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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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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들이 기독교신학과 신앙의 거목이자
대부로 공인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저 유명한 신앙고백을, 우리는 이렇게 달리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행복을 누릴 때까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안식’, ‘참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고,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새삼스러운 질문이자 진부한 질문이지만,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처럼 흑백논리로 대답하기엔 늘 어려운 질문입니다.
물론 “이발 하면 하루가 행복하고, 결혼 하면 일주일 행복하고, 새집 사면 한 달간 행복하다”는 영국 속담 그대로 저 자체가 ‘행복’일 수 있겠지만 아울러 저 행복은 또한 ‘하루, 일주일, 한 달’이라는 시한부이기에 ‘참된 행복’이 아니라는 역설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거기서 ‘참된 행복’이나 ‘참된 안식’이 오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 그럼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근년에 보도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직(移職)을 꿈꾸는 이른바 ‘파랑새 증후군(Bluebird syndrome)’을 앓고 있는 직장인이 무려 60.7%나 되더군요. 그것은 또한 현대인 우리 모두의 증후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벨기에 극작가 메테르링크의 동화극 ‘파랑새’에 나오는 가난한 집안의 남매 ‘틸틸과 미틸’과 함께 ‘파랑새’를 찾아, 보다 나은 행복을 찾아, ‘꿈속의 여행’을 다시 좀 떠나봅시다.
틸틸과 미틸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꿈에 요술쟁이 할머니가 와서 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치유를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꿈속의 여행을 떠납니다. 남매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신비한 체험을 하다가 마침내 '행복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남매는 각각 의인화된 ‘행복’과 만나게 됩니다.
남매가 만난 최초의 사람은 '사치스러운 행복'이었습니다. 연일 산해진미 배불리 먹고 마시며 화려하게 사는 ‘행복’이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나중의 모습은 처참하도록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푸른 하늘’이나 ‘정의’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행복’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답고 맑은 행복을 느끼지만 그들에게 ‘파랑새’의 소재를 물어도 미묘하게 웃을 뿐 아무도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 답은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의미일 수 있겠지요. 남매는 이어 '미래의 나라'에까지 들어가 우리네 나그네 인생여정 같은 긴 여행이자 환상적 여행을 하지만 그러나 끝내 ‘파랑새’를 찾지 못한 채 꿈에서 깨어나고 맙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날 곧 ‘크리스마스 날’, 남매의 눈에 예전부터 자기 집 안이자 자기들 곁에 늘 있어왔던 새장속의 하얀 ‘비둘기’가 비로소, 희한하게도, 파랗게 보입니다. 평범한 ‘비둘기’가 ‘파랑새’로 보인 것. ‘보는 눈’, ‘마음의 눈’이 비로소 열렸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파랑새’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자기 곁에, 자기 안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남매는 그 ‘파랑새’를 이웃에 사는 할머니네 병든 소녀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러자 그 ‘비둘기’는 소녀에게도 기쁨의 ‘파랑새’가 되어 소녀는 병을 이기고 건강한 몸이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후 틸틸이 모이를 주려는 순간 그 새조차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면서 극이 끝난다는 그것입니다. 그 ‘파랑새’조차도 참된 행복이자 영원한 행복은 아니었다는 작가의 암유일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비둘기’를 ‘파랑새’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心眼)’은 그 자체만도 인생 여정의 고초나 풍파를 많이 겪으며 수양하고 훈련 내지 연단을 받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선한 인격의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비로소 찾은, 눈에 보이는, 그 ‘파랑새’조차 우리 곁에서 날아가 버리는 것일까? 정녕 참된 행복이자 영원한 행복의 ‘파랑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 우리의 질문에 사도 바울을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4:18)
그렇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 등 저 모든 소유나 쾌락의 행복은 ‘잠깐’입니다. 실인즉 성경은 인간 우리의 보이는 ‘육체’ 자체부터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베드로전서1: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또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괴테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말처럼, 저 모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는커녕 되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공백이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세기1:27) 인간 우리의 저 ‘공백’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정욕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그것들에 탐닉하면 할수록 되레 탐욕은 더 커집니다. 돈이 돈을 먹고, 술이 술을 먹다가, 사람까지 먹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앓는 ‘각종 스트레스’라는 불안과 공허와 무의미, 높아지는 ‘파랑새 증후군’이나 자살률 등 그 모든 방황이나 불행이 다 실인즉 저 ‘공백’이 채워지지 않은 데서 오는 병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했던 현자 솔로몬도 일찍이 그 ‘공백’의 실재를 절감하고 그것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3:11)
개역성경, 개정개역성경 등의 번역인 저 “영원(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곧 히브리어 “하올람 나단 벨리밤”은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저 ‘벨리밤’이 ‘영원, 영원한 생명(永生)’을 의미하니까요. 후자의 번역이 더 낫다고 평가하는 성경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하면 ‘영원’이 마음속의 한 부분 내지 한 영역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 영원한 생명(永生)’을 주셨다”고 하면 그 의미의 절대가치가 보다 강조될 수 있다 싶으니까요.
