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시청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 광장의 한쪽에는 아까부터 아이들이 잔뜩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럴 것이 거기에는 한복차림에 흰고무신을 신은 한 시골노인이 나귀 새끼를 한 마리 앞에 세워 놓은 채 좌판에 앉아 있었다. 그 나귀 새끼의 등에는 좌우로 이런 내용의 글이 써진 한지가 붙어 있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무엇이오?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이 동물을 드리겠소.〉
그러나 도시에서만 살아온 거기 모인 수많은 아이들은 그 동물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냥 신기한 듯 웅성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누가 나타나서 그 이름을 제대로 알아맞히고 저 동물을 공짜로 가져갈까, 그것을 되레 더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른쪽 거리에서 검은색 싱글 정장 차림새의 한 어른이 젊은 수행원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수행원들은 가슴에 각각 ‘뉴라이트’ 곧 ‘신우파(新右派)’라는 글자가 새겨진 파란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귀 새끼 앞에 선 그 어른이 호기만만하게 말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노새요! 노새!”
그러자 젊은 두 수행원이 이구동성으로 복창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노새요! 노새!”
그러자 모여 있던 한편의 아이들이 금세 동화되어 합창하듯이 소리쳤다.
“맞아! 맞아! 이 동물의 이름은 노새야! 노새야!”
바로 그때였다. 왼쪽 거리에서 카키색 정장 차림새의 한 어른이 역시 젊은 수행원 두 사람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수행원들의 팔엔 각각 ‘뉴레프트’ 곧 ‘신좌파{新左派)’라는 글자가 새겨진 빨간 완장이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나귀 새끼 앞에선 그 어른이 호기만만하게 말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말이요! 말!”
그러자 젊은 두 수행원이 이구동성으로 복창했다.
“이 동물의 이름은 말이요! 말!”
그러자 모여 있던 다른 한편의 아이들이 일제히 합창하듯 소리쳤다.
“맞아! 맞아! 이 동물의 이름은 말이야! 말이야!”
그러자 비통한 얼굴을 한 시골노인이 두 손을 들어 무리를 진정시키고 난 후, 그렇게 말했던 두 어른을 바라보며 차라리 답을 가르쳐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피차 죄인인 우리 인생,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신 것이 무엇이오?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신 것이 무엇이오?”
두 어른은 대답 대신 현실을 모르는 시골노인이 고리타분하다는 듯 무시하며 야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자 시골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이 타신 것은 당시 기득권을 누리는 귀족들이 타던 ‘노새’가 아니었습니다. 무력 투쟁을 좋아하는 군사들이 타던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신 이 동물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제야 두 어른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수가 탄 것이 무엇인지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오. 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느라 그런데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소. 나는 이 동물의 이름을 알아맞히고 이 동물을 갖고 싶은 욕심도 전혀 없소이다. 나는 해답을 모르는 이 아이들에게 보다 멋진 비전, 보다 강한 비전을 가르쳐주고 싶었을 뿐이오! 이 아이들이 서로 자기 이념을 가지고 두 패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된 그 자체만으로 나는 만족하오.”
그리고 두 어른은 역시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수행원들을 데리고 곧 그 자리에서 떠나 가버렸다. 각각 오른쪽의 거리로, 왼쪽의 거리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을 하던 시골노인도 이내 나귀 새끼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여전하게 뒤에 남은 수많은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더욱 격렬하게 서로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나아가 피가 흐르도록 치고 박는 주먹질까지 하면서 해가 지도록 계속 싸우고만 있었다.
“이 바보들아! 저 동물의 이름은 예수님이 타셨다는 노새야! 노새!”
“이 멍청이들아! 저 동물의 이름은 예수님이 타셨다는 말이야! 말!”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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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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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길은 좌파의 이념도 아니고, 우파의 이념도 아닙니다.
‘평등’을 강조하는 좌파의 ‘인류 최대의 실험’이었던 마르크스와 레닌의 유물론에 의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는 불과 70여 년의 생명이었던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실상인즉 사라졌고, 갈수록 사람과 사람 간의 나아가 국가와 국가 간의 빈부(貧富)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병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는 ‘자유’를 강조하는 우파의 신자본주의도 작금의 세계적 경제 위기를 초래한 자본이나 금융가 등의 자체 모순과 함께 기울어지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하는 신실한 삶, 검소한 삶이 오히려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를 평탄과 형통으로, 공의와 사랑으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길임을 오늘의 시대나 세속화된 그래서 비판받는 신앙 풍토를 통해서 되레 역설적으로 확인 및 절감하게 됩니다.
저 구약시대의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예호슈아)’는 신약시대의 ‘예수’와 같은 이름입니다. 물론 동명이인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출(出)애굽 시킨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조차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후의 승리 및 가나안 땅에의 정착 그 구원을 여호수아가 이룬 것처럼, 그렇게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또한 예표하는 계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저 이름을 풀어보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인 ‘여호와’와 ‘구원하다, 보호하다, 승리하게하다’는 의미인 ‘야솨’의 합성어가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 내가 손해를 보는 그런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검소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하는 비용보다는 육신마저 서서히 병들게 하는 주색이나 탐식, 외모를 가꾸는 사치나 과시나 허영, 불화, 증오, 스트레스 등에 의한 비용이 결국엔 더 크고 그래서 더 큰 손해 아니던가요?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 곧 자녀들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연약하고 허무한 인생인 우리 자신들의 복된 삶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죄악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세상으로부터, 악한 영(靈)으로부터 ‘구원하고, 보호하고, 승리하게’ 하시고자 베푸시는 배려이자 은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겸허한 순종과 이웃을 섬기는 평화의 삶이자 검소와 절제의 삶의 대명사인 ‘나귀 새끼’를 타고 앞서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보호와 승리의 ‘참된 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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