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영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 자질'

이형선 2019. 1. 1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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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인간 생명의 원천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창조적 방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수십 년 뒤에는 교회가 이 일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위험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처방은

 우리가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내면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일(깊고 의미심장한

 영적 움직임)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영적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다양한 경험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자아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시고,

 자기보다 많이 치유하실 수 있는 손을 가지신 분을

 모시는 내면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야 말로 미래의 영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 자질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확한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 지도자는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근원적인 신앙고백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입니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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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서 계신 저 20세기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은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내면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일(깊고

의미심장한 영적 움직임)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자신의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 영적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노력과 능력이 필요하다고

각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형이나 외식을 추구하는 노력이나

그것을 성취하는 능력보다는, 보다 깊게 자기 내면을

추구하는 노력과 거기서 얻은 영적 경험에 대한

정확(正確)한 표현바르고() 확실한() 표현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구현되도록 기도하며 사는 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돼라, 세상을 향해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선포했던 사도 바울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오늘도 내일도 많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영적 지도자들이 되기 위해선 모세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적 내지 이성적 기초학문에도 큰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사도 바울의 거룩한 탄식머리로 배운 그런 대단한 이성적 지식은 물론이고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만으로도 역시 안 된다는 자기 한계에 대한 절감이자 탄식이었기에, 그 심오한 의미 자체에 우리는 재삼 주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이성적 내지 지적 자만이나 교만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거기서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내지 자기 비움과 낮아짐(*케노시스)’이라는 실존적 죽음을 통해 되레 살고 되레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한다는 것. ‘자기 부인을 통해 실존적 죽음인 십자가로 인도하는 내 자유만이 비로소, , 참 자유이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인 그리스도의 자유(free)’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set me free).-(로마서7:24-)

 

 

현재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만남이라는 진솔한 경험의 필요가 재삼 강조될 수밖에 없는 절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고, 그 분을 본받아 선한 목자가 될 수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my witnesses)이 되리라.-(사도행전1:8)

 

 

초대교회 사도들이자 제자들은 과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저 예언의 말씀처럼,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을 받은 이후 비로소 참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형으로 성공한 자기의 증인도 아니고, 어떤 교파나 교단의 증인도 아닙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왕의 증인도 아닙니다. 오직 내 증인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입니다.

영어 순교자(martyr)’는 저 증인곧 헬라어 말튀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죄다 그렇게 순교자적 증인의 생애를 살다 갔습니다. 그런 분들이 진정한 기독교 영적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국어사전적 의미 그대로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이 아닌, 지식이나 학문이나 이론도 아닌, 어떤 사실이자 진실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내가 어떤 사실이자 진실을 알아야만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증명이자 선포가 곧 복음입니다. 내게 하늘의 복된 소식(福音)’이 되고 그래서 구원이 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된 영적 체험 내지 내적 경험이라는 사실이자 진실이 먼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때론 광야의 기도를 통해, 때론 고독의 훈련을 통해, 때론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처참한 고난과 고통을 통해 치열한 영적 훈련이 필요한 것도 다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단의 과정을 통해 동방의 의인 욥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42:5),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로소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귀로 듣기만 하였던" 혹은 전통이나 교리나 학문이나 이론이나 개념만으로 알고 있었던 '조상의 하나님'이나 '선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뵙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정확한 표현'으로 신앙고백할 수 있어야 할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베드로후서1:16)

 

 

저 사도 베드로도, 부활 승천하신 후 여전하게 살아계신 그리스도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사도 바울도, 과연 체험적이자 현재적으로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이자 들은 자들이었습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초대교회 사도나 제자들처럼 저런 증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실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성령의 임하심’, 그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救贖史) 사역을 위해 배턴 터치하는 연속성의 비밀이자 실현의 현장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동일하게 목격하고 경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인간 우리가 최선을 다해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는 있지만 은혜긍휼을 베푸시는 그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영적 세계의 비밀이자 섭리의 비밀을 이렇게 정확한 표현으로 언급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9:15-16)

 

 

따라서 모세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자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세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듯 은혜를 은혜로 증언하는 정확한 표현을 하고, ‘정확한신앙고백을 하고, 그것을 심령 중심에 바르고 확실하게늘 간직하며 사는 사람은 이른바 대형으로 성공해도 교만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은혜는 곧 (debts)’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 및 성공의 은혜는 다 일만 달란트라는 태산 같은 이자 근원적인 빚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형으로 성공한 목회자나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되었다 쳐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근원적인자기이해 내지 자기분수를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마음이자 처음사랑을 잃지도, 버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신앙위인이자 영적 지도자들인 저 모세나 초대교회 저 사도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성령 체험을 할 수 없는 또는 하지 못한 오늘시대의 평범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나 긍휼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어떤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는가?

