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여자가 낳은 자'와 '새로운 피조물' 사이

이형선 2018. 11. 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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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블레이크(Blake)

 바닷가에 서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위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반사된 햇빛으로

 온통 눈부시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둥근 태양이 떠오를 때,

 그 찬란한 신비경에 빠진 블레이크는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옆에 있는

 낯선 사람을 돌아보면서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 나도 봅니다.

  황금덩어리,

  빛나는 금화를 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

 

 블레이크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많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습니다.

  ‘거룩하도다, 가룩하도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거룩하도다라고 노래하는.”

 

               

                   -에이든 토저-






      

 





‘20세기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심령을 울리는 개혁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설파했던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

그분은 저명한 저술가였기에 돈도 적지 않게

벌었습니다만, 늘 기도하며 그 돈을 필요한 이웃이나

단체에 기부하고 자신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승용차조차도 소유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상용하며

살았던 그분은, 그렇게 절제하며 이웃과 나누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난 자의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66년의 생애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간 그분의

묘비명이자 후세의 평가는 한마디로 이렇게 집약이 됩니다.

‘A. W. 토저 - 하나님의 사람

 


바닷가에 서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위용을 보고있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어둑하고 아득한 수평선 그래서 때론 일상처럼 단조로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은 거듭난 생명처럼 새로운 하루나 새로운 한해의 찬란한 꿈이나 희망이 되고 신비한 희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그 태양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지금, ‘솟아오르는 저 태양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황금덩어리, 빛나는 금화로 보인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노래하는 천사들의 음성까지 들린다고요? ’황금덩어리를 보는 자에게도 는 있었는데 그는 왜 아무 것도 듣지를 못했을까요? 황금에 너무 집착해서 들을 귀가 멀어졌기 때문일까요? ‘동일한 태양을 전혀 다르게 보고 이해하는 저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지는 각자의 판단이나 인생관에 맡겨둡시다.

 


오늘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공중 나는 새를 보고 또한 새의 지저귐를 듣지만 그것을 새의 울음으로 듣는 사람도 있고, ‘새의 노래로 듣는 사람도 있고, ‘소음으로 듣는 사람도 있고, “너무 바빠서아예 를 보지 못하고 새의 지저귐을 듣지 못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 자기의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이 된다고 했는데, 저들 중 과연 누가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자기의 보는 것듣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영원한 생명이자 영원한 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보고 듣는그 자체가 곧 자기의 영원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누가복음10:23~24)

 


실인즉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조차도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보지 못하였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해서 육신을 입고세상에 오신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신약시대 제자들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복이든 그 복을 받은 사람들은 당시엔 그 복의 소중함을 모르는 법입니다. 건강도 그 복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가 건강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당연하게 여긴 그 복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라하도록 미천한 갈릴리 목수 출신 예수가 세상에 오신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믿기엔 여러 정황상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이스라엘 남북왕국이 다 제국의 칼 아래 멸망당한 이후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대망론(待望論)’은 한마디로 조국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출애굽의 모세혹은 통일왕국의 다윗 왕같은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당대의 영적 지도자였던 선지자 세례 요한까지 그런 세상 나라중심의 정치적 메시아 대망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天國)’에 대한 참 이해를 놓치면 예나 지금이나 의혹 및 회의 심지어 불신까지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의미에서, 세례 요한이 품은 그리스도에 대한 의혹이나 불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큽니다세상 나라일이 내 뜻이나 내 기대대로 안 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혹이 또한 내 의혹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나아가 오늘 우리 시대의 기독교지도자들 내지 영적지도자들은 과연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인가? ‘여자가 낳은 자인 저 세례 요한과 무엇이 다른가? 스스로 신령한 교주가 되어버리는 이단 및 사이비들과는 또한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그런 문제까지도 천착해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정도 앞서 태어난 세례 요한은 그 후 광야에서 수행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존경받고 있던 당대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겸손하게 자기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 위에 임하심을친히 본 사람이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심”(마태복음3:)을 친히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한복음1:34)고 공공연하게 선포까지 했고, 그렇게 그가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미리 보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3:30)라는 고백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 후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그의 동생의 아내를 취하자 왕을 감히 꾸짖었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왕의 작태가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레위기18:16)라는 율법을 범하는 부도덕한 행위였기에 그것을 감히 꾸짖은 것인데,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그것은 사회정의를 위한 대단한 용기이자 행동하는 양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런 예수의 행보를 무척이나 답답하게 여겼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정치적 내지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견해와 색깔을 분명하게 하면서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정면 등장 및 참여를 기대했는데, 그런 이슈나 시국문제에는 계속 침묵한 채 병자들이나 고치며 복음이나 전파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이 구약 선지자의 시각에는 영 미덥지 못한 행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닌가 싶은 회의감마저 들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그의 제자 두 명을 보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누가복음7:20)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선 구약의 율법과도 다르고, ‘세상 나라의 이슈나 관심이나 가치관과도 다른, ‘복음이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관과 정체성을 이렇게 담대하게 설파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걸은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 받으며, 귀 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누가복음7:22~23)

