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거룩한 직업의식, 거룩한 성공의식

이형선 2012. 7. 2. 11:03

 

   근년에 계속되는 세계적인 경제 및 경기 침체의 여파로 우리나라 청년들의 실업 문제도 이미 심각한 숙제가 되어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굳이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과연 우리의 인생을 대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제는 ‘일과 사랑’ 그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지지 못하는 실업률의 증가는 그래서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직종의 전문적 직업인이 되기 위해서는 긴 세월 열심히 남다른 노력과 형설의 공을 쌓아야만 가능합니다. 요사이는 취업을 위한 청년들의 ‘스펙’에 실무적으로 쓰일 수 있는 자격증도 몇 개 정도는 필수 항목이라고 그러더군요.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나아가 이웃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실인즉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직업인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주자”는 역설처럼, 공부도 그렇고, 나아가 정당하게 돈 벌어서 겸손하게 남을 도와줄 수 있고, 정당하게 성공해서 겸손하게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받은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 말입니다.

 

 

   실인즉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능력 있는 출중한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직간접으로 돕고 살리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이 조선을 살리고, 요한 웨슬리 목사 한 사람이 영국을 살리고, 성자 간디 한 사람이 인도를 살린 것처럼 말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래서 또한 재벌 “삼성(三星)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도 나온 것이겠지요.

 

   영적 세계에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해 수천 수만 명의 생명 자체가 심판을 면하고 용서 및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예루살렘)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5:1)

   또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수많은 인간 및 인류가 용서 및 구원을 받는 것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성의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재능)’ 그 자기 분량이나 분수에서 품을 수 있는 최선의 꿈과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닌 ‘착하고 충성된 종(good and faithful servant)’(마태복음25:23)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욕심이 없다’는 것과 ‘무능하다’는 것은 별개이니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최고가 되라”고 전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겼든 ‘두 달란트’를 남겼든 그 실적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종들을 모두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과 상관없이 ‘착하고 신실한 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도 친히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2:2)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일’이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저 ‘일’ 곧 ‘미라카’는 ‘일, 노동, 직업’을 의미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은 아담에게 일을 주십니다. 인류 최초의 직업이자 인간의 본래적인 직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2:15)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곧 인본주의 세상 문화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이자 신본주의 ‘문화 명령’을 청지기 자세로 수행하라고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직업을 주신 것. 현재적 의미로 ‘가정을 다스리며 지키는’ 아울러 ‘직장을 다스리며 지키는’ 신성한 직업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각별히 주목할 것은 저 ‘다스리다’가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스리다’ 곧 ‘아바드’는 ‘노동하다, 예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기도(예배)는 노동이고, 노동은 기도(예배)이다”라는 명언도 저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교회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직장생활 따로’가 아닙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의 삶이 다 성역이자 소명이자 사명의 자리라는 것. 저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섬기는 삶’ 그것이 곧 ‘다스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인간 본연의 직업의식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게 ‘다스리며 지키는’ 자리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되레 신성한 직업을 잃어버립니다. 사탄의 달콤한 유혹처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지도 못하고, 다만 인본주의라는 덫 그 자기 교만에 스스로 갇혀버린 아담은 그래서 결국 ‘에덴’에서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그럴 것이 ‘에덴 동산’이란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로써 교제하는 영적 가족 관계의 동산인데,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한 영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단절되어버렸으니 쫓겨날 수밖에요. 과연 하나님과 인간의 태초적 관계에 대한 고도로 계시적이고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고 함축적이고 또한 문학적인 성경 ‘창세기’의 표현이자 증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세기3:23)

 

   그렇게 실락원(失樂園)한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함으로서 저주 받은 그 결과로 인해 항상 기도하고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했던 신성한 노동은 그 후 수고와 짐과 불평과 근심과 불안 일색의 고역이 된 것입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생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의 비극은 그렇게 살다가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허무하게 죽어야한다는 그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3:19)

 

   그럴 것이 영(靈)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이미 잃어버린 인간에게 남은 것은 ‘동물의 세계’일 뿐이니까요. 하긴 동물치고는 이성(理性)이 있는 유식한 고등동물이 되겠지요. 그래서 되레 선악의 기준이나 가치관이 왜곡되고, 직업의식도 왜곡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이기적인 인간 자기의 아성, 자기의 영광 곧 ‘바벨탑 영광’을 구하면서 스스로의 야망이나 탐욕 및 정욕 등에 속으면서 살다가 바벨탑처럼 또한 무너져서, 바벨탑을 무덤으로 삼고 다만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숙제는 과거적인 실락원에 있지 않습니다. 에덴의 회복 곧 ‘복락원(復樂園)’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선 오늘의 에덴 동산은 특정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의 심령’ 그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나 ‘저기’라는 그 장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말씀 역시 그렇듯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4:23-)

 

 

   물론 저 ‘예배하다’는 또한 ‘노동하다’입니다. 주님의 삶에서 ‘예배’ 자체가 또한 ‘일’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예배하다’의 문제가 온전하게 회복 내지 정립이 되면 아울러 ‘노동하다’는 직업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영적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자기의 야망이나 출세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심령의 삶은 유식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실인즉 어리석고 미련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의 ‘황금률’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7:9-)

 

 

   그렇습니다. 거룩한 직업의식 내지 거룩한 성공의식은 한 마디로,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그 장소에 상관없이 어디서든 자기 몫의 최선을 다해 먼저 하나님을 대접하고 또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남을 섬기고자 하는 신실한 열심과 노력에서 나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