저는 그 답을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8:9-)

 

 

진실로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퓌뉘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영성이 체화 내지 인격화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 상대적으로 오늘도 여전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救援)’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확한 표현을 통해 또한 신앙고백에의 비밀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Lord)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12:3)라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이자 주인으로 고백할 수도 없고, 그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할 수도 없다는 것. 따라서 자기 심령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 현재적으로 거하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현재적으로 분명히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체험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표현바르고 확실한믿음과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영적 지도자부터가 그렇게 영성의 비밀에 대한 바르고 확실한 체험의 고백이자 믿음의 고백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고린도전서12:) 등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고, 나아가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은사는 사랑(*아가페)’(고린도전서13:)이라는 것을 정확한 표현으로 바르고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 영적 지도자이자 선한 목자가 될 수 있기 마련이니까요.

 

 

오늘 우리의 시대엔 성경에 나타난 영적 세계나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는 이른바 자유주의 비평신학을 배운 외국유학파 신학자나 목회자들도 많이 있고, ‘자타가 공인하는 지성이라는 해박한 철학자나 인문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한손에 성경을, 한손에 신문을들고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현실의 문화나 삶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구중궁궐도 첩첩산중도 무인고도도 다 세상 현실이니까요.

따라서 시대정신이나 문화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선 안 되니까, 저런 이성적 학문이나 지식도 열린 마음으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은 크고 넓은 세상 현실을 고루고루 알기에 세상의 빛일 수 있고, ‘소금역시 넓고 깊은 바다 현실을 고루고루 알기에 세상의 소금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거기에도 우리가 "예 할 건 예 하고, 아니오 할 건 아니오"라고(*마태복음5:37), 정확히 구별 및 성별해서 경계해야 할 숙제가 또한 있습니다. 문학적 또는 철학적 지성들이나 자유주의신학자들의 표현이나 수사나 변론은 대개가 장황하도록 모호한 언어나 현학적 표현으로, 공연히 맴도는 추상적 언어나 난해한 표현으로 우리를 현혹시킨다는 그것입니다. 자기 머릿속의 지적 유희나 말장난으로 인도해서 ()의 존재자체를 늘 추상적 또는 불가지론적 대상으로 비하시켜버리거나, ‘사람이 곧 신이다(人乃天)’는 인본주의 종교교리 수준으로 희석시켜버린다는 것. 해서 들을 때나 읽을 때는 유식한 지식이나 사상을 얻은 것도 같은데 돌아서면 남는 건 없고 되레 공허해지고 되레 혼잡해지더라는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대의 '불학무식한 제자들'이나 민초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쉽고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진정한 '생명의 언어'나 구원 사역은 현학적 지식이나 이론이나 학문과는 별개의 명제라는 것.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린도후서2:17)

 

 

자타를 막론하고, 자기 심령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자기 머리 안의 지적 유희에서 맴돌 수밖에요. 그래서 자기도 타인도 돌아서면 남는 게 없고 되레 잡탕적 지식으로 인한 영적 혼잡이나 혼란만 가중시킬 수밖에요. 과연 그런 이성적 지식이나 지성이 인간의 생명이나 참 행복을 살리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물론 정신이나 의식을 깨울 수는 있겠지요. 해서 우파적 혹은 좌파적 지식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평화 메이커가 되기보다는 되레 정치적 이념적 투쟁을 일삼는 불화 메이커가 되기 십상이더라고요.

 

 

세상이 그러면 그럴수록 영적 지도자는 더욱더 신의 존재곧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비밀이자 진리에 대한 정확한 표현’, ‘순전한 표현’, 담대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심령 안에 실재 및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늘 정확하고 순전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먼저 자기 자신부터가 세상을 향해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인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고백을 정확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볼수록 과연 인간 우리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도해서 진실로 살리는 것은 영(*퓌뉘마)입니다. 한세상 살다 흙이자 티끌이 되는 ()’도 아니고, ‘정신이라는 이름의 세상 지식도 지성도 아니더라는 것. ‘영성(靈性)’이란 그 자체에 초자연적 존재초자연적 성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하고, 그것을 정확히' 알고 표현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기영광이나 자기네 잇속을 구하기 위해 직업적으로 하나님을 파는모든 사이비 영적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스스로 유식한세상 인본주의 지성들의 모호한 표현이나 수사나 변론에 미혹당해 인생관 내지 가치관이 혼잡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저 헨리 나우웬의 언급처럼, “인간 생명의 원천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창조적 방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증인'으로써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그것이 늘 숙제이자 '빚'으로 남습니다. 그럴 것이 인간 생명의 원천인 창조주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창조적믿음 소망 사랑의 방법이자 참으로 인간을 살리는구원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자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니까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예수)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