실인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생이 지향해야 할 우선의 가치이자 절대가치는 오직 ‘영원, 영원한 생명’이다, 그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를 속여 수탈하거나 사망의 골짜기나 구렁텅이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부터가 그랬던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100%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되레 ‘세상을 이기는’ 100%의 참된 안식과 행복과 영원한 생명이자 부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급한 이후 ‘사십 년’ 동안이나 거친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를 받아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됩니다. 드디어 ‘눈에 보이는’ 우리의 땅, 우리의 집을 얻은 것입니다. 숙원이자 소원풀이를 했으니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싶었겠지요. 실상인즉 ‘척박한 땅’이었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였고, 그 ‘평범한 비둘기’가 ‘아름다운 파랑새’로 보였겠지요.
그러나 저들의 그 기쁨이나 감사나 행복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인생살이에 그것은 필요조건이지만, 그러나 거기서 참된 안식이나 행복이 오는 것은 결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rest)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히브리서4:8~9)
진실로 그렇습니다. 참 안식이나 참 행복은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주는 것도 아니고, 유산처럼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기는 참된 안식이자 영원한 안식은 오직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이자 능력이자 축복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비둘기’를 ‘파랑새’로 볼 수 있는 ‘심안(心眼)’ 이상의 세계인 ‘영안(靈眼)’이 열려야한다는 것. ‘영(靈)이신 하나님’(요한복음4:24)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에 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일개 미천한 목동 출신이었지만 수많은 환란과 사망의 골짜기를 넘고 넘어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까지 되었던 다윗 왕도 그가 그 될 수 있었던 ‘참된 안식’과 그 능력의 비밀을 이렇게 고백 및 찬양했으니까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의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편131:2)
“내 영혼이 어머니 품에 있는 젖 땐 아이와 같도다.”
실로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있는 젖 뗀 아이’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모성애 이상의 초월적인 능력이나 보호나 기묘한 도우심도 오직 거기서 옵니다. 저 ‘성 어거스틴’이 체험적으로 깊이 맛본 ‘참된 안식’ 역시 저 다윗의 고백과 같은 안식입니다.
‘젖 뗀 아이’가 뭐가 부족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합니까? ‘내 머리’ 굴리며 뭘 계산하며 탐욕을 부립니까?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한 태평천하입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의 문제조차도 다 맡기고 말입니다.
만고의 진리처럼 분명한 것은, '젖 뗀 아이'나 '어린 아이'는 '살아계신' 부모님을 100% 믿고 의지하며 단순하게 산다는 그것입니다. '고아'는 그래서 불행합니다. '영적 고아'는 그래서 더 오래 불행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10:14~15)
저 말씀을 감히 바꿔보자면, ‘너희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교만한 어른이 되어 내게 오지 않기 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한 ‘어른’이나 ‘죄인’은 자기의 그 교만이나 죄악이 외려 자기의 눈과 심령을 가로막고 있기에 ‘천국’의 참된 안식이나 행복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never enter it)’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지금 ‘어린 아이’일까요, 여전히 목도 귀도 다 굳은 ‘어른'일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I will give you rest).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rest)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11:28~30)
아무쪼록 저나 우리도 ‘어린 아이’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저 ‘독특한 비밀’이자 신령한 ‘독생자(獨生子)의 비밀’을, ‘세상을 이기는’ 저 천국의 기쁨과 평안과 참된 안식의 비밀을, 금세에서부터 깊이 맛보며 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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