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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의지이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 곧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
곧 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 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오히려 타락 이후에야 성적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 즉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 조상들의 머릿속에 불어넣어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C. S. 루이스-
▣
오늘은 송구영신의 날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
과연 세월도 인생도 묵은 것은 갑니다.
‘겉세계’도 가고, ‘겉사람’도 갑니다.
그러나 가고 보내는,
그 관계의 끝이 전체의 끝은 아닙니다.
우주의 끝도 아닙니다.
그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늘 ‘오는 세계’이자 ‘희망의 세계’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있어 겨울이 오면
봄이 있어 봄도 오고,
죽음이 있어 죽음이 오면
부활이 있어 부활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준비하는
‘지혜롭고 신실한 인생’은 그래서
‘속사람’의 인생관이나 우주관이
저 하늘처럼 더욱 높아질 수 있고,
저 바다처럼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바다가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는 세계’이자 ‘희망의 세계’가
인생 우리를 위하여
목하 최종 리허설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자연도 다만 무대입니다.
본질은 늘 무대 위에서 옵니다.
참된 것은 늘 하늘에서옵니다.
제야가 지나면 그래서 세상이 아닌,
하늘에서 새해가 뜰 것입니다.
먼저 하늘을 구해야 할 필연도 거기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당신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취업? 결혼? 건강회복? 가난 극복?
아무쪼록 그 모든 소원들이 성사되어,
행복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살이에서 저 모든 소원들이 다
필요한 행복의 요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익히 아시는 분이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참된 행복’의 삶을
살기를 세상의 어버이보다 더 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니까요.
십여 년 전에 사망한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엘버트 엘리스(Albert Ellis) 박사가 인간 우리를 불행으로 인도하는 이런 저런 ‘비합리적 사고’들을 열거했는데, 그 여러 사항들 중에서 대표적일 수 있겠다 싶은 고정관념을 나름대로 요약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알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세상 일’에 있어서, “완벽한 능력을 가지고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치 있는 인간이다.”
‘운명’에 있어서, “나는 항상 고통 없이 편안해야 한다. 인생에서의 어려움은 부딪치기보다는 피해 가는 것이 편하다.”
실인즉 우리는 ‘해야 한다’는 저 세 가지 고정관념이자 ‘비합리적인 사고’를 너나없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저 ‘해야 한다’가 세상을 살아가는 ‘율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조 및 강요하고, 성인들인 우리 역시 저 ‘해야 한다’는 가치관 중심으로 치열한 경쟁의식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욱 요약하자면 “나는 남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나는 항상 고통 없이 편안해야 한다”는 기대의식이 되는데, 세상살이에서 저 ‘해야 한다’는 세 가지 기대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래서 늘 좌절하고 낙심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불행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 세 가지 기대가 ‘내 뜻대로’ 이루어져 부자나 권력자나 사회명사로 성공한 사람들 그래서 남들이 인정 및 사랑하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행복한 것일까요? 이후의 세상만사가 편안과 형통일로일까요?
물론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해서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그것에도 남다른 노력과 실력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실패하는 것보다는 성공하는 것을 원합니다. 배고픈 가난이나 옹색한 가난이 축복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많이 가질수록 되레 욕심이나 탐심은 더 커지고, 성공할수록 되레 야망이나 야심은 더 커지고, 그것을 ‘내 것’으로 지키기 위해 불안과 염려 역시 더 커지고 그래서 이웃을 경계하며 담을 쌓게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정체성이자 죄인의 정체성이더라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자의적 또는 타의적 비리나 술수나 부패나 타락의 커넥션 그 늪이나 죄악의 함정에 쉽게 빠지고 더 깊이 빠지더라는 그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공한 지도자'라는 위인들의 교만한 또는 건방진 '갑질'이나 패악이 그렇고, 심지어 친형제지간에 재산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싸우는 재벌가들의 사례가 그렇고,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목하 교도소에 있는 두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저런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시대의 국민들도 피차 행복한 모습들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6:6~9)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과연 ‘자족하는 마음(godliness with contentment)’에서 비롯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자족하는 경건함(*유세베아 메타 아우탈케이아스)이 있으면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연인이나 철학자의 자족(自足)이 아닌, 신앙인격의 자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의 신(神)’일 수 있는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부하려 하는 자들’을 좇아 ‘부자’가 되려고 기원하며 노력하기보다는, 먼저 인생의 참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자족하는 마음, 자족하는 경건함’을 배우고자 노력해야 할 절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자족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한 부자도 없고, 더 여유 있는 부자도 없고, 더 행복한 부자도 없으니까요.
그럴 것이 ‘양 99마리 가진 부자’일수록 외려 자족의 비밀을 모르기 십상입니다. 되레 ‘가난한 자의 양 1 마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 ‘100마리’를 채우고자 하는 게 타락한 인간 우리의 정체성이자 욕심이자 탐욕이니까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24)
잘난 인생 못난 인생, 성공한 인생 실패한 인생, 죄다 포함해서 인생 우리는 너나없이 어차피 ‘나그네 인생’입니다.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어떤 사람은 돈(財物)이나 권력을 주인으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주색(酒色)을 주인으로 섬기며 한계를 살다가 갑니다. 그것들의 ‘종’으로 한세상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주인은 정녕 누구일까요? 무엇일까요? 세상의 재물일까요, 하나님일까요?
