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엔도 슈사쿠의 '내 나약함에 대처하는 방법'

이형선 2018. 10. 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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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나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남들 앞에서

 강하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능한 한 유익하게

 바꿔보자고 생각한 뒤부터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엔도 슈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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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던

침묵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20세기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

동경 태생으로 가톨릭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기독교적 독특한 시각으로 동서양 관계를 고찰한

작품들을 다수 저술하다가 73세의 여정을 마치고

1996년에 하늘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저 내 나약함이나 약점에 대처하는 방법,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성의 비밀에 뿌리를 둔 지혜이자 엔도 자신의 신앙고백일 수도 있다 싶으니까요.

우리가 엔도의 저 고백을 보다 진솔하고 실감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소설 침묵에 나오는 인물들의 신앙과 배교(背敎)’에 관해 주목해보는 게 좋으리라 사료됩니다. 16, 17세기 일본 막부시대에 자행되었던 기독교탄압실화를 소재로 했지만 허구인 저 소설은, 포르투칼 예수회 소속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충격적 보고가 교황청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됩니다. 33년 동안이나 일본에 잠복해 살면서 선교활동을 계속해온 언제나 불굴의 신념이 넘치고 있었던강직하고 신실했던 성직자 페레이라 주교가 당국의 박해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다는 것입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한 페레이라 신부의 그런 배교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도 하고 선교사역도 대신하고자,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가르테 신부와 함께 일본에 잠입합니다. 마카오에서 만난 기치지로의 도움을 받아 잠입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을 통일한 막부세력의 집요하고 잔혹한 기독교탄압과 색출의 격랑은 마침내 저들마저도 삼켜버리고 맙니다. 산중에 숨어 은밀하게 포교활동을 하던 저들 역시 은전을 받고 예수를 팔았던 제자 유다처럼 그렇게 당국의 돈을 받고 저들을 판 기치지로의 배교에 의해 일본 관헌에게 체포당하고 만 것입니다. 해서 가르테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의연하게 순교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로드리고 신부는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로드리고를 회유하던 일본 관리는 로드리고에게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해줍니다. 스승의 배교에 관한 루머는 사실이었습니다. ‘배교자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페레이라는, 일본당국으로부터 집과 아내를 하사받은 후 초라하도록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에게도 배교에 대한 응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 신부에게 직접 고문을 가하는 게 아니라 그를 따르던 교인들에게 구멍 매달기라는 육체의 고문을 행하여 저들이 점차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곁에서 듣고 있어야만 하는 심령의 고문을 당하고 있던 로드리고에게, 페레이라가 자기도 역시 그런 심령의 고문을 당했다고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구멍 매달기는 깊은 구덩이를 파서 그 구멍에 사람의 수족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는 고문입니다. 그러면 피가 이목구비로 터져 나오면서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귀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그곳으로 피가 서서히 흐르면서 더 오래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서서히 죽어간다고 합니다.

후자의 그런 고문을 차라리 신부인 자신에게 가하면 모르긴 몰라도 순교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고문을 양들이자 신자들에게 가하고 그 고통과 신음소리들을 보고 듣고 있어야만 하는 심령의 고문은 더 교활하고 가혹한 고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일각일각 죽어가는 고통과 신음소리를 보고 듣고 있어야만 하는 어버이의 심리적 고통은 가슴에 대못을 박는 더 큰 고통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런 고통을 익히 알고 있던 페레이라 신부는 자기가 배교한 것은 그런 교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하느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느님은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 다만 침묵하셨기 때문이라고 토로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배교하면 저 다섯 사람의 신자들을 풀어주겠다는, 살려주겠다는, 관리의 말에 따라 그 양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했다면서 너 역시 고집을 부리지 말고 배교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래서 신음하는 저 양들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래서 마침내 당국 관리가 요구한대로, 페레이라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銅版)을 자기 발로 밟습니다. 그렇게 배교한 것입니다. 그때, 로드리고 신부는 주님의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때, ‘새벽닭이 웁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에게 들려왔던 그 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26:)

 


