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두 사역, '하는' 사역과 '당하는' 사역

이형선 2018. 10. 2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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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당신을 제멋대로 다룰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그 순간은 예수의 사역(使役)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즉 활동에서 수난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것이다.

 

 ··· 이제부터의 일들은 그분이 하는사역이 아니라

 ‘당하는사역인 것이다. 적들은 그분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조롱하고, 발가벗기고,

 벌거숭이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는다.

 

 ··· 적의 손에 넘어간 그 순간부터 고난은 시작되고

 그 고난을 통해서 그분의 소명은 실현된다.

 예수께서 스스로 행하신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당신에게 행하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사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은 내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내 삶의 대부분 역시 남들의

 나에 대한 행위로 결정되며, 따라서 이는

 곧 고난을 받아들임에 해당된다.

 

 ··· 그럼에도 나는 이 같은 진리에 반항하면서 모든 것이

 내 뜻에서 비롯되는 행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행위이기보다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기만이요, 자신의 고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부정이다. 예수께서 넘겨져 고난당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지상과업을 완수하셨다는

 사실은 유념해두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완성을 열렬히

 추구하는 세계를 위한 기쁜 소식 그것이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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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학자 헨리 나우웬( (Henri Nouwen)

64년의 생애를 마치고 1996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만, 그가 남긴 깊은 영성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실상인즉 인간 우리의 모든 삶이나 사역은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됩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활동 하는

또는 사역과 타의적으로 고난 당하는삶 또는 사역이

그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대개가 국내외 선교,

설교, 기도, 교육, 봉사, 선행 등 인간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사역 곧

내가 하는사역만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수동적으로 당하는사역 역시 소중한 주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당하는사역인 그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지상과업을 완수하셨다는 사실은 진실로 우리

역시 유념해두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나 만사형통만이

기쁜 소식은 아니고, 진정한 구원 및 그 완성을 열렬히

추구하는 세계를 위한 기쁜 소식은 세상의 안목으론

실패처럼 보이는 당하는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구원의 그 뜻과 소명이 되레 완성(完成)된다

보다 심오한 의미와 가치에의 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비단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소명을 감당하는

사역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신앙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일상 모든 삶의 관계 그 자체부터가 이른바 갑질

포함해서 내가 하는일과 당하는일로 대별 및 양분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당하는일에서 되레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원한 생명과 가치를 이루는, 의롭고 선한 인격에의 성숙

완성을 추구해야 할 필연성 역시 거기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곧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는 아버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代贖)의 사명을 다 이루었다, 다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주기도문에 명기된 우리의 죄(our debts)를 사하여 주옵시고에서의 그 인간 우리의 죗값이자 을 예수께서 희생양이자 대속양이 되어 다 갚았다, 다 치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은 응분의 죗값이자 을 다 갚는 그것이 정의(正義)’입니다. ‘을 갚지 못하면 죽습니다. 해서 내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라는 그 을 대신 갚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왜 대신 갚아주느냐고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외려, 바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라는 절대 반증이기도 합니다. 죄인인 내가 먼저 정의가 되어야만 참 정의'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영적 교제 및 소통하는 참 평안의 길이자 구원의 길이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의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샬롬평안인데 저 평안의 어원적 의미는 곧 빚을 다 갚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보고이자 선언을 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 꼭대기도 아니고, 대형회당도 아니었습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보이는 지극히 높은 산’(마태복음4:8)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하는사역이 아닌, ‘내 뜻도 내 원도 아닌, 아버지의 뜻이자 아버지의 원에 의해 당하는사역의 현장인 십자가에서였습니다. 잘 나가던 때나 자리가 아닌, 고난의 때이자 형극의 자리였습니다.