육신의 양식이나 떡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성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강조하며 가르치는 목회자는 그것이 구해지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이루어지면, 스스로 배가 불러지면, 그런 기복자도 그런 목회자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절로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젠 하나님 없어도 먹고 살만하다 싶으면 “내로다”를 과시하며 하나님을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선진국인 구미(歐美)교회들의 사례가 그랬고, 경제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되레 침체기가 오고 이젠 하강 국면에 접어든 한국교회의 현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저 C. S. 루이스 교수의 언급처럼, “사탄이 우리 조상들의 머릿속에 불어넣어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먹혀 들어간 것과 같은 맥락의 사례이자 전철이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20세기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였던 영국의 저 C. S. 루이스 교수가 강조하는 ‘참된 행복’에 대해 재삼 주목해야 할 이유가 또한 거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사랑”은 곧 ‘아가페’입니다.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은 곧 ‘에로스’입니다. 태생적 인간은 너나없이 그 누구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해서 세상의 인간 대개가 추구하는 ‘가장 황홀한 사랑’은 순애보처럼 로맨틱한 ‘에로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 루이스 교수는 ‘아가페’ 사랑에 비하면 ‘에로스’ 사랑은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이라는, 의미 깊은 표현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오한 영성에의 체험적 깊이 곧 하나님 나라(天國)의 참된 행복, 그 "가장 고등한 행복"을 체험적으로 깊이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사도 바울을 위시한 모든 사도들이 죄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마태복음19:12)” 곧 ‘아가페’ 사랑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의 삶을 살다 가셨는데, 그것은 참 성령을 통해 ‘에로스’보다 더 큰 ‘아가페’ 사랑에서 오는 참된 행복의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비밀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또한 부부 관계는 물론이고 사회적 모든 대인관계에서 오는 모든 불화 갈등 반목 이혼 등의 불행을 되레 극복할 수 있는 참된 해법입니다. ‘참된 행복’의 비밀이자 ‘천국’의 비밀은 하나님이 허락한 그 가정 또는 사회적 모든 대인관계에서 그 어떤 인간적 사랑이나 거래나 집착보다도, 하나님을 절대 주인으로 모시고 ‘아가페’ 사랑 내지 인격 중심으로 피차의 관계를 존중하며 살려나가는 거기서 비로소 열려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물론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저런 영성의 깊이에 주목해서, 보다 성욕의 절제를 통해 각종 불륜이나 성추문 사건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도 간통 및 살인교사까지 했는데 회개하자 용서받았다”는 식으로 ‘은혜’만을 강조하며 자기 합리화시키는 신앙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다윗 왕가는 그래서 그 후 그 집안에 “영원토록 칼이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왕국 자체가 제국의 ‘칼’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역사의 산 교훈을 우리는 또한 명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또한 ‘부자’였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모습만을 본받아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강조하던데, 아브라함은 ‘부자의 가치’ 내지 ‘재물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가치’를 절대 우위에 두었던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인 자기 재물보다 더 소중했던 아니 자기 목숨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했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22:2)는 하나님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말씀이자 비정한 말씀을 듣고 그것이 ‘내 뜻, 내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순종해서 아들을 제물로 드리고자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그 심정이야 처절하고 비통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물(燔祭物)로 받으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 사랑과 혈육이자 자식 사랑인 ‘스톨게’ 사랑 그 양자의 무게를 그렇게 시험(試驗)하신 것이지요. ‘독자인 내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天國)’를 지키고자했던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은 그 진심과 충심을 확인한 하나님에 의해 되레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입고 명실공히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원히 참된 행복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이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독자마저도 희생시키고자 하는 순교자적 내지 헌신적 신앙은 본받지 못하고, ‘부자 아브라함’만 강조하며 ‘부자 되는 축복’을 파는 그런 ‘반쪽 신앙’ 유형의 목회자는 구별 및 성별해서 경계할 수 있는 영적 성숙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이자 ‘장성한 행복’의 비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4:13~15)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신앙위인 ‘다윗 왕’도 그 인간적인 두 얼굴 내지 양면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고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림을 통해, 오직 ‘온전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정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가르치고 배워야할 절대필요성이 거기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성숙한, 그것이 참된 내 구원의 생명이자 행복이자 자유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세상 범사가 ‘내 뜻, 내 기대’대로 되는 것만은 분명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며 부러워해야 한다, 나는 성공해야 한다, 나는 항상 고통 없이 편안해야 한다”는 기대의식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불합리한 사고들’입니다. 나는 멸시 천대 받고 비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죄인의 괴수’입니다. 나는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통 고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해야 한다’는 저런 고정관념의 불행에서 이기는 ‘참된 행복’에의 해법은 되레, 한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그리스도)를 따르는”(마태복음16:24)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세상을 진정으로 이길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 자족하는 경건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조차도 이미 각오한 자에게 주어지는 인생 ‘막대기’ 고난이나 실패는 대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가소로운 약과지요. 그렇게 ‘자족하는’ 여유와 평안의 행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한 병자(病者)’, 죽을 병자'라는 정체성을 온전히 알기 전까지는 ‘참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의사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습니다. 내가 ‘큰 죄인, 비참한 죄인’이라는 정체성을 알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습니다. 한평생 “주여, 주여”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습니다. 무속처럼 믿고 일방적으로 복을 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실존적으로 ‘응급실’에 있는 ‘병자’나 ‘죄인’에게 억만금의 ‘돈’이나 ‘떡’이나 어떤 ‘사회적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참된 가치도 축복도 아니고 참된 행복도 분명 아닙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自足)할 수 있는 장성한 비밀이자 참된 행복의 비밀을 알고, 저 루이스 교수처럼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을 키워나갈 수 있는 저나 우리 모두의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새해, 그런 ‘하늘(天國)의 복’ 많이 받으세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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