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우리는 신문과 TV 등의 언론을 통해 이른바 ‘대형 교회 세습 제1호’라고 불리는,
강남에 소재한 모 교회의 원로목사님께서 공개적으로 세습을 회개하는 내용의 회견에 관한
기사나 보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자질 없는 아들을 목회자로 세워 하나님과 교인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하면서,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나아가 교회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부일 수 있는 그런 기사를 교계 언론도 아닌 일반 언론에서 그렇게 비중 있게 언급하고 있는 세태를 보면서, 기독교 대형 교회들이 한국사회에 끼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저는 다시금 실감해야만 했습니다.
“대형 교회들아 들으라.”
그런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시대가 아니라 거꾸로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시대는 불행합니다. 그럴 것이 ‘들으라’ 곧 ‘쉐마’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계시의 말씀이고,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6:4-)
저 말씀은 곧 구약 ‘신명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신명기는 또한 이렇게 경고 및 예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8:12-)
저는 부흥에 성공한 대형 교회나 사회에서 ‘재물을 얻어’ 성공한 분들을 시기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성공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쓰면 선이 되고 악하게 쓰면 악이 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재물이나 성공 그것을 인생의 창조주 곧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래서 거꾸로 세상의 그것을 ‘주인’으로 섬기면 그것은 ‘교만’이자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유나 성공 그것이 되레 존재 자체인 우리의 영혼을 타락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덫이자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6:24)
한편 대형 교회일수록 그 사회적 영향력이나 책임 역시 ‘대형’이 되니까, 세상 언론이 또한 비중 있게 비판하고 나서는 것도 당연한 소치입니다. 그것도 교회가 감수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대형 교회’의 신앙이 타락해서 인본주의 내지 물질주의 중심으로 세속화 되면 역시 인본주의 세력인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이방 세력을 ‘징계의 매’로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고 때리도록 역사 및 섭리하셨습니다. 이미 완악해진 이스라엘은 그래도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여버렸고, 그 후 로마제국에 의해 결국 최종적으로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신정(神政)국가이자 공동체이자 대형 교회였던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멸망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 그대로 그 ‘촛대’가 옮겨졌을 뿐, 어느 시대나 ‘칠천 명’ 혹은 ‘남은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있었고, 그런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 끝날까지 ‘하루가 천년처럼, 천년이 하루처럼’ 집요하게 진행 및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역사 및 섭리의 전철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흥했던 유럽 교회들이 저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이제는 쇠락해서 예배당 건물이 양로원이나 심지어 유흥가로 변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너 나 없이 사람의 심리라는 게, 다 죽어도 나는 혹은 우리는 안 죽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산다는 그것입니다.
‘내가 천막을 치고 개척해서 죽을 고생을 다하여’ 마침내 대형 교회를 이룬 목회자 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종교권력과 재물이 보장되는 그 대단한 기득권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런 대단한 기득권이 전혀 없는 작은 시골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다면, 그것이 되레 십자가의 대물림이자 사명의 대물림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금을 받아서 이룬 대형 교회의 권력이나 재물은, ‘김일성의 이름으로’ 이룬 세습이나 ‘이병철이나 정주영의 이름으로’ 이룬 세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한계 앞에서, 우리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진실로 겸손하게 그것을 ‘성별(聖別)’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될 수 있는 ‘거룩’ 곧 ‘하기아스모스’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비판보다 늘 더 중요한 것은 해법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래서 전 여기서 이십세기 수도자이자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의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191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영국을 거쳐 1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머튼은,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서 24살 되던 해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수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령의 공허함을 크게 앓다가 마침내 어거스틴의 서적을 읽고 큰 감명을 받고 수도회에 들어갑니다. 이후 미국 지성들에게 신선한 영적 변화를 일으켰던 그가 동양의 지혜인 장자(莊子)의 짧은 글을 번역해서 구미(歐美) 사회에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빈 배〉라는 제목의 글이 그것입니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성질이 아주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또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배 안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비단 특정 대형 교회의 세습이나 비리 등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개개인에게도 ‘내 능력 내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그래서 ‘내 것’이라는 크고 작은 세상의 소유나, 그것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적인 욕심은 다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려면 우리에게 ‘배’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면 배조차도 버려야 합니다. ‘배’를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인 대형 교회’에게 아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자 청년’에게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그만 돌아서가버립니다. 그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느라.-(마태복음19:24)
그러니까 구원의 해법은 한 마디로 ‘빈 배’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푯대도 없이 다만 ‘빈 배’가 되어 무사안일하게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은 아니겠지요. 어차피 죽을 때 ‘빈 손’로 가는 인생인데, 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빈 배’가 되는 사람에게 오히려 '하늘의 보화‘라는 영원한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 그렇게 '빈 배'가 되었던, 그렇게 '케노시스(비움과 낮춤)'의 삶을 살았던 그래서 ‘하늘의 보화’를 소유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도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6:8-)
정녕 그렇습니다. ‘하늘의 보화’보다 더 큰 소유는 없습니다. 더 큰 생명도 없습니다. 더 큰 능력도 없습니다. 더 큰 기쁨도 없습니다. 더 큰 영향력도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에게는 당신의 십자가에 대한 희망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겸손과 고통과 죽음으로 나를 모든 헛된 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
당신이 가난하신데 왜 내가 부유하기를 원해야 합니까?
거짓 예언자들을 들어 높이고 참된 예언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자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왜 내가 그들의 눈에 유명하고 강력하기를 갈망해야합니까?- (토마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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