 


당시의 종교권력이자 기득권사회의 유지였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의 인식 및 비난과 야유 그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인데, 극악무도한 죄수를 처형하는 그 저주 받은 십자가현장에서 되레 소명이자 사명의 완성을 선언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를 넘어선 진실로 심오한 역설의 진리이자 계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도 너도 잘 나가는 때나 자리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감사하기도, 찬양하며 영광돌리기도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고난의 자리나 죽음의 자리에서 감사 및 찬송하기는 어렵습니다. 되레 취중(醉中)에 본색 나온다듯 고난 중에 본색 나오기가 쉽습니다.

재산도 열 자식도 다 잃은 재앙속에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2:21)라고 찬송을 잃지 않았던 동방의 의인 욥도 몸마저 중병에 걸린 형극의 자리에서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도 했고, 무심하다 싶고 야속하다 싶은 하나님께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기도”(욥기10:1)했습니다.

그런 욥은 그러나 자기가 버림을 받은지경에서도 끝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중심의 삶에서 떠나진 않았습니다. “신은 없다, 신을 죽었다는 등 무신론이나 신앙 회의주의 내지 허무주의에 빠지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되레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Redeemer)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19:25~26)

 


저 육체 밖에서곧 히브리어 에서, 밖에서, 안에서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육체 안에서살아계신 대속자하나님을 보게 되면 메시아 신앙이 되고, 육체 밖에서살아계신 대속자하나님을 보게 되면 부활 신앙이 됩니다. 고난의 삶을 통해 심오한 영성의 비밀에 열려진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의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욥은 육체 안에서곧 살아서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뵈옵습니다.”(욥기42:5)

저 욥에게도 또한 다윗에게도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절망적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죽음의 진토에 앉아 신음할 때, 이렇게 “Why? Why me?”라고 외치며 탄식을 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Why)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Why)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22:1)

 


세상에 오신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 욥이나 저 다윗의 탄식 곧 절망적 인간 우리의 한계를 대신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 그렇게 대속(代贖)의 탄식을 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제기된 인간의 숙제에 대한 말씀 그 해법이자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復活)하고, ‘대속의 탄식을 통해 인간의 한계인 탄식이나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역설의 비밀이 과연 거기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한 한계나 세상을 이기는육체 안에서의 고난도, ‘육체 밖에서의 죽음도, 능히 이기는 영원한 구원에의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생적 죄인인 그래서 죽음에의 길이자 여정을 가는 인간 우리 모두의 고난의 절정이자 한계일 수 있는 십자가의 어원적 의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곧 헬라어 스타우로스의 어원은 히스테미인데 일어서다, 대적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대적하는극악무도한 죄인들을 처형하는 말뚝이 로마제국시대에 처형의 도구인 십자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저기서 되레 영성의 비밀이자 삶에의 역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의 저 어원적 의미를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의 한계에 대적하여, 일어서고’, 악령인 사탄의 세력이자 죽음의 세력에게조차도 대적하여, 일어서고’, 그래서 승리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부활이자 천국에의 소망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에게도 예수께서 스스로 행하신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당신에게 행하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사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은 내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정호승 시인이 썼던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는 제목의 칼럼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지으려면 새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바람이 고요히 그치기를 기다려 집을 지으면 집짓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나뭇가지를 물어오는 일도, 부리로 흙을 이기는 일도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지은 집은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겠지만, 바람이 불지 않은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만약 그런 집에 새들이 알을 낳는다면 알이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새끼가 태어난다면 새끼 또한 떨어져 다치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렇습니다.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은 우리가 원하는날도, 그렇게 하는날도 아닙니다. 우리가 되레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저 새들처럼 , 아니 그 이상의 세계인 참 인격의 이자 영원한 천국의 을 지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당하는사역인 십자가현장에서 되레 영원한 속사람의 집을 지을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그보다 더 견고한 반석은 없으니까요. 세상의 온갖 풍파도 지진도 넉넉히 이기고’, 죽음조차도 넉넉히 이기는 영성의 비밀이자 반석의 비밀이 과연 거기 있습니다. 그 초자연적 비밀이자 지혜가 아무쪼록 저나 당신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그리스도)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7:2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