문제인 것처럼, ‘생명그 자체의 문제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교리 내지 지식 내지 도()는 있지만 생명이 없는 곧 새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진실로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한 저는 그래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탄생했다성령 잉태거기에 되레 주목한 이후, 문학 서적을 위시한 다른 책들은 죄다 버리고 오직 신학과 성경에만 파묻혀 수년간 들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주관적 신이 아닌 객관적 신이자 살아계신 신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성경을 들이 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운명적이도록, 생사(生死)가 좌우되도록,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는 반증이자 그렇게 인도하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자 긍휼이자 섭리였다는 반증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간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목사가 되고자 해서도 아니고, 이른바 돈이 되는공부도 아니었지만, 너무 목이 말라서 생수가 터질 때까지 성경을 들이 팠습니다. ‘말씀을 팔수록 그 자체에서 조금씩 기묘한 이 보이고, ‘생명이 보이고, ‘생수가 나오니까 계속 들이 파게 되더라고요. ‘광야의 반석같은 내 운명이 조금씩 터지면서 생수가 나오니까, ‘재 가운데 앉은 욥같은 내 운명의 눈과 귀가 조금씩 열리면서 창조주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기묘한 희열을 느끼며 맛보게 되니까 절로 심취해서 계속 들이 파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저는 문서선교에의 소명을 느낀 바 있어 1987년 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로, 당시 극동방송 이사님으로 있었던 서울대 출신의 기업인이자 저를 목사로 키우고자 하셨던 감사한 모 은인(恩人)의 권유 및 인도를 받아 삼각산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당시 저는 삼각산이 서울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지조차도 몰랐습니다. 당시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하나님이 다른 분들을 통해 이렇게 저렇게 앞서 인도하시더라고요.

 

 

여하간 그 삼각산 기도원에서 삼 개월 정도 있었는데, 저는 그때 난생 처음 희한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노년의 이 나이에 허세부리고 싶지도 않고, 과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누가 믿거나 말거나 체험한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무릎 꿇고 기도하던 중 제 몸이 수차례 풍선처럼(?) 가볍게 바닥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신비 체험을 했습니다. 그 며칠 후, 저는 직접 환상을 본 적이 없는데 제가 기도할 때 제가 꽃동산에서 기도하고 있는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척동 목사님이 자진해서 그런 말을 건네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기도 했고, 저는 보행 장애인 제 몸을 고쳐주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기도했는데 그런 제 몸은 고쳐주시지 않고 당시 그 기도원에 있던 환자들 아픈 곳에 제 진동하는 오른손을 얹으니까 병이 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치유 능력은 그 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희한한 신비 체험들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싶어 당시엔 그것이 난해한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만, 그 자체가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신령한 세계를 그렇게 맛보기를 통해 직접 체험해보도록 한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해서 저에게 결정적으로 남은 것은,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모든 이적 내지 신비 사건들은 사실임을 절로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역사 및 섭리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신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빈털터리로 문서 내지 문필 선교사역을 해 온 제 신앙의 최대 자산이자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의 이적과 기사를 통해 홍해도 가르고, 요단강도 가르고, 죽은 자들도 살리고, 죽을병도 고치신 초자연적 하나님이자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각색 병자들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조차 살리셨고, 바다 위를 걸으셨고, 거센 바람과 풍랑조차 말씀으로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자연적이자 역사적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초자연적이자 초역사적인 부활후 수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제자들이 보는 데서 또한 풍선처럼(?) ‘승천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이적이나 신비를 믿을 수 있다면 성령 잉태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대수도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인공지능(AI)’을 만들어 로봇인간까지 탄생시키는 세상인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무능하고 더 미련하실 리는 당연히 없지요.

 

 

하늘나라로 가신 아름다운 빈손한경직 목사님이 생전 시, 아이러니컬하게도 목사님들에게 목사님,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당부하곤 하셨는데, 저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잉태의 비밀부터 잘 믿으세요라는 당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 사람을 잉태할 수 없다면, 그런 하나님과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굳이 잘 믿을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실인즉 우리를 구원할 참 메시아의 정체성은 유부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그런 첫째 아담의 혈통이자 그 후손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새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만이 죄인인 인간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할 수 있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남녀 관계에서 낳은 그런 혈통의 사람이 자칭 재림주(再臨主)’라고 운위하며 남들을 미혹하는 사례도 많은데, 그런 사이비 교주들은 그래서 그 자체부터가 이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7:14)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그 칠백여 년 전에, 구약시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하나님의 저 계시는 과연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위로부터 낳은 새 사람이자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8:23~24)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것은 곧 인간 내 운명의 문제입니다. 너나없이 인간 우리 모두에겐 나름대로의 운명이 있기 마련이고, 살고 죽는 운명에 대한 해법은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한 자그래서 인간 나처럼 죽는 생물학적 인간에게서 발현되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위에서 났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그래서 부활 및 승천할 수 있는 자에게서 오직 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본받는다는 신앙의 진면목은 과연 세상의 돈이나 권력 같은 을 남달리 많이 소유해서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살며 행세하는 삶,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도 아닙니다. 저 모든 소유는 굳이 하나님 믿지 않아도 능히 얻을 수 있는 그것들이니까요.

신앙의 진면목은 금세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의 회복의 문제이자 하나님과 이웃과 공존하는 참 존재 참 삶 참 가치를 위한 진리차원의 문제입니다. ‘새 사람의 조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부터 다시 난곧 거듭난(重生) ‘새 사람이 되어 하늘의 정의와 선으로 세상적 내지 이기적인 악이나 불의나 각종 탐욕을 되레 이기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 이브입니다.

이제는 마리아의 자궁이 아닌

인생 우리네 각자의 심령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새 사람 예수의 생명이

태어나야 할 성탄 이브입니다.

세상의 여관은 만원입니다.

파레토호텔은 초만원입니다.

여전히 빈 방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다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하진 맙시다.

시대의 현실을 원망하지도 맙시다.

 

 

그래서 되레 가난하고 미천한

마구간이나 흙수저들에게,

진실로진실로 복이 있는

하늘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영원하도록 더 크고 더 높은,

새 사람으로의 구원과

생명의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화려한 구유는 없어도 좋습니다.

화려한 스펙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의 구유면 족합니다.

더럽고 지저분해도 좋습니다.

비워진 구유면 족합니다.

 

 

성령 잉태라는 하나님의 신비를 믿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전적 헌신과 전적 위탁의 삶을 살았던 동정녀 마리아.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고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파혼까지 결심했으나 현몽(現夢)을 통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아내를 데려와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그 초자연적 신비를 역사적 신비로 믿고 보호했던 요셉.

아무쪼록 오늘을 사는 우리도 신실한 저 헌신, 의로운 저 인격을 본받아 보다 순종하는 마음 순결한 마음으로, 보다 큰 믿음 큰 마음으로 메시아의 생명을 잉태하여 진실로 복된 구원과 성숙한 소망을 출산할 수 있는 성탄이 될 수 있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1: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