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새끼가 날 수 있을 만큼 깃털이 자랐지만
아직도 그 폭신폭신한 둥지에서 늑장부리기를 좋아할 때, 어미는 그 둥지를 어지럽힌다.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신명기32:11)
그래서 독수리는 새끼에게 날기를 가르친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지었던 둥지를 어떻게 뜯어내는지를 주목하라.
어미는 그 새끼에게 둥지를 떠나서 햇빛이 비치는 드높은
창공을 날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둥지의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뜯어낸다.
만약 그래도 새끼들이 둥지를 떠나지 않으면 그 둥지를 아주 허물어버린다.
그러면 새끼들은 날든지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든지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도 그와 같이 자녀인 우리들을 다스리신다.-
*브록크(B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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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주된 양식인 토끼나 쥐는 땅 위에 있습니다.
인간 우리의 양식도 재물도 땅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도 우리 인간도 늘 이 땅에 안주(安住)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길짐승이나 가축은 이 땅에, 이 세상에 적당하게 안주하면 적당하게 한 세상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길짐승이 아닙니다. 가축도 아닙니다. 독수리가 둥지나 이 땅 위에 안주하면 죽습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알고, 그 하늘을 날아야만 되레 땅의 양식도 구해서 살 수 있는 날짐승입니다.
인간인 우리 역시 길짐승이 아닙니다. 가축도 아닙니다. 또한 독수리 같은 날짐승도 아닙니다.
인간인 우리는 ‘하늘나라’를 알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날아야만 살 수 있는 영적(靈的) 피조물입니다. 곧 영(靈)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기1:27)
따라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그런 정체성 내지 존재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거기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참 행복의 비밀이 비롯되고, 인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고난과 고통에 대한 이해도 역시 거기서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독수리가 길짐승처럼 다만 둥지나 땅에 안주해서 살려고 하면 그것은 그에게 큰 불행입니다. 날지 못해서 가축처럼 ‘닭장’에 갇힌 채 사육되는 무사안일한 독수리의 신세를 우리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아야만 하는 영적 존재로 태어난 우리 인간이 이 땅의 ‘둥지’나 세상에 안주해서 육적 중심으로 살려는 타성이나 욕망은 그런 독수리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요? 그 답은 우리 개개인 각자의 몫입니다.
분명한 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 중심으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예 이 땅 위에 ‘머리 둘 곳’을 두지 않으셨다는 그것입니다. 그것은 ‘행인과 나그네 같은’ 이 세상에서의 인생 여정에 안주하려는 속성에 대한 전적인 자기 부인(否認)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태복음8:20)
저 ‘인자는 머릴 둘 곳이 없다(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는 의미는 능력이 없어서 못 가진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처럼 거처도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빈털터리 노숙자로 살아라는 의미도 전혀 아닙니다. 주님을 겸손하게 믿고 의지하며 본받으며 살아야지, 스스로 주님처럼 행세하며 살려는 삶은 오히려 교만이나 미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중심으로 순례자처럼 사셨던 주님의 저 ‘무소유의 삶’의 의미는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화두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는 끊임없이 고난과 고통의 풍랑이 일고 파도가 칩니다. 때론 구약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의로운 사람 욥’처럼 자식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순간에 다 죽고 재산도 잃고 자신마저도 차라리 ‘저주’ 같은 몹쓸 병에 걸리는 등의 비참한 우환을 겪기도 하고, 신체적 장애나 실직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소외나 불운이나 불행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론 예수 그리스도처럼 전혀 억울한 오해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 내지 물질 등 세상 중심적인 내 희망이나 이기적인 내 욕망대로 이루어지 않을 때 그것을 고난이나 고통이나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 고난을 당할 때 “Why? Why me?”라고 절규하며, 세상이나 신(神)을 원망하기도 하고, 회의하며 낙심 및 절망하기도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사람에게 큰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크고 영원한 하나님 중심의 세계를 주시기 위하여 작고 허무한 세상 중심의 세계를 허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그가 애지중지하는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황당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고 시행합니다.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오히려 하나님이 서둘러 그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시며 나서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며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세기22:12-)
그래서 또한 선교 현장에서 모진 고난과 박해를 수없이 당했고, ‘가시’ 같은 신병(身病)의 고통에도 시달리며 살아야했던 사도 바울도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감사 및 찬양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함 즈음에 또한 피한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10:13)
따라서 어린 새끼를 위해 ‘둥지를 허무는’ 어미 독수리의 마음이 오직 ‘사랑’이듯이, 인간 우리의 ‘둥지가 허물어지는’ 세상의 절망적인 모든 고난이나 고통이나 불행 그것 역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인도 및 섭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보다 영적(靈的)인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기 위한 훈련 및 연단의 과정이자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보다 심오한 배려이자 은혜이자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은 그 성격이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의한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고난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나 소크라테스처럼 의인이 당하는 의로운 고난이든지, 욥의 경우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난해한 고난이든지를 막론하고, 당시에는 물론 괴롭지만 그러나 보다 긴 안목으로 보면서 그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적 이유와 비밀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인내하며,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 의미를 ‘이후에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13;7)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난으로 점철된 그의 삶 속에서 열려진 ‘장차’의 안목으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18-)라고 말한 후, 이렇게 체험적인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그렇습니다. 지금 ‘가시’ 같은 몹쓸 병을 앓고 계십니까? 지금 입학이나 취업이나 사업 등에 실패해서 절망하고 계십니까? 지금 신체적 장애 등으로 소외와 편견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불의의 사고나 사건을 당해 낙심 및 회의하고 계십니까? 지금 부부관계나 인간관계의 악연으로 불행의 늪에 빠졌습니까? 그래서 ‘둥지’까지도 허물어졌습니까?
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가 되레 하늘을 찾고 하늘을 날아야 할 때입니다.
오히려 그때가 ‘동방의 의인 욥’처럼, ‘사도 바울’처럼 보다 겸허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며, 보다 진실하게 성경 속에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날아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다 보면, 주어진 모든 고난이나 고통이나 불행이 마침내 합력해서 되레 선이 되고, 구원이 되고, 금세와 내세에 걸친 영원한 생명이자 축복이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곧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악창)를 핥더라’(누가복음16:20-)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거지 ‘나사로’는, 그러나 죽어서 ‘낙원’ 곧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친히 증언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인내한 ‘나사로’의 신앙의 삶은 오직 그의 이름이 대변해줍니다. 히브리어 이름 ‘나사로’는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다(God is my helper)’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후에는’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그렇게 증언될 수 있게 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 )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편1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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