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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로마인이 랍비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하나님 얘기만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어디에 있소?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겠소.“
랍비는 물론 이 악의에 찬 질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랍비는 다만 그 로마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태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시오.”
태양을 한 번 쳐다본 로마인은 곧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어떻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만물 중 하나인 태양조차
눈으로 볼 수 없는 당신이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겠소.-
-‘탈무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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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최근에 미 항공우주국에서
인류 최초의 ‘태양탐사선’을 성공리에 발사했습니다.
태양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태양의 비밀’을 풀어내고 싶어 하는 인류의 숙원이
조금이라도 더 풀리는 계기가 될지 주목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육안으로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태양의 비밀’은 더더구나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비밀’을 알아보고자 하는 게 또한 인간의 마음이자 희구입니다. 신앙유무를 떠나서, 그것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보고자하는 인간 본연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자 솔로몬은 그것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도서3:11)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실 우리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도, 인체의 메커니즘도, 내일 일도, 그 ‘시종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첨단과학과 의학이 그 ‘비밀’을 조금씩 밝혀내고 있지만 그래서 ‘부작용’을 감수하며 스스로 유식해져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비밀이 온전히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스스로 유식해진 현대인들은 저 ‘로마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당신들은 하나님 얘기만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어디에 있소?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겠소“라고 비아냥거리며 요구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되레 죽을 수밖에 없는 게 태생적으로 ‘죄인의 후예’인 그래서 영적 관계가 단절되어있는 인간 우리 모두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또 이르시되 (*모세)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33:20~23)
과연 저 ‘위대한 선지자’ 모세를 포함한 그 어떤 선지자나 성자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본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긍휼’이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성경속의 난해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face to face) 말씀하시며-(출애굽기33:11)
같은 ‘33장’에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앞의 기록과 “하나님의 얼굴은 본 자는 죽는다”는 뒤의 기록은 누가 봐도 ‘모순’이 아닌가?
저 ‘대면하여’ 곧 히브리어 ‘파님 엘 파님’에서 ‘파님’은 ‘얼굴, 대면, 목전’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얼굴과 얼굴'로 만나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친밀한 영적 관계에 대한 계시적 표현이자 인격적 내지 문학적 표현이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었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인 모세도 혹여 오해(?)가 있을까봐 같은 장 뒷 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명기해 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했다는 기록은 ‘민수기12:8절’에도 나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저 ‘대면하여’의 원문은 ‘페 엘 페’로 되어 있습니다. ‘페’는 ‘입, 말,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직역하자면 ’입과 입(mouth and mouth)’ 또는 ‘말씀과 말씀(word and word)’이 되겠지요. 역시 친밀한 영적 인격적 소통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온전히, 보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했던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 역시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부분적’인 것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성공한 ‘대형목회자’나 ‘신학박사’라 해도 영적 교만이나 자만이나 독선에 빠져선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린도전서13:9~10)
그렇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이 어디에 있소?“라고 묻는 저 ‘로마인’이나 현대인들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 성경은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이 말씀에 주목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in sprit)과
진리(in truth)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4:2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God is spirit)” 영(靈)이신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 인간처럼 ‘얼굴, 등, 손, 발’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얼굴’이나 ‘하나님의 손’ 등은 기묘한 영적 계시나 소통이나 체험의 관계를 나타내는 인격적 표현이자 문학적 표현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오직 ‘영과 진리’로만 볼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저 ‘영’ 곧 헬라어 ‘퓌뉘마’는 ‘영, 성령, 신령’ 등을 의미합니다. 저 ‘진리’ 곧 ‘아레데이아’는 ‘참, 진리, 진정, 진실’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 ‘로마인’의 질문이자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빌립’의 질문에 저 ‘랍비’보다 더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성령과 진리(*말씀)’가 하나 된 실체이자 현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한복음14:9~11)
진실로 그렇습니다. 후세의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기에 진실로 그렇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저 말씀이 참 진리였다는 그 ‘영적 일체의 의미’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성령의 비밀’을 체험한 사도나 제자들은 이후 사도 바울처럼 하나 같이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고린도후서4:4)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듯, 오늘의 우리 역시 이천 년 전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매일반 아니냐?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볼 수 있고,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오늘을 사는 우리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육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은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 역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바람처럼 임하는 성령(聖靈)’의 도우심과 ‘영원한 진리인 성경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실재를 ‘페 엘 페’ 곧 ‘말씀과 말씀, 입과 입’을 통해 ‘대면하여’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29:11~13)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망국의 한을 안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저 ‘말씀’ 그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언의 말씀 그대로 포로기간이자 여정인 ‘칠십 년이 찬 후’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적이자 역사적인 삶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 그 자체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 나그네 인생기간이자 여정인 '칠십 년이 찬 후'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 종말론적 천국이 또한 그렇게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나아가 신약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말씀(*사도행전1:8) 그대로 이후 성령체험을 통해 ‘권능’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고린도전서12:)를 받은 사람들 역시 그래서 하나님과 만난 사람들이 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영원한 생명과 생존에의 '진리'이자 ‘말씀’이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복된 삶으로 성취되는 섭리 역사를 통해, 늘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는 저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그리스도)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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