우리가 진실로 저 고문과 살육의 현장에 선 페레이라 신부나 로드리고 신부 당사자였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양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는 목자가 될 것인가? 양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신앙을 지키는 목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내가 배교했지만 그러나 내가 배교한 것이 결코 아님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라고 했던 로드리고 신부의 신앙고백을 향해 그 누가 자기합리화라고 비난하며 섣불리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그럴 것이 저 신부들의 배교나 저 수제자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이라는 배교가 곧 일상에서 자행되는 저의 행위이자 우리의 행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나 우리의 나약함이나 약점 그 자체의 한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발표한 이후 야기된 많은 논쟁에 대한 작가의 소감이자 후기일 수 있는 저서 침묵의 소리에서 작가 엔도는 이런 요지의 고백을 토로했습니다. 자기 역시 일상의 삶에서 자주 배교하는 페레이라 신부이자 로드리고 신부이고, 돈푼을 받고 저들을 판 기치지로라고. 자기 속에 내재된 그 여러 속성들을 각각 독립시켜 작품 속의 다른 인물로 그려냈을 뿐이라고.

그런 그의 고백에서 일상의 삶을 통해 자주 배교하는 우리 역시 연약한 인간의 신앙과 회의, 실존적 고뇌와 갈등 등을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럴수록 또한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이자 해법이 숙제로 대두됩니다.

 


실인즉 은전 삼십이라는 돈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던 제자 유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제자 베드로 역시 분명히 배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인간적 나약함이나 약점에 대한 대처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유다는 후회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통곡하며 회개하기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인간적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회개란 회개에 합당한 새 삶의 시작입니다



인간 우리 심령의 내밀한 생각까지도 밝히 통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선 베드로의 그 통곡 그 회개의 진정성을 아시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그를 친히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사랑의 관계를 강조 및 다짐하시며 새로운 사명까지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

그런 베드로는 주지하다시피 주님의 예언 그대로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저 배교의 약점이나 불학무식한 일체의 인간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위대한 사도로 사역하다가 마침내 순교했습니다.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매달릴 수는 없다며, 자진해서 저 구멍 매달기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순교한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의 나약함이나 배교에 대한 최종 심판을 오직 하나님께 맡겨둬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에게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받으면 오늘의 배교자도 내일 순교자가 될 수 있고, 악인도 의인이 될 수 있고, 약한 자도 강한 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실 때 다만 침묵하셨던 아버지 하나님. 그때 예수께선 정녕 신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그렇게 회의하진 않았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 나약함을 인정하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라고 호소했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호소입니다. 내가 비참하게 죽더라도, 내가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하나님의 침묵은 보다 큰 뜻이 있는 침묵이었습니다. 그 뜻을 다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가 당하는 육체적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아니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아버지의 침묵이었습니다. ‘사흘 후라는 하나님의 때가 되자 마침내 증명된 것처럼 부활이라는 대속(代贖)의 구원이자 영원한 생명에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침묵이었다는 것. 부활, 그것은 인간에겐 금세의 삶만 있는 게 아니라 내세의 삶이 또한 있다는 웅변이자 증명입니다. ‘최선의 기도를 드린 후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해야 할 절대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세상의 삶은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하는 여정이니까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죽이는 데까지 앞장섰던 완악한 사울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난 후 회개하고 사도 바울로 거듭났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인 신비체험을 통해 삼층천(三層天)’이라는 내세의 삶까지 미리 맛보았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내 육체에 가시라는 신체적 고통이자 약점이 있어 그 치유를 위해 최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던 것. 그러나 주님께선 아예 거절하셨습니다. 보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한 거절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가시그 영성의 비밀이자 역설의 비밀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나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12:9~10)

 


예나 지금이나 내로라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교만하여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요한계시록3:17)

해서 그것은 참 자랑거리도 행세거리도 아닙니다. 저 바울처럼 되레 자기의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겸손해져서 온전히,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외려 영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세상 앞에서, “남들 앞에서 강하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허세나 허영이나 탐욕을 부릴 필요도, 교만과 독선에 빠져 자기를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의 부자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 별것 아닙니다. ‘스스로 배부른그것은 자기를 되레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삶으로 인도하는 허무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정작 가치 있는 삶은 내 모습 이대로사는 그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의 됨됨이나 그 중심의 생각까지도 밝히 알고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저는 그래서 작가 엔도 슈사쿠의 저 인문학적 표현의 고백을 이렇게 보완 및 정정해서, 신앙적 고백을 하는 삶을 살고자 나름대로 노력하는사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한 유익하게 바꿔보자고 기도한

 뒤부터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