 


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장기를 살았던 나사렛의 회당에서 친히 펼쳐 낭송했던,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6:1~2)의 말씀에 대한 재확인이자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강조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4:18~19)

 


그리고 주님께선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난 후, 회중들을 향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4:21)라고 확실하게 선언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말씀이 나 예수를 통해 오늘 여기서 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이자 영원한 구원은 율법이나 세상 나라의 정치적 메시야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복음이자 하나님 나라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곧 구약 은혜의 해인 희년(禧年)’을 의미합니다.

 


-제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위기25:10)

 


오십년 만에 한 번씩 임하는 저 희년Jubilee)’ 곧 히브리어 요벨은 당시 나팔로 쓰던 수양의 뿔(요벨)’크게 부른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조건도 거래도 이유도 값도 없이,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종살이 하게 된 가난한 동족에게 자유를 주고, 빚진 자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주고, 땅이나 집을 저당 잡은 자는 그것들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민족 차원의 해방과 은혜와 기쁨과 원상회복을 선포 및 구현하는 해입니다. 그렇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해이자 이웃을 구원하는 대 명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적 의미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아곧 인간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는 '속죄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민족 차원은 물론이고 땅 끝까지이르러 구현되도록 크게 부는 날’, ‘크게 선포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죄와 저주와 죽음에 이르는 운명의 사슬에서 대속의 죽음을 통해 조건도 값도 없이 구원하여 자유와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은 바로 저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禧年)’ 그 계시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의 온전한 성취가 바로 '메시아'이자 그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믿음과 이해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7:28)

 


여기서 우리는 여자가 낳은 자라는 저 말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학자들의 이런 저런 해석이 있습니다만, 너무 멀리 가거나 너무 어렵게 풀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이 곧 그것에 대한 해석일 수 있으니까요.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 그리스도)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자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린도전서15:47~49)

 


따라서 첫째 아담이자 '아래서 낳은 자'(요한복음8:23)의 후예인 인생 우리 모두는 흙에 속한 자이자 여자가 낳은 자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둘째 아담'이자 '위에서 낳은 자'(요한복음8:23)인 예수 그리스도께선 친히 당대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지식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역시 이렇게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복음3:5`7)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말씀과 성령으로거듭나야만,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들어갈 수 있습니다. 흙의 세계이자 육의 나라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인 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자가 낳은 자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일까요? 전자의 삶은 그래서 결국이 헛되고 그래서 허무할 것입니다.



오늘도 여자가 낳은 자들은 다투어 황금덩어리, 빛나는 금화같은 부와 재력을 탐하고, 스스로 정치적 메시아라도 되는 듯 권력을 탐하지만 진정한 자기의 구원이나 민족의 구원은 거기서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자가 낳은 자의 세계에 새 것은 없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뿐, 해 아래 새 것(new)은 없기”(전도서1:9) 때문입니다. 따라서 해 아래서크게 성공했다 쳐도 그 끝은 허무합니다. 인생 여정이나 삶이 그 세계에서 '보는 것,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런 걸로 인해 내로라 교만을 부려서도 안 될 이유가 다 거기 있습니다.

새 정권도 구 정권이 한 일을, 새 기업도 구 기업이 한 일을, 그 자녀도 그 아비의 한 일을 허무하도록 되풀이 할 뿐, 그 세계 그 세상 나라 가치관 그 자체에 새 것으로의 구원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 같은 큰 선지자나 니고데모 같은 지식인이나 제사장이나 왕이나 이 시대의 목자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하게 보는 눈, 들을 귀를 열어야 할 절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가 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인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가 되어, 진실로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금세에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하늘의 평안과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에게도", 암울한 바닷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볼 때는 물론이고  평범한 자연이나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많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절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the new)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