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성령, '우리 안에서 숨쉬는 하나님'

이형선 2012. 6. 18. 10:29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안에서 숨쉬는 하나님의 숨결을 뜻합니다.

  ‘영(靈)’이라는 헬라어 ‘프뉘마’는 ‘호흡’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좀처럼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너무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숨을 쉬는데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호흡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친밀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더 친밀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며,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 친절함과 선함,

  온화함과 평화, 그리고 기쁨을 주는 이는 성령입니다.

  죽음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도 성령입니다.

  “임하소서, 성령님, 임하소서”라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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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불과 몇 분만 숨을 쉬지 못해도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산소의 소중함을 전혀 모릅니다.

   숨쉬는 인체의 기능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장기에

   ‘숨 막히는 병’이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고인이 되신 당대의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이 저 짧은 글에서,

   ‘성령은 우리의 호흡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도 그 소중함 때문이겠지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聖靈)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8:9-10)

 

 

   ‘성령’ 곧 ‘프뉘마’는 또한 ‘바람’이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바람’처럼 임하셔서 ‘호흡’처럼 ‘우리 안에서 숨쉬는 하나님(The breath of God within us)’.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실인즉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친밀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더 친밀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겉사람’보다는 우리의 ‘속사람’이 우리에게 더 친밀하다는 그 영성의 실재. 내 속에 살면서 진실로 나를 살리는 ‘참 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내 ‘겉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속사람’ 곧 ‘하나님의 영’이라는 그 실재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병들어서 일찍 죽기도 하고, 건강하게 장수해도 백년을 살기 어려운 한계입니다. 또한 어떤 동물들처럼 다만 장수한다고 해서 정작 가치 있는 삶도 아니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단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가 되레 영원한 것처럼. 실인즉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분들의 헌신적인 삶은 단명할수록 세상에 대한 호소력이나 영향력이 더 강하고, 살아서 했던 일보다 죽어서 되레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근래에 영화〈울지마, 톤즈〉를 통해 종교의 유무나 종파간의 벽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숙연한 감동과 함께 인간애에 대한 숭고한 메시지를 숙제로 남겨주고 가신, 고 이태석 신부이자 의사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자신보다는 어려운 원주민들을 더 보살피느라 바빴던 그분은 사역을 위해 일시 귀국한 고국의 병원에서 뒤늦게 발견된 암으로 인해 아직 젊은 40대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왜 저렇게 아까운 분을 세상에서 너무 일찍 데려가시는 것일까? 차라리 나 같은 사람을 데려가시고, 할 일이 많은 저런 분을 세상에 남겨놓으셔야 하지 않는가? 한때 저는 그런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그럴 것이 그분이 살아서 돌아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톤즈의 육신이 일그러진 나환자들을 위시한 수많은 병자들과 검은 피부의 아이들이 흘리는 영롱한 이슬 같은 눈물 앞에서, 인간 우리의 뜻이나 소원과는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왠지 야속하리만큼 무심하시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짓던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 같은 비움과 낮춤 그 감동적인 헌신의 삶을 통해 ‘이웃 사랑’이라는 인간애의 숭고한 가치와 범위를 되레 거국적으로 높이고 확장시키고 열매 맺게 하신 그분은 실로 살아서 했던 일보다 죽은 후에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정녕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과연 관 뚜껑이 닫힌 후에 시작됩니다. 세상은 그것을 ‘역사의 평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바로 ‘성령의 비밀’이자 죽었으나 ‘산 자의 비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한복음14:12)

 

 

   신약성경 ‘사도행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40일 후에 승천하신 곧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성령’의 신비한 역사와 초월적인 능력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나 제자들은 물론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곧 ‘숨쉬는’ 성령 곧 그리스도 영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산다는 ‘영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의 영속성(永續性)이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쉽게 그리스도 인격으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세상의 각종 탐욕을 따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성령의 소욕’ 사이에서 씨름하며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 이후의 심판은 차치하고라도 세상에서의 삶조차도 조금만 더 긴 안목으로 보면, 나를 진실로 건전하고 복되게 살리는 삶은 육욕(肉慾)에 충실한 삶도 아니고, 세상 지식에 의해 함양된 이성(理性)에 충실한 삶도 아니고, 되레 그런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하고 ‘참 나’인 ‘그리스도의 영’의 소욕을 먼저 따를 때 이웃과 더불어 공존하는 복된 삶이 이루어지고, 복된 가정도 사회도 이루어지더라는 그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면 성령이고, 그리스도의 영이면 그리스도의 영이지, 왜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동일시하느냐? 그렇게 의문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을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풀어봅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한복음16:13-14)

 

 

   육신을 입은 존재가 아닌 성령은 세상의 질서를 위해 스스로 나서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부터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세례 요한’까지 대대로 선택한 ‘하나님의 종’들 곧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통해 구원사역이 완성된 신약시대에서의 성령은 오직 ‘내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을 노래하는 대형 목회자나 부흥사라고 하더라도, 그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면 그가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나 능력을 발휘한다 쳐도 그가 받은 영은 분명히 ‘성령’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혹은 자기과시적인 ‘미혹의 영’일 뿐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과 삶’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영적 지도자의 영은 모두 스스로 교만에 빠진 미혹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구약시대의 특정 인물이나 말씀을 더욱 강조하여 권력이나 재물이나 육욕에 대한 세상 탐욕을 합리화시키며 ‘세속화’로 인도하는 그것도 미혹의 영입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이나 사건은, 구약에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의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인 곧 성취이자 완성인 그리스도의 시각 안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표현 그대로,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의 ‘성전보다 더 큰 이’이자 세상 지혜와 부귀영화의 대명사인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인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신 분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죽은 모세도 솔로몬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7: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